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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톰슨과 전자의 발견

톰슨과 전자의 발견 

1897년 4월 30일 영국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J. J.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지난 4개월간에 걸친 음극선에 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자신이 음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corpuscle)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알아냈다고 했는데, 톰슨이 발견한 이 미립자를 훗날 사람들은 전자(electron)라고 부르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전자는 물성과학 분야는 물론 전자공학, 의공학 등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극선에 대한 연구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전자라고 부르는 개념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과학자들의 수많은 실험과 이론적 작업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음극선 연구의 시작


전자들의 흐름인 음극선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38년부터 영국의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다양한 기체로부터 스파크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기 방전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기압 하에서의 기체 방전뿐만이 아니라 압력을 낮추었을 때 나타나는 방전의 모습도 관찰했다. 그는 기체의 기압이 낮아지면서 양극에서 음극까지 다소 지속적인 발광이 나타나다가 기압이 아주 낮아지면 전극의 중간 지점에서 어두운 지역이 나타나면서 발광이 중단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흔히들 패러데이 암부(Faraday dark space)라고 부른다. 

자장이 방전관에 미치는 영향은 독일의 본 대학의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lcker, 1801­1868)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본래 그는 해석기하학 분야가 전문인 수학자였고 1836년부터 1847년까지 본 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플뤼커는 1847년 본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옮기면서 이론물리학이 아닌 실험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본의 유리기구 제작자인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ßler, 1814­1879)는 플뤼커에게 전기 방전에 필요한 유리관을 만들어주었는데, 플뤼커는 그 관을 가이슬러관이라고 불렀다. 전기 방전을 연구하던 플뤼커는 1858년 자력이 기체 방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실험을 하던 중 자석 근처에서 기체 방전이 어느 정도 휘는 것을 관찰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이듬해 방전관의 음극 근처에서 밝은 녹색의 발광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사용했던 '진공관'의 진공도는 그다지 높지 않아 더 이상의 정밀한 실험은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가이슬러는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는 가이슬러관 뿐만이 아니라 고진공을 만들 수 있는 진공 펌프도 발명했다. 그는 1855년 개스킷이 필요 없는 수은 진공펌프를 발명했는데, 이것으로 기체 방전관 내의 진공도를 대기압의 만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1864년에는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기구제작자인 륌코르프(Heinrich Daniel Rhmkorff, 1803-1877)는 불꽃 유도 코일을 개발해서 1피트 이상의 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고전압을 발생시킬 수 있게만들어 주었다. 

플뤼커의 제자였던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는 가이슬러의 수은 진공펌프와 륌코르프의 고전압 발생장치를 이용해서 1869년 고진공 방전관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위 '글로우 광선'(Strahlen des Glimmens)을 발견했다. 그는 이 광선이 고체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것을 볼 때 음극에서 직선으로 전파된다고 생각했고, 이 광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고 유리에 닿으면 발광을 한다는 것도 관찰했다. 1876년 독일 베를린 대학의 헬름홀츠 밑에서 연구하던 골트슈타인(Eugen Goldstein, 1850­1930)은 플뤼커와 히토르프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플뤼커와 히르토프의 실험을 반복해본 골트슈타인은 자신이 관찰한 광선에 '음극선' (Kathodenstrahl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크룩스의 발견


1878년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는 훗날 크룩스관(Crookes tube)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고진공관 속에서 나타나는 전기 방전 현상을 연구하여 방전관 내에서 소위 '크룩스의 暗部'(Crookes dark space)의 두께가 방전관 내의 분자의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넓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독일에서 가이슬러라는 기구 제작자가 플뤼커를 도운 것처럼 영국에서는 찰스 김밍엄(Charles H. Gimingham)이라는 사람이 크룩스에게 유리 기구를 비롯한 각종 기구를 만들어주었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실험에서 크룩스는 음극선이 고체를 통과할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연구를 종합해서 크룩스는 1879년 왕립학회의 베이커 강연에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발표했다. 이 때 그는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보통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와는 다른 물질의 '제 4 상태'라고 불렀다. 
 

독일의 반응


음극선이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서 물질의 제 4 상태에 해당한다는 크룩스의 주장에 대해서 음극선을 에테르적인 파동으로 해석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가했다. 우선 1883년 킬 대학에 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글로우 방전에 관한 자신의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음극선이 정전기장에 의해서는 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헤르츠는 음극선이 빛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음극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는 것도 빛의 편광면이 자장에 의해서 회전되는 광자기회전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헤르츠의 이런 생각은 하인리히 비데만(Heinrich Wiedemann, 1826­1899), 골트슈타인 등과 같은 독일의 다른 과학자들도 받아들였던 생각이었다. 
 

슈스터와 톰슨의 실험


한편 영국에서는 아서 슈스터(Arthur Schuster, 1851­1934)라는 과학자가 방전관 내에 있는 음으로 하전된 입자가 자장에 의해서 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실험의 결과로서 1890년 그는 글로우 방전관 내에서 음으로 하전된 입자들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 즉 e/m를 측정해서 이것이 103과 106 e.m.u. g?1사이에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극대치인 106을 고려했다면 그는 1897년 J. J. 톰슨이 측정한 양인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에 가까운 값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대치를 고려하지 않고 분자의 이온에 해당하는 중간의 양만을 신뢰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은 음극선의 본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체에 있어서의 패러데이 전해질 법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슈스터의 이 실험은 방전현상을 연구하던 당시의 영국 과학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J. J. 톰슨도 분명히 이 논문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가 슈스터의 영향으로 나중에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톰슨이 이 실험을 하게 된 데에는 1895년의 X-선 발견과 그 이듬해의 방사선 발견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X-선 발견의 영향


뢴트겐의 발견이 알려진 직후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 학계에서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896년 2월 24일에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실상 베크렐 집안은 3대째 대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우라늄 화합물을 포함한 여러 물질들의 형광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견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톰슨의 전자 발견 역시 X-선에 대한 영국 과학자들의 반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음극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은 당시 크룩스 이래로 영국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입자적 해석의 전통을 계승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톰슨은 그 이전에 기체 방전,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 등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X-선 발견 이후 톰슨이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금 음극선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이다. 

톰슨(Joseph John Thomson)은 1856년 12월 18일 영국 맨체스터 근처 치덤 힐(Cheetham Hill)에서 태어났다. 1871년 맨체스터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1876년까지 그곳에서 물리학, 수학, 공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톰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번 트리니티 칼리지에 도전해서 마침내 입학에 성공하게 된다. 1876년부터 1884년까지 그는 이 트리니티 칼리지를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 활동을 했다. 1879년 석사학위를 한 그는 곧바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상근 펠로(Resident Fellow)가 되었고, 1881년에는 조교수(Assistant Lecturer)가 되었다. 1884년 톰슨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과 레일리(Lord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1842?1919)에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겸 제 3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 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기존의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 이외에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케임브리지 실험과학의 전통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전자' 발견을 비롯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한 공로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톰슨은 케번디시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연구소에는 수많은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몰려들었는데, 1884년에서 1918년 그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 길러 낸 과학자들 가운데 7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7명의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 그리고 수십 명의 물리학 교수가 나왔다. 1918년 자신이 과거에 몸담고 있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Master)이 되면서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직을 자신의 제자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1940년 8월 30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 톰슨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직을 아주 잘 수행했다. 

톰슨은 젊은 시절부터 통일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기계적 철학과 유추 개념을 이용해서 물질, 전기, 에너지를 통일할 수 있는 에테르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화학 원소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원자 모형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1882년 소용돌이(vortex) 원자 모형을 제안하기도 했다. 톰슨은 이 모형으로 화학원소의 주기율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20세기 초에도 이어져 심지어는 그의 원자 모형을 반대하고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선택했던 닐스 보어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톰슨은 1884년부터 X-선 발견 소식이 있기 직전인 1895년까지 주로 기체 방전과 화학 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 분야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물질, 전기, 에테르 등에 대해 통일적인 이해를 갖기 위해서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물질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뢴트겐에 의해 X-선이 발견된 이후인 1896년부터 톰슨은 X-선의 이온화 성질에 대해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톰슨의 음극선에 관한 연구는 미립자 가설에 대한 톰슨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체 방전, 개별 전하, 분할가능한 원자 등에 대한 톰슨의 관심에서 시작된 연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6년 말부터 음극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톰슨은 다음 해인 1897년 4월 30일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자신의 미립자 가설을 최초로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음극선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의 질량을 지닌 음으로 하전된 미립자이며, 원자들은 바로 이 미립자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톰슨은 무엇보다도 1883년 헤르츠가 했던 실험, 즉 정전기 장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톰슨 역시 헤르츠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보았는데, 그 역시 처음에는 헤르츠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된 실험을 통해 정전기장 속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 이유는 음극선에 의해 희박화된 기체에 주어지는 전도성(conductivity)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톰슨이 음극선관 내의 진공도를 더욱 높이자 이 전도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마침내 헤르츠의 실험과는 달리 정전기장에서도 음극선이 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음극선이 전기장과 자기장에서 모두 휘는 것을 확인한 톰슨은 이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전기장과 자기장 모두에서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했다.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한 결과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는 기체와 상관없이 거의 일정했다. 자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107에서 3.12?107 e.m.u g?1로서 평균 1.96?107 e.m.u g?1로 나타났으며, 전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값은 0.67?107에서 0.91?107 e.m.u. g?1로서 평균 0.78?107 e.m.u. g?1로 나타났다. (톰슨의 논문에는 m/e로 값이 나와 있으나 편의상 e/m으로 기술한다.) 이렇게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107 크기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톰슨은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 (현대적인 e/m 값은 (1.7588028 ? 0.0000031)?107 e.m.u g?1이다.) 음극선에 관한 톰슨의 완전한 논문은 1897년 8월 7일 『필로소피컬 매거진』(Philosophical Magazine)에 제출되어 그해 10월에 출판되었다. 

1897년 당시에 톰슨은 자신의 논문에서 단순히 미립자의 존재에 관한 언급만을 했을 뿐 음극선 입자 가설에 대해서는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톰슨이 음극선 입자 가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1899년 이후의 일이며, 자기 자신은 평생 동안 '전자'(electron)라는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톰슨이 말한 미립자가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전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역사적 탐구를 필요로 한다. 

1890년대에 라모(Joseph Larmor, 1857- 1942)와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는 전자기학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소위 전자론(electron theory)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에서 나오는 전자 개념은 전적으로 전자기학 내의 이론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진 개념이었지, 아직 구체적인 실험에 의해서 전자 그 자체의 존재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음극선 연구가 주로 자유 하전입자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면 분광학적 연구는 원자 내에서 움직이는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온네스(Heike Kammerligh Onnes, 1853- 1926)가 이끄는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일하던 제만(Pieter Zeeman, 1865­ 1943)은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게 되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즉 1896년 12월 분광학을 연구하던 제만은 자기장에서 나트륨 D-선들의 스펙트럼 선이 갈라지는 소위 제만 효과를 발견했던 것이다. 당시에 전자기학 분야의 대가이며 역시 네덜란드 과학자였던 로렌츠는 제만이 발견한 이 현상을 개별 원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전자론으로 해석하여 역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계산했다. 제만의 실험과 로렌츠의 해석으로 계산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7 e.m.u. g?1 크기로서 몇 달 뒤에 톰슨이 측정한 결과와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톰슨의 음극선 실험이 나오고 몇 달 뒤에 피츠제럴드(George Francis FitzGerald, 1851­1901)는 음극선이 자유 '전자' (electron)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이리하여 자유 전자와 속박된 전자는 서로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1896년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한 이래 퀴리 부부와 러더퍼드 등에 의해서 진행된 방사선에 관한 연구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원자 구성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1898년 이후 카우프만(Walter Kaufmann, 1871­1947)과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는 아주 정밀하게 톰슨이 측정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아주 정확히 측정하여 톰슨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카우프만은 1901년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속도 증가에 따라 전자의 겉보기 질량이 증가하는 속도를 목격했는데, 이런 관측 결과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전자기적 세계관이 부상하고 결과적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는 촉발 역할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실험 결과가 나오면서 1899년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전자 개념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자신이 과학자로 활동하는 동안 '전자'(electron)라는 단어를 쓰기를 꺼려했다. 사실상 '전자' 발견 공로로 노벨상을 받을 때에도 그는 전자라는 말 대신에 '미립자'(corpuscle)라는 말을 사용했다. 톰슨은 소위 전자론에 대해 저항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이 발견한 미립자의 전기적 특성도 물질 입자와 에테르와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톰슨을 전자의 발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전자를 발견한 후보자들로는 톰슨 이외에도 실험적인 차원에서는 제만과 비헤르트를 들 수 있고, 이론적 차원에서는 전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로렌츠와 라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유일한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1897년 그가 제창한 미립자 이론이 원자 구조의 해명과 전자 개념의 출현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당시에 실험 과학의 중심지였던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이었다는 것도 톰슨이 전자 발견자로 기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캐번디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톰슨의 학파가 과학계 여러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톰슨의 제자들이 톰슨이 발견한 전자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성공적으로 계승, 전파했다는 것도 전자 발견자로서 톰슨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실제로 톰슨은 당시 어떤 다른 과학자들보다도 전자의 발견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홍보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톰슨이 전자가 실재함을 실험적으로 잘 보였기 때문에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핵킹(Ian Hacking)은 과학적 실재론을 논의함에 있어서 실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핵킹의 주장에 입각해서 보면 톰슨이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그가 전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적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전자를 분리해내고, 측정하고, 조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전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1900년 이후 전자의 속성은 계속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서서히 발견되어 나갔다.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는 이온화 작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전자의 움직임을 탐구해나갔으며, 1903년 해럴드 윌슨(Harold A. Wilson)---구름상자를 창안한 윌슨과는 다른 사람임---은 톰슨의 구름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윌슨은 급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구름상자 속에서 형성되는 구름이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는 비와 전기장에 의해 떨어지는 비를 측정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마침내 1913년 밀리컨(Robert A. Millikan, 1868­1953)은 자신의 유명한 유적 실험을 통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아주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분명한 의미에서 단일 전자의 실재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REFERENCES


[1] J. J. Thomson, "Cathode Ray," Philos- ophical Magazine 44 (1897), pp. 293-316.
[2] Isobel Falconer, "Corpuscles, Electrons and Cathode Rays: J. J. Thomson and the 'Discovery of the Electron',"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20 (1987), pp. 241-276.
[3] Per F. Dahl, Flash of the Cathode Rays: A History of J. J. Thomson's Electron (Institute of Physics Publishing, Bristol, 1997). 

다음 호 제목 뢴트겐과 X-선 발견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