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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1905년 스위스 베른의 젊은 특허국 직원이었던 26세의 무명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새로운 관점, 즉 상대성이론을 제창해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모습을 출현시켰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19세기를 통해서 부상되었던 고전 역학과 고전 전자기학 사이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기에 성장한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할 때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적용하고 있으나, 19세기에는 맥스웰 방정식은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전 전자기 법칙들은 고전 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던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의 전자기 법칙들은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서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전자기학과 상대성 이론의 맹아


하지만 19세기를 통해서 이것을 문제로 느끼고 새로운 해결점을 제시하려고 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19세기에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우주에 꽉 차 있으며 압축이 되지 않는 완전 탄성체인 가상의 물질 에테르를 가정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에테르는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19세기 과학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상의 물질이었다. 왜냐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와 같이 매질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중에서는 파동인 빛이 전파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스웰 이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이 에테르의 성질에 대해서 저마다의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고, 이에 따라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수많은 전자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1851년 프랑스의 과학자 피조(Armand Hippolyte Fizeau)는 움직이는 유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고전 역학적인 속도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관찰한 바가 있었다. 이것 역시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예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1887년 미국의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과 몰리(Edward Morley)는 자신들이 고안했던 간섭계를 이용해서 지구의 운동과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지구 운동이 에테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어떤 증거도 얻지 못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고전 전자기학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는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 지구의 운동 방향으로 물체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수축한다는 하나의 미봉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중반 이후 과학자들은 강체역학이나 유체역학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유비의 일종으로서 고전역학적인 기계적 모형을 사용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고전 전자기 법칙을 정립시킨 맥스웰은 전자기장을 유체의 흐름을 나타내는 편미분 방정식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전자기 현상을 고전역학적 모형에 의해 설명하려던 견해는 맥스웰 이후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톰슨(J.J. Thomson)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97년 톰슨이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 사이의 비례 관계를 밝힌 실험을 계기로 전자기 현상을 역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믿음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즉 카우프만(Walter Kaufmann)과 레나르트(Philipp Lenard) 등과 같은 실험 물리학자들은 톰슨의 실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전자의 외견상의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후 고전역학적 개념이었던 질량이 전자기적인 현상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을 뉴턴의 역학이 아니라 전자기 현상으로 통일하려는 전자기적 세계관이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0년 프랑스의 푸앵카레(Henri Poincar)가 전자기 방정식이 뉴턴의 운동 법칙인 작용-반작용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1901년에는 빌헬름 빈이 역학을 전자기적인 토대 위에서 재 규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서 전자기적 세계관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푸앵카레는 포인팅 벡터에 의해서 표현되는 '전자기적 운동량'과 '전자기적 질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는데, 괴팅겐의 사강사였던 막스 아브라함(Max Abraham)은 이런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전자가 강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고전전자기학의 체계 내에서 속도의 증가에 따르는 전자의 질량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유도한 식은 후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유도한 식과는 2차항의 10분의 1정도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1906년에 행한 카우프만의 실험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결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계산 결과가 실험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한편 수학을 자연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등을 비롯한 괴팅겐의 수학자들도 로렌츠가 발전시켰던 새로운 전자론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학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수학을 많이 사용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의 수학화는 더이상 물리학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며,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렌츠가 1903년 12월에 탈고한 원고로서, 클라인이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수리과학 백과사전에 출판하기 위해서 집필했던 로렌츠의 전자론에 관한 글을 근간으로 해서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이 행한 연구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분법을 비롯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서 전자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수학자들이 주도한 괴팅겐의 이 세미나에는 수학자들뿐만이 괴팅겐의 천문대장이었던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와 지구물리학 교수였던 에밀 비헤르트(Emil Wiechert), 그리고 클라인의 제자로서 아헨 공대에서 재직하고 있던 아르놀트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도 참가했었다. 이 과정에서 좀머펠트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바로 직전인 1905년 초에 빛보다 빠른 전자의 운동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으며, 민코프스키도 괴팅겐 학자들과의 협동연구 속에서 후일 나타날 4차원 시공 세계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발전시키게 된다. 민코프스키의 수학적인 4차원 시공 세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타난 배경과는 상당히 달랐던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속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성장 과정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이미 아버지가 보여준 나침반에 매료되었으며, 이때의 경험이 후일 자신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12살 때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 기하학에 관한 책을 접했었는데, 이때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확성에 아주 깊고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2세에서 16세까지 그는 독학으로 미적분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권위주의적인 독일 김나지움 교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그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뮌헨을 떠나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이탈리아로 갔다. 그러나 가족의 전기회사 사업이 실패하고, 또한 가족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독일 김나지움의 졸업장이 없었던 그로서는 독일의 대학이나 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에 진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쳤다. 이 시험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은 아주 잘 보았으나 현대어, 동물학, 식물학 등 다른 과목에서는 떨어졌다. 그 뒤 교수의 권유로 그는 스위스의 간톤학교를 1년간 다녔다.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김나지움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받았다. 아르가우 간톤학교는 19세기말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해서 고전어 교육보다는 수학과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면서 일어났던 개혁 김나지움 운동의 영향을 받은 학교였다. 아인슈타인은 아라우의 이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뮌헨의 김나지움과는 전혀 딴판인 상당히 민주적인 느낌을 받았고,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인슈타인 자신은 매우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라우에서의 교육은 아인슈타인의 사고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스위스 칸톤 학교 시절인 16세 때부터 이미 물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고 한다. 이것이 상대성이론과 관련된 그의 최초의 사고 실험이었으며, 그 뒤 10여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한 끝에 마침내 1905년 자신의 상대성이론을 얻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상대성이론은 스위스 아라우에서의 자유로운 교육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기원


아인슈타인의 집안은 발전기나 모터를 만드는 전기공학자의 집안이었고, 아인슈타인 자신도 과학자라기보다는 전기공학자가 되려고 취리히의 연방 공과대학에 들어간 것이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위대한 과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활동의 이면에서 그의 생애 동안에 냉장고에 관한 것을 비롯해서 몇몇 발명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연방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와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수학을 배웠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직접적인 실험에 더욱 매료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물리 실험실에서 보냈으며, 남는 시간은 집에서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헤르츠 등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특히 그는 1894년 아우그스트 푀플(August Fppl)이 집필한 『맥스웰의 전기론 개론』(Einfhrung in die Maxwellsche Theorie der Elektrizitt)을 통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대해서 배웠다. 이외에도 그는 마흐(Ernst Mach)의 역학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로렌츠와 볼츠만의 논문들도 공부했다.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에게 수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수학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코프스키의 평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민코프스키의 수학 수업시간에 아주 게으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상당히 낮게 평가했으며,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1887년 볼데마르 포크트(Woldemar Voigt)는 비압축 탄성 매질 속에서의 도플러 효과에 관한 논문에서 후일 로렌츠 변환식으로 일컬어지는 변환식을 이미 언급했었는데, 포크트에게 배운 바 있는 민코프스키가 이 사실을 1908년의 4차원 시공 세계에 관한 역사적인 강연에서 언급하면서 상대성이론 출현 이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부터 임시방편의 수축가설을 도입했던 네덜란드의 로렌츠는 1904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소위 로렌츠 변환식을 유도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로렌츠의 이 작업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확실한 점이 많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는 로렌츠의 이 논문이 인용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아인슈타인은 로렌츠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변환식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도 아인슈타인 자신의 진술이 여러 곳에서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던 문제였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1949년 출판된 그의 자서전의 그 어디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1905년 전후에 나타난 논문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서 쓰여진 편지 속에서도 그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1931년 미국 칼텍에서 열린 만찬에서 아인슈타인은 마이컬슨의 작업이 자신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으며, 1922년 12월 14일 일본 교토에서 행한 '나는 어떻게 상대성이론을 창안했는가' 라는 강연에서 그는 학창 시절에 이미 마이컬슨의 실험을 알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아인슈타인은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의 실험에 대해서 그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에테르와 지구와의 상대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이컬슨의 실험 자체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실험적 증거는 어떤 것이었을까? 1899년 아인슈타인이 그의 첫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피조의 실험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51년 피조는 움직이는 액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액체의 굴절률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양만큼 고전역학적인 속도의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1907년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에 의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새로운 속도합성 공식을 바탕으로 해서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설명되었는데,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것은 고전역학적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피조의 실험과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가 발견한 별의 광행차에 대한 관측만으로도 빛과 물체의 운동과 관련해서 현상을 고전물리학 체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운동학 체계를 모색했던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형성과 그 수용과정


전기공업 회사 집안에서 자랐으며, 전기공학자로서 특허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도체의 전자기 현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피조의 실험과 별의 광행차 관측에서 나타나듯이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는 전자기학에서는 뉴턴의 역학과 전자기 법칙이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은 자석과 움직이는 도전체 사이의 상대 운동으로 발생하는 전기 유도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성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느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 비대칭성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석이 움직이고 도체가 정지해 있으면 자석 주위에 특정한 에너지와 함께 전기장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석이 정지하고 도체가 움직이면 자석 주위에는 상응하는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는 채로 기전력만이 발생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비대칭성 문제는 지구와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없었던 실험과 마찬가지로 역학과 전자기학 내에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내재하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1905년 6월 30일에 제출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해서'(Zur Elektrodynamik bewegter Krper)라는 논문에서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고전 전자기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시공 개념을 제시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채택하면서 고전 전자기학이 가정하고 있던 가상적인 물질이었던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했다. 빛이 파동일 경우 꼭 필요했던 매질인 에테르를 부정한 아인슈타인은 이미 그해 3월 17일에 완성한 논문에서 진공 중에서도 빛이 전달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빛의 입자성을 나타내는 광양자 가설도 새로이 제안했었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빛에 관한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으로 일반화되었고, 그가 제안한 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현대 양자론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만드는 데에는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역할이 컸다. 플랑크는 당시 무명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인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대학에서 여러 유능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독일 과학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열열히 옹호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이 주제를 선택하도록 독려했는데, 1906년부터 1914년까지 플랑크 밑에서 나온 학위 논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은 상대론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1906년 발터 카우프만의 실험이 로렌츠-아인슈타인의 이론식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인 아브라함의 식에 더욱 가깝게 나왔을 때에도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옹호했다. 무엇보다도 플랑크에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에서의 보편성과 단순성을 뒤받침해준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론이었다.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런 공개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자신도 1906­7년 사이에 최소 작용의 원리에 바탕을 둔 상대론적 역학을 발전시키는 등 초창기의 상대성이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08년 괴팅겐의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는 상대성이론에 수학의 불변 이론과 함께 4차원 시공 좌표를 도입했다. 물론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4차원 좌표를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푸앵카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하지만 그는 4차원의 비유크리트 기하학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주의적인 지식관에 따라 기하학에 대한 규약주의적인 입장만을 견지했었다. 반면에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4차원 세계가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의미를 지니며, 아인슈타인 역시 4차원 시공 세계의 절대성을 받아들였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특히 비전문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아인슈타인이 세계를 상대화했다고 와전되기도 했다. 더구나 철학자들조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푸앵카레나 에른스트 마흐의 상대주의적 철학관과 같은 주장으로 이해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마치 지식의 상대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과학적 입장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논의라는 것은 상대론적인 강체의 존재에 관한 논쟁을 통해 확립되었다. 1909년 괴팅겐의 사강사 막스 보른은 소위 로렌츠 수축가설을 만족하는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제기했다. 보른은 이 개념을 이용해서 전자를 고전역학적인 강체로 보고 고전전자기학에 입각한 전자론을 전개했던 1902년의 아브라함의 이론을 상대론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했었다. 보른의 이런 시도에 대해서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는 보른의 상대론적 강체 정의는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모순에 봉착한다고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고 나섰다. 즉, 원통의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회전 방향으로 로렌츠 수축이 일어나지만, 강체 자체의 원둘레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과학자들은 에렌페스트 역설이라고 불렀다. 그 뒤 이 논쟁에는 헤어글로츠(Gustav Herglotz), 프리츠 뇌터(Fritz Noether), 발데마르 폰 이그나토프스키(Waldemar von Ignatowski), 막스 플랑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운동학 논의라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식되게 된다. 1911년 플랑크의 제자인 막스 폰 라우에가 상대론에 의하면 강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헤어글로츠가 유체역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에렌페스트 역설과 관련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1911년 막스 폰 라우에가 집필한 최초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교과서가 출판되는 것을 전후해서 특수 상대성이론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로 이해되면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참 고 문 헌


[1]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17 (1905), pp. 891-921.
[2] Arthur I.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Relativity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81).
[3] G. Holton, The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 1988)
[4] Lewis Pyenson, The young Einstein, The advent of relativity (Bristol, Adam Hilger, 1985).
[5]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Oxford, Clarendon Press, 1982). 

다음 호 제목 밀리컨과 유적 실험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