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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과 그의 괴팅겐 학파는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막스 보른은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론, 결정격자 이론, 광학, 충돌 현상에 관한 양자 이론, 양자역학의 수리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20년대에 그가 형성시킨 괴팅겐 학파는 괴팅겐 물리학의 황금 시대를 낳으면서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오토 슈테른(Otto Stern, 1888­1969),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 ­1976),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등은 그의 조교였으며, 막스 델브뤽(Max Delbrck, 1906­1981), 마리아 괴페르트-마이어(Maria Gppert- Mayer, 1906­1972)는 그가 지도하던 박사과정 학생들이었다. 노벨상 수상자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훈트(Friedrich Hund, 1896­),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 앨재서(Walther Elssser, 1904­1991),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빅토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 등 20세기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괴팅겐 수학 전통과 상대론


막스 보른은 1882년 12월 11일 지금은 폴란드 영토이나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브레스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보른(Gustav Born)은 해부학 교수였으며, 그의 어머니 마가레트 보른(Margarete Born)은 슈레지엔 지방의 산업 자본가의 딸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갖춘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00년부터 자신의 고향인 브레스라우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던 그는 그후 하이델베르크, 취리히 등을 옮겨다니며 공부하다가 마침내 1904년부터는 당시 세계 수학의 메카였던 괴팅겐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괴팅겐에는 펠릭스 클라인 (Felix Klein, 1849­1925),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 등 당대의 쟁쟁한 수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수학이외에도 수학을 물리학, 천문학, 지구과학 및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괴팅겐 수학자들은 이제 물리학은 너무 어려워져 물리학의 발전을 물리학자들에게만 맡길 수가 없으며, 수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물리학을 배워 이 분야의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3년부터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 1873­1916), 그스타프 헤어글로츠(Gustav Herglotz, 1881 ­1953), 에밀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좀머펠트(Arnold Sommer- feld, 1868­1951) 등과 함께 로렌츠와 푸앵카레에 의해 발전된 전자론을 공부해서 새로운 전자론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역학과 전자기학을 통일하는 새로운 전자론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찾고 있었는데, 민크프스키가 4차원 시공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힐베르트가 아인슈타인보다 조금 먼저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을 이용해서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등장하는 장 방정식을 얻어낸 것도 이런 연구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른은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하였으나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는 그 연구 분야를 바꾸어 본격적으로 이론 물리학을 연구했다. 막스 보른 역시 전자론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싶었지만, 클라인의 요구 때문에 탄성체의 안정성 문제를 변분법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박사 논문을 완성해야만 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뒤인 1907년 4월 보른은 물리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가서 J. J. 톰슨, 조지프 라모(Joseph Larmor, 1857­1942) 등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실험에 대한 무지와 기술적 지식의 부족 때문에 그의 케임브리지의 교육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7년 8월 대륙으로 건너온 보른은 마침내 수학을 포기하고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정한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 고향인 브레스라우의 오토 룸머(Otto Lummer, 1860­1925)와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의 실험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흑체 복사에 관한 실험을 했지만, 이것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험 물리학 분야에서 실패를 한 뒤 그는 상대론적 전자론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다시 괴팅겐의 민코프스키와 연결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괴팅겐으로 돌아온 보른은 민코프스키와 활발한 협동 작업을 통해 이제 막 제안된 민크프스키의 4차원 시공 세계를 보다 확장하는 연구를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괴팅겐으로 돌아오자 얼마 안되어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민코프스키와 보른 사이의 기대되었던 협동 작업은 무산되고 말았다.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 보른은 괴팅겐에서 상대론적 강체 이론에 바탕을 둔 전자론에 관한 자신의 교수자격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논의였다. 이 때부터 보른은 될 수 있으면 경험적, 실험적 자료가 많은 물리학적 문제를 선택하여 수학적으로 아주 엄밀하고 일반적인 해를 구한다고 하는 수학적이고도 형식주의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물리개념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는 반면, 만약 문제 자체가 정확하게 설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계획의 진전이 대단히 크다고 하는 장점도 있었다. 

1909년 보른은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전자론을 제안했다. 보른의 이 논문에 대해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는 보른의 이 정의는 물체가 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을 할 경우에는 곧바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상대론에 의하면 강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골자로 하는 이 지적은 곧바로 학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1911년 뮌헨에 있던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가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모든 강체는 무한히 많은 자유도를 갖기 때문에 강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 논쟁은 막스 보른의 패배로 종식되었다. 이 당시 라우에가 집필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과서적으로 활용되었고 이 때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분명한 형태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고체 비열 및 결정 격자 이론


상대성 이론 분야에서 학문적 패배를 맛 본 보른은 1912년부터 자신의 연구 영역을 상대론 분야에서 고체 비열 분야로 바꾸었다. 보른이 이렇게 연구 분야를 바꾼 이유는 상대론 분야가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 어렵고 통상적인 물리학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특히 관찰 자료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른은 이후에도 수많은 관찰 자료가 존재하는 분야를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다루는 학문적 스타일을 유지하게 되는데, 고체 비열 및 광학 분야는 보른의 이런 성격에 가장 부합되는 분야였다. 

1907년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복사 법칙을 고체 비열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이론에서는 온도가 절대온도 0도에 가까워지면 고체의 비열이 0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물리화학자였던 네른스트(Walther Nernst, 1864­1941)는 절대 온도 0도 근처의 저온에서 고체의 비열을 실험적으로 측정한 뒤 이 경험값을 만족하는 고체 비열식을 얻어냈다. 고체 비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 보른, 카르만(Theodore von Krmn, 1881­1963) 등에 의해서 얻어졌다. 1912년 괴팅겐 대학에서 함께 사강사로 있던 보른과 카르만은 결정격자 가정을 바탕으로 해서 고체 비열을 유도하는 완전한 식을 유도하려고 시도했다. 1912년 3월 20일 보른과 카르만이 자신들이 완성한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기 약 열흘 전에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는 베른에서 열린 스위스 물리학회에서 내용상 이와 유사한 발표를 했다. 이 강연에서 드베이어는 낮은 온도에서 에너지가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간단한 형태로 보여주었다. 보른과 카르만이 고체를 결정격자로 본 반면에 드베이어는 분자 격자의 스펙트럼 내에 있는 고유 진동수의 상대적 밀도를 연속적인 탄성 매질의 탄성 진동수의 분포와 같다고 보고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드베이어의 방법이 훨씬 간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른과 카르만의 방법이 더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드베이어는 발견의 우선권을 인정받았고, 이에 따라 현재 고체 물리 교과서에는 드베이어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드베이어에게 고체 비열에 관한 발견의 우선권을 놓쳤지만 보른은 공간 격자의 진동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로 자신의 이론을 확장시켜나갔다. 이리하여 1915년 보른은 p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결정의 탄성 스펙트럼이 3개의 음향 진동과 3(p-1)개의 광학 진동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유도했다. 보른은 고체 비열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완료한 뒤 결정의 모든 성질을 격자 구조와 전자기력에 의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커다란 연구 계획을 수립하여 자신이 양자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1922년까지 이 분야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보른은 결정 격자에 관한 연구뿐만이 아니라 액정의 광학적 성질을 비롯한 고체, 액체, 기체의 광학적 성질에 관한 논의를 아주 꼼꼼하고 일반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전개했다. 이 시기에 보른이 다루었던 주제는 훗날 『광학』이라는 책에서 논의되어 현재까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해 애용되는 고전적 저작이 되었다. 

 

막스 보른과 고전 양자론


1918년 초부터 막스 보른은 보어와 좀머펠트의 고전 양자론과 연관된 연구를 진행했다. 우선 그는 수소, 산소, 질소와 같은 분자에서 발생하는 레일리 산란을 논의하면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이용했다. 1918년 말 보른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이용해서 염화나트륨의 압축률을 계산하다가 고리 모형의 보어-좀머펠트가 지니는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후 보른은 전자들이 평면상에만 자리잡고 있던 기존의 고리 모습의 원자 모형을 폐기하고 3차원 공간에 퍼져 있는 공간적인 모형을 제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보른은 고체 결정 상태에 대한 자신의 책에 주력하는 한편 고전 양자론도 서서히 다루기 시작했다. 이미 1921년 보른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천체 역학에서 사용하는 건드림이론(Strungstheorie)을 이용해서 비조화진동을 가진 역학 체계에 대한 고전 양자론을 전개했다. 

1921년 막스 보른은 자신의 친구이며 실험물리학자였던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와 함께 괴팅겐 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20년대 괴팅겐 물리학의 황금 시대는 바로 이 두 물리학자들에 의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보른은 될 수 있으면 많은 경험적 자료가 있는 분야를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수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학문적 스타일을 지닌 학자였다. 프랑크는 당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양자론과 연관된 수많은 실험자료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막스 보른이 일반적인 양자역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외에도 힐베르트 역시 양자론에 관한 강의를 통해 양자역학의 수리적 공리화를 비롯해서 양자역학을 체계화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22년 6월 12일에서 22일까지 보어는 괴팅겐에서 양자론과 관련된 최근의 성과에 대해서 의미 있는 강연을 하였다. 훗날 보어 축제(Bohrfest)라고 이름이 붙어진 이 강연에는 보른, 프랑크, 훈트, 요르단,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렌츠, 란데, 게를라흐, 좀머펠트 등 훗날 양자역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많은 과학자들이 참가했다. 보어 축제 이후 보른은 고체 결정 격자 이론보다는 양자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괴팅겐에서 보른은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노르트하임(Lothar Nordheim) 등 우수한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푸앵카레와 보린(Petrus Theodor Bohlin, 1860­1939) 등에 의해서 개발된 천체 역학적 이론을 이용해서 보어의 원자론을 다전자 체계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파울리와는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 generacy)을, 하이젠베르크와는 전자들의 질량이 서로 같아 위상 관계가 생기는 '우연한 겹침'(accidental degeneracy)을, 노르트하임과는 수소 분자 등에서 장미꽃 형태의 괘도로 나타나는 '경계 겹침'(limiting degeneracy)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다전자 체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겹침 현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했던 이들의 연구 결과 헬륨이나 수소 분자의 에너지 값이 보어 원자론에 의해서 예측된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고전양자론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밝히게 되었다. 그 뒤 보른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고전양자론이 아닌 새로운 역학체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새로운 양자역학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의 전개 과정


1924년부터 보른은 기존의 고전양자론을 포기하고 일반적 모습을 갖춘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보른은 양자 현상에서는 정상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가 진동 주파수에 비례하는 것에 주목했다. 보른은 이 관계가 차분 방정식에서 쓰는 방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전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몇몇 미분 방정식들을 차분 방정식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새로운 양자역학의 체계를 찾아나갔다. 즉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나오기 이전에 보른은 차분 역학(difference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양자역학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른은 이 차분 역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비주기적 과정(non-periodic process), 즉 충돌현상에 관한 양자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보른이 추진하던 이 차분 역학은 발전 속도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양자역학의 돌파구를 마련해준 사람이 바로 괴팅겐 대학에서 보른의 사강사로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7월 파울리와 보어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역학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이 역사적인 논문에서 그가 사용한 상징적인 곱셈이 수학적으로는 행렬의 곱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 바로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막스 보른이었다. 즉,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살펴본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상징적 곱셈이 바로 자신이 대학시절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일종의 행렬곱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상징적 곱셈이 행렬 곱셈이라는 예감을 느낀 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양자역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공동연구자를 찾았다. 보른이 처음으로 접촉했던 사람은 보른의 조교였으며, 당시에 배타원리를 찾아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파울리였다. 하지만 파울리는 보른이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 생각을 수학으로 망쳐버린다고 하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자신의 밑에서 박사학위를 한 요르단에게 이 행렬역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이리하여 보른과 요르단은 하이젠베르크의 생각을 행렬역학으로 발전시키는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게 된다. 보른은 자연법칙은 수학적으로 불변량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에 대해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상징적 곱셈이 행렬 교환식으로 구성된 2차 형식(quadratic form)의 불변량(invariance)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발견한 뒤 매우 기뻐했다. 더 나아가 1926년 초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은 서로 힘을 합쳐서 소위 '3인 논문'(Drei-Mnner-Arbeit)을 출판했는데, 이 논문의 출현과 함께 1926년 초 뒤늦게 행렬역학의 가치를 인정한 파울리가 수소의 발머계열식을 행렬역학적인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냄으로써 행렬역학은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3인논문'에서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더욱 깊게 고찰하여, 힐베르트 공간(Hilbert Space), 선형변환에 있어서의 주축변환, 에르미트 행렬 등과 같은 수학적 개념을 행렬역학에 도입했다. 또한 자신이 양자론 분야에서 발전시킨 근사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양자역학에 대한 체계적인 근사 이론을 발전시켰다. 보른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표현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괴팅겐에서 힐베르트와 클라인 등으로부터 선형 대수와 관련된 수학을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보른은 1925년 겨울 미국에서 강연을 하는 동안 미국의 위너(Nobert Wiener, 1894­1964)와 함께 연산자 역학(Operator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수학적 방법론도 발전시켰다. 이렇듯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에는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보른의 역할이 컸다.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


행렬역학이 완성되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완성시켰다. 새로운 파동역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함수의 제곱이 실제 전자의 밀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이런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양자론의 논의 과정에서는 '우연'이 어쩔 수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감지되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던 적이 있었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빛이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구면파 형태로 방출되지 않고 마치 바늘과 같이 어느 특정한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즉 아인슈타인은 현재 상태의 양자론으로는 빛이 어느 방향으로 방출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우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볼 수 밖에 없고, 바로 이 '우연'에 의해서 복사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이 자신의 이론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26년 양자 충돌 이론을 연구하던 막스 보른은 바로 아인슈타인이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논문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양자역학에 관한 통계적 해석을 전개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물리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 내에서 존재하는 극복되어야 할 약점으로 본 것을 보른은 실험적 사실에 바탕한 이론적 실재로 보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른의 이 통계적 해석은 충돌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또한 에너지에 국한된 지극히 수학적인 것이었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에까지 확대되는 해석은 아니었다. 즉 오늘날 물리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논의인, 전자의 위치 내지 운동량을 발견할 확률이라는 개념은 실상은 파울리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다. 보른의 통계적 해석이 나오자 이것을 상당히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했던 파울리는 1926년 10월 19일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서 보른보다도 분명한 형태로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구체화시켰다. 더욱이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내용에 불확정성 원리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뒤 얼마 안되어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보른의 제자였던 요르단은 양자역학의 통계적 성격을 브라운 운동에 의해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측정 오차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은 이보다 더욱 근본적이라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곧이어 등장하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해석인 코펜하게 해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리하여 보른에 의해 시작된 비결정론적 세계관은 양자역학의 핵심적 해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1] Max Born, Physikalische Zeitschrift 14, 15-19 (1913).
[2] Max Born and P. Jordan, Zeitschrift fr Physik 34, 858-888 (1925).
[3] Max Born, W. Heisenberg and P. Jordan, Zeitschrift fr Physik 35, 557- 615 (1926).
[4] Max Born, Zeitschrift fr Physik 37, 863-867 (1926).
[5] Max Born, Zeitschrift fr Physik 38, 803-827 (1926).
[6] Max Born, Mein Leben: Die Erinner- ungen des Nobelpreistrger (Mnchen: Nymphenburger Verlagshandlung, 1975).
[7] Gyeong Soon Im, Archive for History of Exact Sciences 50, 73-101 (1996). 

다음 호 제목 막스 플랑크와 흑체복사이론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