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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파울리와 배타원리

파울리와 배타원리 

원자 내에 있는 각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는 1925년 비정상 제만 효과와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그 뒤 아주 근본적인 원리로 발전해서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배타원리는 금속의 전자론과 같은 고체물리학부터 초대칭 이론과 같은 고에너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이 배타원리는 '물리학의 양심'(Das Gewissen der Physik)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파울리라는 물리학자와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다. 
 

파울리와 상대성 이론


1900년 4월 25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어릴 때부터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12세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했으며, 14세에 오일러의 저작을 읽었고, 18세에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에 탐닉하기까지 했다. 1918년 10월 파울리가 뮌헨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당시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해한 학문 분야로 알려져 있었던 일반상대론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파울리는 대학 초년생으로서 상급학생들이나 신청하는 좀머펠트의 고급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은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헤르만 바일이 수학적으로 제안한 이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는데, 파울리 역시 바일이 연속체 가설을 바탕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 전자 내부의 구조를 가정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일의 통일장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파울리의 대학 스승인 좀머펠트는 당시 수리과학 백과사전의 물리학 분야 편집인이었는데, 그때 그는 상대론 분야의 집필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물론 상대론의 주창자인 아인슈타인이 가장 적격자였으나, 아인슈타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인물을 구해야만 했었다. 자신의 세미나에서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이론을 통렬히 비판하는 파울리를 본 좀머펠트는 선뜻 이 중요한 집필을 21세의 어린 파울리에게 맡겼다. 아인슈타인이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말하기를, "이 완숙되고 훌륭하게 집필된 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자가 21세의 한 청년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개념 발전에 관한 심리학적 이해, 수학적 추론의 정확성, 깊은 물리학적 통찰력, 개괄적이고도 체계적인 서술능력, 참고문헌에 대한 인식, 주제 처리에 있어서의 완전성, 비판의 정확성 등등, 무엇을 먼저 치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놀랍다."라고 평했다. 

 

파울리와 고전양자론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파울리는 그 뒤 상대론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경험적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당시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양자론 분야로 곧 관심 분야를 옮겼다. 파울리는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만으로도 이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교육법에서는 대학에 들어온 뒤 최소한 6학기 이상을 등록해야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21년 여름에 와서야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수소 분자 이온에 대한 양자론적 설명에 관한 것이었다. 수소 분자 이온은 삼체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법을 얻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파울리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수소 분자 이온이 갖는 다양한 전자 궤도의 안정성 문제를 다루었다. 

박사 학위를 한 뒤 1921/22년 겨울 학기에 파울리는 수학의 메카인 괴팅겐으로 가서 막스 보른의 조교가 되었다. 당시 보른은 천체 역학에서 사용하는 건드림이론(Strungstheorie)을 이용해서 헬륨 문제와 같이 삼체 문제를 포함한 역학 체계에 대한 다전자 체계의 고전 양자론을 일반적으로 전개하려는 야심찬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파울리는 보른을 도와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generacy)을 다루는 다체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보른이 물리적 내용보다는 지나치게 수학적 형식주의에 매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울리와 보른 사이의 협력 작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 뒤 파울리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울리와 같은 좀머펠트의 문하생이었던 빌헬름 렌츠(Wilhelm Lenz)의 조교가 되었다. 1922년 6월 파울리는 괴팅겐에서 닐스 보어를 처음으로 만나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해 가을 그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1년간 머물면서 닐스 보어와 진지한 학문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파울리는 닐스 보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이나 대응원리와 같은 몇몇 부분에서는 닐스 보어에게도 강한 비판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파울리는 당시의 고전양자론을 구성하고 있던 많은 개념들이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커다란 불만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로서는 풀리지 않던 양자현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개념적 도구였던 보어의 대응원리도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리 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운 양자론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이라는 것에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다. 많은 과학자들은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이 대응원리를 이용해서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 데 많이 이용하곤 했었다. 이런 대응원리조차도 파울리는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론의 형성에 있어서 철저한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다. 

파울리는 자신이 생각할 때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유고를 보면 그가 논문으로 출판을 해도 손색이 없었을 수많은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에 '물리학의 양심'이라고 불렀던 파울리에게 논문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파울리의 친구들은 그가 논문을 출판해도 좋다고 하면 자신의 논문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수많은 논문들이 출판도 되기 전에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을 했을 경우에도 살아남는 논문은 있었지만, 그것은 스핀 이론과 양-밀스 이론과 같이 아주 독창적인 몇몇 논문에서만 예외적으로 나타났다. 

 

이상제만 효과와 란데의 모형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다루는 분광학 분야에서도 기존의 고전역학적 모형에서 벗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1896년 제만(Pieter Zeeman)이 자기장 내에서의 스펙트럼선의 분리현상을 발견한 이래 분광학적 기술이 계속 향상되어, 1920년경에는 수많은 관측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가장 설명하기 힘들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기장에서 궤도각운동량과 오늘날 우리가 스핀각운동량이라고 부르는 양과의 커플링에 의해서 스펙트럼선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제만효과였다.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연구하던 란데(Alfred Land)는 당시의 실험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기 위해 일종의 벡터 모형을 제안했다. 그러나 란데의 이 모형에서는 고전역학적인 각운동량의 두 곱이 양자론적으로는 다른 식으로 나타나서 모형을 취급하는 방식 자체가 기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일탈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자의 스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고, 과학자들은 이 스핀에 해당하는 양을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원자 중핵의 각운동량으로 표현했다. 이에 따라 원자의 각운동량은 중핵 각운동량 R, 궤도 각운동량 K, 전체 각운동량 J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R, K, J는 현재의 S+1/2, L+1/2, J+1/2에 해당한다. K=1/2, 3/2, 5/2, 7/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s, p, d, f ...를 나타낸다. 또한 R=1/2, 2/2, 3/2, 4/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홑겹 상태, 겹 상태, 3중 상태, 4중 상태 등을 나타낸다. 이때 1/2 정수가 양자수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정상파 모형에 기초를 둔 보어-좀머펠트 고전 양자론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 또한 란데의 g-인자 계산에서도 문제점이 나타났다. 약한 외부 자기장의 경우 3 R2-K2 에는 란데의 g -인자는

 

로 표시되어, 분모의 1/4이라는 수가 기 존의 벡터 모형에서 벗어났다. 반대로 강한 자기장의 경우에는 

 로 중핵 각운동량의 자기에너지 하에 궤도 각운동량의 2배가 되는 인수가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 여기서 m=mK+mR, mk=Kcos(KH), mR=Rcos(RH)이다.) 궤도 각운동량과 스핀 각운동량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이 현상은 1926년 토머스(L. H. Thomas)가 전자의 회전에 따른 상대론적 효과를 보정하면서 부분적으로 해결되었고, 1928년 디랙이 완성한 상대론적 전자론에 의해 완전히 설명되었는 데 당시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외에도 원자에 전자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늘려나가면서 원자계의 상태를 계산하면 보어의 원자 구성원리의 기본이 되었던 에렌페스트의 단열 원리가 붕괴되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수를 바탕으로 분광학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1/2 정수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엄청나게 헤매고 있었다. 1924년 2월 21일 파울리는 보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독일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현재 두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 한 부류는 먼저 1/2 정수를 양자수로 사용해서 어떤 문제를 풀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정수 양자수로 계산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는 먼저 정수로 계산하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1/2 정수로 계산합니다. 이 두 부류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에서 어떠한 선험적 논증도 얻어질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론 물리학은 내 취향과는 결코 맞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은 고체의 열전도에 관한 일로나 돌아가렵니다." 10개월 뒤 비정상 제만 효과로 다시 돌아온 파울리는 마침내 자신의 생애 최대의 업적인 배타원리를 창안하게 된다. 

 

배타원리의 출현


당시 이상제만 효과에 관련되어 나타났던 수많은 문제점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스핀 이론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1925년 파울리는 배타원리를 창안하여 고전양자론 내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즉 고전역학적 개념을 철저히 거부한 파울리는 비정상제만효과를 란데의 벡터 모형으로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전역학적인 모형을 이용한 설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주양자수, 방위양자수, 자기양자수 외에 제4의 양자수를 가정함으로써 소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제창하게 된다. 각 전자는 원자 내에서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이 배타원리를 바탕으로 파울리는 고전역학적인 개념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보어의 고전양자론의 문제점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양자상태 개념에 입각해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파울리가 1925년 초의 배타원리에 관한 논문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핀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제4 양자수를 기계적이며 고전역학적인 모형으로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한 예로, 1925년초 크로니히(R. Del Kronig)의라는 한 젊은 물리학자가 파울리가 제안한 제4의 양자수를 전자의 스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내용을 파울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파울리는 크로니히의 견해가 기계적이고 고전역학적인 해석이며, 따라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런 바람에 크로니히 자신은 그만 스핀가설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크로니히는 중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핀 발견의 영광은 에렌페스트 밑에서 공부하던 윌렌벡(George Eugene Uhlenbeck)과 하우트스미트(Samuel Abraham Goudsmit)에게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흔히 파울리의 스핀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것은 토머스가 스핀 각운동량의 상대론적 효과를 가정해서 분광학적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뒤인 1927년 5월 자기 전자에 대한 양자역학을 다룬 파울리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편 1926년 엔리코 페르미는 이상 기체 상태 방정식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통계 법칙을 유도했다. 이어 1927년 디랙은 분자 집단에 대한 문제를 풀 때 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상태함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반면에 반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새로운 통계역학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따르는 입자들은 페르미-디랙의 통계라는 새로운 통계역학적 방식에 의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파울리의 행렬역학


파울리는 물리 법칙은 항상 원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찰 가능한 양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미 그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비판할 때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파울리의 이런 철학적 관점은 그의 친구였던 하이젠베르크가 행렬 역학을 창안할 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5년 행렬역학과 관련된 하이젠베르크의 최초 논문에는 원리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의 관계들로만 새로운 양자역학을 정립하겠다는 주장이 담겨있는데, 바로 이것은 그의 친구 파울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역학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데 파울리는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파울리 자신은 하이젠베르크가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보른에 의해 행렬 역학이라고 하는 수학적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 등이 행렬역학을 완성하고 있던 상당기간 동안 이 과정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행렬역학의 유효성이 점차로 여러 곳에서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파울리도 행렬역학의 실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어 역시 행렬역학의 발전에 대해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만약 행렬 역학이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면 이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교과서에서는 수소 문제를 뒤이어 나타나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이용해서 풀고 있으며, 이 문제를 행렬역학에 의해 푸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행렬역학의 창시자들 역시 행렬역학을 이용해 수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뒤늦게 행렬 역학의 발전 대열에 합류한 파울리 수소 문제를 행렬역학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행렬역학이 원자의 분광학적 현상과 부합되는 올바른 이론이라는 것을 닐스 보어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파울리와 뉴트리노


1914년 채드윅이 베타 붕괴할 때 전자가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로 과학자들은 전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엘리스(C. D. Ellis)는 베타 붕괴를 할 때 이런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 이유는 핵내부에서 전자의 에너지가 감마선으로 변환되면서 다양한 에너지 분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이트너(L. Meiter)는 핵내부에서 전자는 띄엄띄엄 에너지를 갖지만 핵외곽에서 다른 전자에 에너지를 방출해서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타 붕괴에 의해 나오는 전자의 에너지 스펙트럼이 내부에서 진행되는 1차적인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나타나는 2차적인 것이지를 확인하려면 베타 붕괴 때 나오는 전자를 흡수하여 생기는 절대 열 에너지를 측정하면 되었다. 만약 1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열량계에서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이 될 것이며, 2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상한가가 될 것이다. 1927년 엘리스(C. D. Ellis)와 우스터(W. A. Wooster)는 라듐 E에서 생성되는 열 에너지를 측정한 결과 이것이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과 같음을 보였다. 이어 1930년 마이트너와 네른스트의 공동연구자였던 오르토만(W. Orthomann)은 좀더 개량된 실험 장치를 사용해서 엘리스와 우스터가 측정한 값을 더욱 정확히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마이트너는 이 논문에서 베타 붕괴를 할 때에 엘리스가 가정한 연속적인 감마 스펙트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였다. 

이에 따라 연속적인 베타 스펙트럼을 해석하는 두 가지 이론적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 하나는 베타 붕괴 때에 에너지 보존 법칙을 파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1차 단일 과정에서도 에너지 보존법칙의 유효함을 인정하고 대신 새로운 중성 입자가 방출된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자신이 1924년에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할 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에너지 보존법칙을 파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함으로써 에너지 보존법칙을 유지했다. 1930년 12월 파울리는 튀빙겐에서 열리는 물리학회에 바로 이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방사성 신사 숙녀 여러분'(Liebe Radioaktive Damen und Herren)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유지하기 위해 스핀이 1/2이고 빛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중성입자를 가정했다. 파울리는 이 입자를 '중성자'(Neutron)이라고 불렀는데, 이 입자의 질량은 전자의 크기 정도로 양성자 질량의 1 % 이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32년 채드윅은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한 새로운 중성 입자를 발견했다. 이리하여 파울리가 예언한 중성자는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입자와 구별하기 위해 1934년 페르미는 이탈리아 이름인 뉴트리노(Nutrino)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다. 파울리가 에언한 이 중성미자는 1956년 로스 앨러머스의 코원(Clyde L. Cowan)과 라이니스(Frederick Reines)에 의해 마침내 실험적으로 발견되었다. 1956년 6월 15일 파울리는 코원과 라이니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양성자 역 배타 붕괴를 관찰하여 분열된 조각으로부터 뉴트리노를 분명히 관측했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관찰된 단면적은 예측된 값인 6·10-44 cm과 잘 일치합니다." 이 편지는 파울리의 놀라운 통찰력에 대한 찬사와 함께 그에게 확실한 학문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파울리와 양자역학의 해석


파울리는 1931년 결혼에 실패한 뒤 심한 좌절에 빠졌다. 1931년 겨울 그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파울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찾아갔다. 이 만남은 훗날 둘 사이의 과학적 접촉으로 이어졌다. 파울리는 측정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양자역학적 과정을 관찰자의 주관적이고 심리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양자역학이 지니는 비결정론적 성격을 종교에서 연금술적 상징들이 표출되는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다. 즉 관찰자의 주관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치 소우주인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다라(mandala)에 들어가서 우주 생성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 대상에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영향을 미치는 전체성을 논함에 있어서 보어는 관찰을 원자계와 측정 도구와의 상호작용으로 보았다. 하지만 파울리는 측정도구를 관찰자의 감각기관이 확장된 것으로 보면서, 관찰을 원자계와 관찰자의 의식과의 상호작용으로 간주했다. 파울리는 물질과 정신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했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견해와는 달리 실재는 물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는 전체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물질(matter)과 정신(psyche)은 실제에 대한 상보적 표현이며,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파울리의 이런 생각은 연금술적 전통과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만년에 정신과 물질의 문제에 몰두한 파울리는 1958년 12월 1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REFERENCES


[1] W. Pauli, Zs. f. Phys. 31, 373-385 (1925).
[2] W. Pauli, Zs. f. Phys. 31, 765-783 (1925).
[3] P. Forman, HSPS 2, 153-261 (1970).
[4] Karl von Meyenn, Physikalische Bltter 36, 293-298 (1980); 37, 13-19 (1981).
[5] J. L. Heilbron, HSPS 13, 261-310 (1983).
[6] Daniel Serwer, HSPS 8, 189-256 (1977).
[7] Steffen Richter, Wolfgang Pauli (Frankfurt am Main: Sauerlander, 1979).
[8] K. V. Laurikainen, Beyond the Atom: The Philosophical Thought of Wolfgang Pauli (New York: Springer, 1988). 

다음 호 제목 하이젠베르크와 행렬역학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