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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하이젠베르크와 행렬 역학

하이젠베르크와 행렬 역학 

행렬역학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인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대표적인 역학 체계이다. 이 행렬역학이 출현한 이후 연산자 역학, 파동역학 등 양자 현상을 기술하는 새로운 역학이 등장하였고, 결국 이들 다양한 기술 방식들은 서로 경쟁하고 통합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과 같은 물리량의 곱이 행렬이라는 형식의 곱에 의해 기술된다. 행렬역학은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그는 1925년 행렬에 대한 수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행렬역학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상징적인 곱셈을 처음으로 제안해 혼란스럽던 20년대 원자 물리학계에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 체계를 확립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학창 시절


양자역학의 형성을 비롯해서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12월 5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본래 베스트팔렌 사람이었던 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는 바이에른에서 고전어를 가르치는 김나지움 선생을 하다가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해 뮌헨에서 뷔르츠부르크로 떠났고, 여기서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베르너를 얻었다. 1910년 1월 아우그스트는 독일에서 단 하나뿐인 뮌헨대학의 중세 및 근세 그리스 문헌학 정교수로 초빙되었고, 이에 따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뮌헨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11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가 나온 명문학교인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예비역 보병장교로 소집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916년 부상을 입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부모의 가르침이 중요했던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어른들의 보살핌이 거의 없이 대부분을 혼자서 공부하게 되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미적분학, 타원함수 등을 독학으로 배웠으며, 정수론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김나지움 시절에 그가 감명 깊게 읽었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물질관은 평생토록 물질 법칙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여파로 기성세계로부터 단절됐던 것은 후일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인 사상의 출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패전으로 끝난 뒤 독일의 젊은이들은 패전 후 낙심에 차있던 구세대들을 불신하고,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길을 찾아나갔다. 즉 구세대는 이미 부수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세계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신세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당시에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이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의 변환과 당시의 사회적 현상 사이에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인 상호작용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나지움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수학, 물리, 역사, 체육 등 거의 모든 과목에서 수(sehr gut)를 받았다. 또한 구두 시험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이 무척 탁월했기 때문에 김나지움에서는 그를 대학에 장학생으로 추천했다.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 뮌헨대학에 입학했다. 애초에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보다는 수학을 공부하려고 마음먹었었다. 당시 뮌헨대학에는 1882년 π가 무리수일 뿐만이 아니라 어떤 대수적 방정식의 근도 될 수 없는 초월수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대부터 내려온 원적 문제를 마침내 해결한 바 있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Ferdinand von Lindemann, 1852­1939)이라는 유명한 수학 교수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에 린데만을 찾아갔지만, 린데만은 하이젠베르크가 헤르만 바일의 작업과 같은 수리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를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하지만 물리학 교수이며 1년 전에 이미 파울리라는 물리학 신동을 발견한 바 있었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52­1939)는 하이젠베르크와의 대면을 통해 그가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라는 알아차렸고 그를 상급생들이나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자신의 고등세미나에 참가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이리하여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스럽게 물리학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여기서 자신의 평생의 학문적 친구인 볼프강 파울리도 만나게 되었다. 

뮌헨대학에서의 첫 학기 때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사고에 있어서 대담성과 독창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갓 입학한 하이젠베르크는 좀머펠트의 세미나에서 당시에 많은 분광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을 괴롭혔던 이상제만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1/2, -1/2의 양자수를 도입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이런 설명은 양자수를 원자의 정상상태에서 나타나는 정상파로 비유해서 이해했던 좀머펠트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즉 당시의 보어와 좀머펠트에 의해 발전했던 고전 양자론에서는 양자수가 1, 2, 3, 4, ...와 같은 정수만을 허용했지, +1/2, -1/2과 같은 분수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보다는 1년 선배였지만 서로 절친한 친구로 지냈던 파울리는 만약 1/2이 양자수가 된다면 1/4, 1/8, 1/16도 똑같이 양자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성공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응변하면서 자신의 방법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하이젠베르크가 1/2 양자수를 도입한 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스핀의 도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1/2의 양자수의 원인을 전자의 자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의 초기 '중핵 모형'이라고 부른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이 중핵 모형은 파울리의 배타원리의 발견에 따라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지만, 그가 주장한 1/2의 양자수는 파울리의 배타원리에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와 '방랑시절'(Wanderjahre)


1922년 6월 하이젠베르크는 때마침 괴팅겐 대학에 초청되어 양자역학에 대한 강연을 하던 닐스 보어를 처음으로 만났다. 후일 '보어 축제'(Bohr-Festspiele)라고 불리게 될 이 강연에는 보른, 프랑크, 좀머펠트, 파울리, 훈트, 요르단, 란데, 게를라흐 등 훗날 양자역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대부분의 학자들이 괴팅겐에 함께 모여 약 열흘간 서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하이젠베르크도 자신의 스승인 좀머펠트의 주선으로 이 모임에 참가해서 닐스 보어와 진지한 토론을 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 데 많은 자극을 받았다. 

1922년 9월 초 좀머펠트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 6개월 동안 객원교수로 가게 되었고, 자신의 수제자인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의 막스 보른에게 보냈다. 이리하여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 대학의 보른 밑에서 이론 물리학을 다루는 수학적 방법을 철저하게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보른과의 협동 작업을 통해 하이젠베르크는 헬륨 문제가 기존의 고전양자론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삼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과정을 통해 하이젠베르크는 현재의 양자 조건이 잘못됐던지 아니면 전자의 운동이 더 이상 고전역학적 방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변혁이 없이는 헬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1923년 유체역학과 관련된 아주 우수한 논문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뮌헨대학에서 박사 학위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 구두 시험장에서 뮌헨대학의 실험 물리학자였던 빌헬름 빈에게 잘못 걸려들어 전공인 물리학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얻고 가까스로 졸업하는 일생 일대의 수모를 당하게 된다. 즉 당시에 뮌헨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실험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도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 논문을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론 물리학자와 실험 물리학자들이 동석한 구두시험장을 통과해야만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빈은 하이젠베르크에게 패브리-패로 간섭계(Fabry-Ferot interferometer), 현미경 분해능 문제, 납축전지의 원리 등에 대해 질문을 했으나 실험실에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하이젠베르크는 빈이 한 이 질문들 가운데 어느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박사 시험에서 거의 탈락의 위기에 놓였으나, 좀머펠트가 그를 아주 대단한 천재라고 우겨대 간신히 턱걸이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 시험 성적은 전공인 물리학은 턱거리 점수인 3점이었고, 부전공인 수학은 1점, 천문학은 2점이었다. (독일의 학점은 미국과는 달리 1점이 좋은 점수이고 3점이 나쁜 점수이다.) 

박사 시험 성적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막스 보른은 그를 조교로 다시 받아 주었다. 보른의 지도 아래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비정상 제만효과에 관한 논문으로 단 1년만에 '교수 자격 취득 과정'(Habilitation)을 통과했다.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보른이 창안한 차분 역학의 방법을 이용해서 물리적인 해석이 없이 아주 형식적인 차원에서 란데의 g 인수에 대한 해석을 전개했다. 

1924/25년 겨울 하이젠베르크는 어려운 독일 경제 상황 중에도 록펠러 재단 장학생으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보어로부터 물리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훗날 하이젠베르크는 회고하기를, 자신은 뮌헨의 좀머펠트에게는 물리학 분야가 할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배웠고, 괴팅겐의 막스 보른에게서는 수학을, 그리고 코펜하겐의 보어에게서는 철학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세 사람에 대변되는 서로 다른 학문적 전통을 두루 섭렵한 결과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의 등장


1925년 4월초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보어로부터 원자 구조에 관한 많은 훈련을 받은 뒤 사강사의 의무인 강의를 하기 위해 독일로 되돌아왔다. 1925년 5월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원자론의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고전전자기적인 가상 진동자를 이용해 고전적인 운동방정식을 만든 다음에, 새로운 양자법칙을 얻어내기 위해 보어의 대응원리에 따라 기존역학 체계로부터의 의도적인 일탈을 모색했다. 한 예로서 그는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했고 이 계수들이 양자론적인 결과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조작이 필요한가를 면밀히 살폈다. 

수소의 스펙트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경우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이 의식적인 일탈이 더욱 분명하게 되겠지만, 수소 문제는 이런 창의적인 추론을 하기에는 너무 복잡해 부적절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적인 양이 어떤 조작을 통해 양자론적인 양과 상응되는가는 알아내기 위해 수소 체계보다 좀 간단한 1차원적인 비조화 진동자 문제를 예로 선택했다. 또한 모든 변수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물리법칙을 논의함에 있어서 항상 관찰가능한 양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파울리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여 관찰 가능한 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제한했다. 이에 따라 그는 양자론적인 대응 조작을 추론하는 작업을 보다 간편하게 할 수 있었다. 

1925년 6월 7일 하이젠베르크는 건초병을 치료하기 위해 2주간 휴가를 내고 북해의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으로 향했다. 이 헬골란트 섬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비조화 진동자에 대한 수학적 형식화를 다시 추구했고, 바로 이곳에서 행렬역학으로 구체화되는 핵심적인 생각을 얻어냈다. 헬골란트에서 돌아온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생각해낸 새로운 양자론적 방법이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25년 7월 새로운 역학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행렬역학의 출현을 예고한 이 역사적인 논문에서 그가 사용한 상징적인 곱셈이 수학적으로는 행렬의 곱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막스 보른이었다. 즉,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살펴본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상징적 곱셈이 바로 자신이 대학시절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일종의 행렬곱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날 우리가 하이젠베르크 교환식이라고 부르는 식은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하나의 상징적인 곱셈으로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행렬로 처음으로 표현한 사람은 보른과 그의 학생이었던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이었다. 1926년 초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은 서로 힘을 합쳐서 소위 '3인 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의 출현과 함께 1926년 초 뒤늦게 행렬역학의 가치를 인정한 파울리가 수소의 발머계열식을 행렬역학적인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냄으로써 행렬역학은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보른, 요르단, 파울리 등의 도움으로 행렬역학을 완성한 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더욱 일반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게 된다. 1927년 초 하이젠베르크는 감마선 현미경에 의한 사고실험을 통해서 불확정성원리라는 새로운 사고틀을 찾아냈다. 즉 우리는 한 전자의 위치를 더욱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 더욱더 짧은 파장의 현미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컴프톤 효과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그 전자의 운동량에 대해서는 그만큼 부정확한 값을 얻게 된다. 즉, 위치와 운동량은 아주 작은 범위 내에서 서로 불확실한 관계 내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창안하고 있는 동안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몰두하고 있었던 보어도 이와 비슷한 견해에 도달했다. 우리는 항상 거시세계의 용어와 거기에서 얻어진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현상이라는 미시세계를 기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우리의 용어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즉 원자현상의 기술에 있어서 한 용어의 무모순성은 항상 그것의 정의가능성과 관찰가능성의 상보적 관계 때문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것을 보어의 '상보성 원리'라고 하는데, 보어의 이 상보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서로 합쳐져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 코펜하겐 해석이 확립되게 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어떻게 창안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대략 3가지 방향에서 그 영향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현미경의 분해능 문제는 하이젠베르크의 박사 학위 구두시험에서 빈이 하이젠베르크에게 질문했던 것이었다. 박사 시험에서 낭패를 본 경험이 하이젠베르크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이젠베르크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료 물리학자인 파울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하기 직전에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1926년 10월 19일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아주 근접했던 파울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최종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파울리가 아니라 파울리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하이젠베르크 자신의 주장으로 아인슈타인의 영향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에게 관찰이란 것은 관찰하려는 현상과 감각의 연관성을 정해주는 자연법칙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바로 이론이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의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지닌 비결정론적인 성격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상보성원리를 주창한 보어와 양자역학의 유효성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국가사회주의 치하의 하이젠베르크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2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1933년에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수여하는 막스 플랑크 메달과 물리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젊어서 청년운동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우파적인 인물이었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백색 유태인', '정신적 유태인 혹은 유태인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식의 인신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가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은 이유는 나치주의자들이 보기에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의 학문이라고 간주했던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은 하이젠베르크가 좀머펠트의 후임으로 뮌헨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저지하던 때를 전후해서 절정을 이루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교원 연맹'을 필두로 한 나치 선동대들은 하이젠베르크의 과학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교수 임용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였다.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에 그의 스승이었던 좀머펠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뮌헨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에는 임용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나치에 대해서 얼마나 협조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독일 과학사가와 미국 과학사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서 핵개발에 참가했던 독일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군사무기를 개발하는 것에는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인 태업을 했다고 한다. 즉, 자신들이 나치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해서 결국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고 후일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숙제이지만, 나치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양심적인 독일 과학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늄 개발을 결정할 당시인 1942년 전쟁 상황은 독일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독일의 지도부는 전쟁이 일찍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원자탄 개발 같은 계획을 추진할 필요성은 절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독일의 핵개발 팀은 주로 이론물리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우라늄의 연구를 실험실 수준에서 곧바로 거대한 생산 설비가 요구되는 산업적, 군사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배경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실험물리학자, 화학자, 공학자, 그리고 거대한 설비의 건설 경험이 많았던 산업가들이 함께 참가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아무튼 1942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1일에는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전후 재건과 하이젠베르크


전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과학을 대표할 책임이 있는 과학자로서 폐허화된 독일 과학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9년 3월에 창립된 독일 연구협의회의 의장직을 맡는 한편, 자신이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의 도움으로 코펜하겐으로 가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했던 경험을 되살려 훔볼트 재단의 재건에 힘쓰게 된다. 훔볼트 재단에서는 박사 학위를 한 젊은 학자들에게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독일에서 우수한 학문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6년부터는 독일 원자력 문제에 대해 정부에 자문을 하는 등 전후 독일의 과학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자전적인 책인 『부분과 전체』(1969)와 현대물리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소개한『물리학과 철학』(1959)을 비롯한 많은 비전문적인 저작을 통해서도 20세기 과학 사상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쿼크가 물질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소립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만약 궁극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립자가 아니라 물질의 기본 대칭성일 것이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어린 시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었을 때부터 간절히 추구해 온 물질의 기본 대칭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채 1976년 2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뮌헨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참 고 문 헌


[1] W. Heisenberg, Zs. f. Phys. 33, 879-893 (1925).
[2] M. Born, W. Heisenberg and P. Jordan, Zs. f. Phys. 35, 557-615 (1926).
[3] Jagdish Mehra and H. Rechenberg,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Quantum Theory (New York, Berlin: Springer, 1981), Vol. 2-3.
[4] David Charles Cassidy, Uncertainty: the life and science of Werner Heisenberg (Freeman, New York, 1992). 

다음 호 제목 양자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