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정보 > 물리학의 선구자 >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파동역학은 행렬역학과 함께 양자물리학이 형성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역학 체계이다. 파동역학은 행렬역학보다 약간 뒤에 출현하기는 했지만, 과학자들은 편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되는 파동역학을 더 선호했다. 오스트리아 과학자 슈뢰딩거가 창안한 이 파동역학 체계는 오늘날 양자화학, 고체물리학, 양자통계역학, 양자광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일반성을 인정받고 있고 적용영역 또한 계속 확장되고 있다. 
 

슈뢰딩거의 학창시절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dinger)는 1887년 8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슈뢰딩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모습인 복합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성장했다. 슈뢰딩거의 일생은 상호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슈뢰딩거에 관한 대표적인 전기 작가인 월터 무어는 슈뢰딩거의 생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싸웠지만, 모든 정치적 행동은 경멸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허세와 형식을 혐오했지만, 영예를 얻고 상훈을 받는 것을 어린애처럼 즐겨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동료라는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 개념에 몰두했지만, 모든 종류의 협동적 작업을 멀리했다. 그의 지성은 명확한 추론에 바쳐졌지만, 그의 기질은 프리마돈나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고 다녔지만, 항상 종교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그의 과학적 작업은 신성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진정한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Moore, p.4) 슈뢰딩거의 인생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 모순된 수많은 모습들, 말과 행동이 서로 따로 노는 듯한 것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특유한 기질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1898년 슈뢰딩거는 11세의 나이로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 김나지움은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등이 다니던 곳이었는데, 빈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학교였다. 김나지움 당시부터 반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 수재였던 슈뢰딩거는 1906년 빈 대학에 들어가 물리학을 공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과에서는 크리스티안 도플러(Christian Doppler),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요제프 로슈미트(Josef Loschmidt), 루트비히 볼츠만, 프란츠 엑스너(Franz S. Exner), 하젠뇌를(Friedrich F. Hasenrhrl) 등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물리학 연구 전통이 분명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빈 대학의 물리학 전통은 1850년 이 대학의 물리학과 학과장이 된 도플러부터 시작된다. 그는 광원과 관찰자 사이의 상대적 운동이 광원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과학자였다. 1863년부터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은 요셉 슈테판은 1879년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발견한 과학자였다. 1884년 당시 그라츠에 있던 볼츠만은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이 실험식에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하여,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슈테판-볼츠만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했다. 슈테판의 조교였다가 교수가 된 로슈미트는 우리에게 아보가드로 수로 알려진 수를 밝히는 등 기체 분자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과학자였다.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기체 운동 이론 분야를 비롯한 통계물리학 체계를 창안했다. 볼츠만의 영향 아래 빈 대학에서는 강한 통계 물리 전통이 수립되었고, 이런 전통은 프란츠 엑스너, 슈뢰딩거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원자론을 주장하던 볼츠만은 원자의 실재를 비판하던 에른스트 마흐의 추종자들의 끈질긴 비판 속에서 슈뢰딩거가 빈 대학에 입학하기 몇 달 전인 1906년 여름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로 슈뢰딩거는 거장인 볼츠만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슈뢰딩거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슈뢰딩거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실험 물리학 분야의 엑스너와 이론 물리학 분야의 하젠뇌를이었다. 특히 슈뢰딩거는 하젠뇌를 교수의 이론물리학 강연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그에게 역학, 전자기학, 열역학, 광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하젠뇌를 교수는 이탈리아 남부 티롤 지방의 플라우트 고지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공격으로 수류탄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실험물리학자였던 엑스너는 비인과적 자연기술을 선호하였으며, 볼츠만이 전개했던 통계적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던 사람이었다. 자연법칙을 통계적으로 바라보는 엑스너의 철학적 관점은 슈뢰딩거의 지적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3월 5일 슈뢰딩거는 「물리학 연보」에 '탄성적으로 결합된 점계의 동역학에 관해서'(Zur Dynamik elastisch gekoppelter Punktssysteme)라는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판한 가장 탁월한 것이었으며, 향후 슈뢰딩거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리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편미분방정식은 원자론적 입장에서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미분방정식에서 사용되는 극한은 단지 '유사극한'(Pseudogrenzwerte)으로 순수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극한과는 다르다. 또한 연속체에 바탕을 둔 미분방정식은 물질이 실제로는 원자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전쟁으로 징집하기 직전에 완성한 이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원자 모형에 기반을 둔 계에 있어서 초기 값의 명시화에 대해 심도 깊은 분석을 함으로써, 볼츠만이 탐구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슈뢰딩거가 여기서 보여준 학문적 스타일은 훗날 물리학의 혁명을 가져올 파동역학에서 등장하는 파동 운동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기술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전후의 슈뢰딩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슈뢰딩거는 포병 장교로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5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있었던 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거둔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던 슈뢰딩거는 1917년 봄 빈으로 배치되어 다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슈뢰딩거는 빈의 근교 장교 학교에서 기상학 및 물리학 실험 등을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원자열과 분자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양자론에 대한 논문을 처음으로 집필했다. 또한 그는 브라운 운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마리안 스몰루코프스키(Marian Smoluchowski)의 영향을 받아 방사선 붕괴률에 관한 재멋대로 요동(random fluctuation)에 관한 완전한 분석인 슈바이들러 요동(Schweidler fluctuation)을 포함하는 통계 물리 분야의 논문을 집필했다. 

한편 슈뢰딩거는 전선에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처음으로 접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접하자마자 그는 이 이론이 지닌 중요성을 즉각 간파했다. 빈으로 돌아온 그는 빈 대학의 루트비히 플람(Ludwig Flamm), 한스 티링(Hans Thirring)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도 이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곧 그 자신도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이때 슈뢰딩거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면서 광학에서 나오는 호이헨스의 원리와 역학에서 나오는 해밀턴 방정식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는데, 이 주제는 훗날 그가 파동역학을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후에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와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 심취했다. 슈뢰딩거가 당시에 이런 철학에 심취하게 되는 데에는 전후에 등장한 사조로서 결정론적 세계관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비합리주의적이고 낭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처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단지 감각 인상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현상을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짜맞추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정신과 의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칸트보다도 더 나아갔다. 즉 칸트는 물자체는 인간의 사유나 경험으로부터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칸트와는 달리 물자체가 의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의지는 현상도 표상도 아니며 직접적으로 경험된 실제라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정신과 의지가 물질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인도의 베단타 철학도 접하게 되었다. 1918년 당시 슈뢰딩거는 여러 저자들이 쓴 인도철학에 관한 책을 주석까지 달면서 열심히 탐독했다. 슈뢰딩거가 훗날 파동역학을 창안하고 생명과 정신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에는 인도철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 힘든 것처럼 인도 철학이 그의 파동역학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명한 형태로 파악하기는 무척 힘들다. 

 

파동역학 출현 이전의 슈뢰딩거


1918년에서 1920년까지 빈 대학에서 머무는 동안 슈뢰딩거는 색채이론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다. 1920년 잠시 슈트트가르트 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슈뢰딩거는 슈트트가르트에서 외각 전자가 궤도 내부로 침투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을 교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양자론 분야에 뛰어들었다. 1921년 10월 슈뢰딩거는 마침내 자신의 최대의 업적을 이루게 될 취리히 대학의 이론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취리히 초창기 시절인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슈뢰딩거는 주당 11시간이나 강연을 하는 힘든 생활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1923년은 그의 학문적 생산력에 있어서 최저를 기록한 시기가 되었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뛰어난 교수들이 대부분의 강의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1922년 12월 9일 슈뢰딩거는 물리학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대중들 앞에서 보여주는 교수 취임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엑스너의 철학적 견해를 열광적으로 소개했다. 1919년 엑스너는 『자연과학의 물리적 기초에 관한 강연』이라는 책에서 자연 법칙의 통계적 기초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책에서 그는 통계적인 총체를 포함하는 개별 분자적 사건은 인과적 법칙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무질서하게 일어나며 어떤 인과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파동-입자 이중성 문제에 대해 골치를 앓으면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을 파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 8일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복사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파울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방출 과정에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파기된다고 믿는다." 즉 원자에서 복사선이 구면파로 방출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늘 모양의 운동량을 원자에게 주어 원자가 뒤로 밀려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거시적으로만 유효한 통계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이전에 슈뢰딩거는 자연법칙이 통계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4년 보어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했을 때 이들의 생각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당시 보어, 크라머스, 슬레이터 등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안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원자세계의 기술에 있어서는 에너지와 운동량이 통계적으로만 보존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 새로운 복사 이론이 지닌 통계적 성격이 비인과적 자연법칙을 주장하던 엑스너의 주장과 서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전에는 슈뢰딩거가 비인과적 자연법칙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양자역학에 관한 철학적 해석인 코펜하겐의 견해를 거부했다는 것과 연관시켜 볼 때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동역학의 탄생


1925년부터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기체 이론과 연관시켜 이상기체의 통계학적 열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다. 1924년 6월 인도 다카 대학의 물리학자 보즈(Satyendra Nath Bose)는 아인슈타인에게 기체 운동 이론에 관한 한 논문을 보내왔다. 이 논문은 보제가 이미 영국의 물리학 저널인 〈필로소피컬 매거진〉에 보냈다가 거절당했던 것이었다. 보즈가 쓴 논문을 본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의 중요성을 금방 알아차렸고, 스스로 번역하고 개인 의견을 첨부해 독일 물리학회 저널로 보냈다. 이리하여 훗날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양자 통계역학의 두 기둥이 되게 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924년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던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는 물질이 파동적인 성질을 나타낸다는 물질파 이론을 제안했다. 슈뢰딩거와 드브로이는 각각 파동역학과 물질파 이론을 창안하기 직전에 모두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25년 11월 3일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와 11월 16일 알프레드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드브로이 논문을 면밀히 읽었으며, 그 의미를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아인슈타인 이론에 의하면 움직이는 입자는 세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파동 복사 위로 솟아 나온 거품산등성이(Schaumkamm)일 뿐이며, 이런 관점이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왔던 기체 통계학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1926년 마침내 기존의 행렬역학과는 전혀 다른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를 만들어 냈다. 슈뢰딩거가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에서 자신의 파동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슈뢰딩거 자신이 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과정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들이 상당수 없어져서 무척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슈뢰딩거의 첫 시도는 이론적 결과가 실험치와 맞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슈뢰딩거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포기하고 비상대론적인 파동방정식을 전개하여 이것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이 상대성이론을 전제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엉성한 비상대론적인 식이 실험치와 일치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슈뢰딩거는 이 비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첫 논문으로 1926년 1월에 발표했던 것이다. 첫 번째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고전역학의 해밀턴-야코비 방정식에 변분법을 적용해서 파동방정식을 유도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이 방정식을 유도하기 전에 여러 추측을 통해서 파동 방정식의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슈뢰딩거는 원자 내의 전자가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을 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전이된다는 양자비약(quantum jump)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런 괴이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연속체적인 자신의 파동역학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파동함수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이런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비인과적 세계관을 선호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전체 인생을 통해 볼 때 그는 자연 법칙의 통계적 성질에 대해 아인슈타인처럼 철저하게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슈뢰딩거가 양자이론에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양자론의 비결정론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바뀌는 양자비약을 인정한다는 점이었다. 양자비약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은 데이비슨(C.J. Davisson)의 전자 산란 실험과 톰슨(George Paget Thomson)의 전자 회절 실험을 통해 그 실험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데이비슨은 당시에 벨전화연구소에서 연구하던 과학자였다. 그는 1926년 여름 영국으로 휴가를 갔다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보른의 강연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 파동역학을 접했다. 보른의 강연에 자극을 받은 그는 이미 1923년에 한 바 있던 전자산란에 관한 초보적인 실험을 다시 한번 정교하게 반복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27년 3월 데이비슨과 저머(Lester H. Germer)는 니켈 단결정을 이용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였던 G.P. 톰슨도 1926년에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한 뒤 보른의 강연에 흥미를 갖고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1925년 7월 보른의 학생이었던 엘자서(Walter Elsasser)는 카를 람사우어가 실험하던 느린 전자의 투과현상을 이용해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엘자서는 보른 밑에서 이론 물리학으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실험 계획을 포기했다. 1926년 9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다이몬드(E.G. Dymond)는 헬륨에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엘자서가 찾고자 했던 간섭 유형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를 얻어냈다. G.P. 톰슨은 다이몬드의 실험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에 대한 정성적인 검증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은 고체 표적을 사용해서 보다 정량적인 실험적 증거를 얻어내려고 했다. 1927년 11월 G.P. 톰슨은 알루미늄, 금, 셀룰로이드 등의 고체 표적에 음극선 빔을 발사해서 전자가 회절하는 모습을 사진 건판에 담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슨과 톰슨의 실험으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분명한 실험적 증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자리잡은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35년 코펜하겐 해석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Boris Podolsky), 로젠(Nathan Rosen) 등과 함께 파동함수에 의해서 주어지는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자극을 받은 슈뢰딩거는 같은 해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의 해석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이때 그가 했던 논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양자역학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 예로 여러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한편 인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슈뢰딩거는 생명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훗날 생명과학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젊은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그는 유전자를 하나의 정보운반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생명체는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다른 새로운 물리법칙'도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슈뢰딩거의 사생활


슈뢰딩거는 자신의 왕성한 학문적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여인과 정사(Love Affair)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김나지움 시절부터 슈뢰딩거는 연극을 좋아했으며, 세기말인 아방가르드 시대에 빈에서 만연했던 에로틱한 미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학자로서의 일생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던 25세 때 슈뢰딩거는 넘을 수 없었던 신분의 차이로 사모했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 그 뒤 슈뢰딩거 생애의 무대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슈뢰딩거는 잘츠부르크의 평범한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그들 사이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한 뒤 슈뢰딩거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일으키고 다녔으며, 자신 역시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고 이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인 안네마리 베르텔-슈뢰딩거(Annemarie Bertel-Schrdinger)는 슈뢰딩거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지 않고 평생 그와 함께 살았다. 어린 이란성 쌍둥이 가운데 한 명인 이타 융거(Itha Junger), 슈뢰딩거 친구의 아내이며 슈뢰딩거의 첫 번째 딸을 낳았던 힐데그룬데 마르히(Hildegrunde March), 무대 배우로서 맹렬 여성인 유부녀 세일러 메이(Sheila May) 등은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연인들이었다. 심지어 슈뢰딩거는 대학의 동료 교수인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자신의 부인과 공공연한 관계를 맺는 것을 묵인할 정도로 기이한 생활을 했다. 평생 식지 않는 학문적 열정과 끝없는 여성 편력을 동시에 과시했던 슈뢰딩거는 1961년 1월 4일 고향인 빈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1] E. Schrdinger, Annalen der Physik 79, 361-376 (1926); Annalen der Physik 79, 489-527 (1926); Annalen der Physik 80, 437-490 (1926); Annalen der Physik 81, 109-139 (1926).
[2] E. Schrdinger, Naturwissenschaften 23, 807-812; 823-828; 844-849 (1935).
[3] E. Schrdinger, What is Lif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44).
[4] Jagdish Mehra and H. Rechenberg,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Quantum Theory (New York, Berlin: Springer,1987), Vol. 5.
[5] Walter Moore, Schrdinger, life and though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5] C. Davison and L. H. Germer, Nature 119, 558-560 (1927).
[6] G. P. Thomson, Proc. Roy. Soc.London A 117, 600-609 (1928).
[7] Arturo Russo, HSPS 12, 117-160 (1981). 

다음 호 제목 맥스웰과 전자기학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