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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맥스웰과 전자기학

맥스웰과 전자기학 

인류는 오래 전부터 마찰시킨 물질들이나 자석들이 서로 끌리거나 밀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신비한 작용을 하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지식은 오랜 동안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다. 전기, 자기, 빛 등에 관한 지식이 수학적 테크닉의 도움으로 이론 물리학과 만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864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기와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리 법칙을 정립해서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통합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다. 
 

자기학의 기원


자석은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나, 자석이 남북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기원 전후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풍수가들은 자석을 택지나 묘소의 방향을 잡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물에 자침을 띄워 방향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11세기에 이르면 이 방법을 항해에도 사용하게 된다. 나침반의 원조인 이 장치는 당시에 중국에 왔던 아랍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유럽 선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씌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석에 관한 문헌은 1269년 프랑스 천문학자 페레그리누스(Petrus Peregrinus de Maricourt)가 집필했다고 하는 『자석에 대한 편지』(Epistola de magnete)이다. 이 책자에서 그는 자석을 지구의 본을 딴 작은 천체 모형으로 간주하면서, 자석의 극성, 나침반 등 자석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 언급했다. 페레그리누스는 체계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그 때까지 유럽에 알려진 자석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서구 자기학에 대한 학문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페레그리누스의 이 선구적인 논의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유럽에서 잊혀졌다. 

300여년이 지난 뒤인 1581년 영국의 선원이자 기계제작자인 노먼(Robert Norman)은 『새로운 인력』(The Newe Attractive)이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노먼은 지자기의 방위각과 복각에 대해 언급하는 등 나침반의 성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에 몇몇 지식 계층은 실제 생활에 종사하는 장인 계층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지식을 얻기도 했다. 즉 지식 계층에 속하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는 노먼과 같은 장인계층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경험적으로 얻은 자기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학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길버트는 1600년 『자석에 관해서』(De Magnete)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여 자기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자기 현상을 지구의 균질한 부분들이 서로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성질로 자석이 전체 지구의 근본적 형상에 부합하려는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석을 살아있는 지구의 작은 분신이라는 뜻으로 'Terrella'라고 불렀다. 길버트는 자기력을 살아있는 영혼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근대적인 기계적 철학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기본적으로 물활론적 성격의 르네상스 자연주의 전통 내에 있는 것이었다. 

『자석에 관해서』에서 길버트는 지자기의 요소를 상호인력(Coition), 남북방향의 정향성(Direction), 방위각(Variation), 복각(Declination), 회전운동(Revolution) 등으로 구분하였다. 훗날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는 지자기를 연구할 때 방위각을 Declination이라고 명명하고, 복각을 Inclination이라고 명명했는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지자기의 요소는 이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전기학의 발전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박(琥珀)을 모피에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들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어의 electricity라는 단어도 그리스어로 '호박'이라는 뜻의 엘렉트론(elektron)에서 비롯되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역시 길버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해서』라는 책에서 자기 이외에 전기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기와 자기를 철저히 구별하여 다루었다. 그는 전기력은 자기력과는 달리 전기소(electrical effluvium)라는 극히 희박한 액체, 즉 수분에 의해 매개된다고 생각했다. 

길버트 이후 전기에 관한 연구는 예수회(Jesuit) 관련 과학자들과 이탈리아에서 실험을 주로 하던 치멘토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우선 왕립학회의 '실험 책임자'(curator of experiment)였던 프랜시스 혹스비(Francis Hauksbee, ca.1666 ­1713)는 수은 기둥 위의 진공에서 발생하는 빛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전기를 연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기구를 제작했다. 그는 회전하는 유리공이나 원판을 이용해서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 전기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섬광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아마추어 실험가로서 왕립학회지『철학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자주 기고했던 스티븐 그레이(Stephen Gray, 1666-1736)는 1729년 정전기 현상이 접촉에 의해서 아주 멀리 전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물질을 잡고 있을 때 전기력이 전달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중적인 흥미를 끌며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젊은 보병장교였던 뒤페(Charles- Francois de Cisternai Dufay, 1698-1739)는 1733년 그레이의 실험을 더욱 체계적으로 확대해서 금속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질을 비벼서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뒤페는 다양한 물질들로부터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를 종합하여 전기가 수지성(resinous)과 유리질(vitreous)이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리병과 같은 유리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는 호박과 같은 수지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를 끌어당기고, 같은 종류의 전기들은 서로 밀친다는 것이다. 한편 뒤페의 동료이며 계몽사조기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전기학자인 아베 놀레(Abb Jean Antoine Nollet, 1700-1770)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전기를 띤 물체에서 나오는 전기적 유체의 흐름이 서로 반대인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뒤페와 놀레가 전기가 두가지 형태의 유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데에 반해서 충실한 뉴턴주의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전기가 한 종류의 유체로 이루어졌다는 일 유체설(One-Fluid Theory)을 주장했다. 그는 뉴턴의 중력 에테르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게 압력에 의해 인력과 척력을 나타내는 단일한 정적인 전기 '대기' (atmosphere) 이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도 프랭클린은 1749년 번개 실험을 제안하고 1752년 실제로 연을 날리는 실험을 하여 번개가 일종의 전기적 작용이라는 것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프랭클린이 했던 연날리기 실험은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는데, 1753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유능한 물리학자였던 리치만(George Wilhelm Richmann)은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한편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일종의 축전지로서 전기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라이덴 병(the Leyden jar)은 독일의 클라이스트(Ewald Georg von Kleist, ca. 1700-1748)와 Leyden의 무센부룩(Pieter van Musschenbroek, 1692-1761)에 의해 발명되었다. 1746년 1월 무센부룩은 온도계의 척도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에게 라이덴 병을 이용해서 얻어내 자신의 놀라운 실험 결과에 대해 알렸다. 

1767년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는 뉴턴의 중력 법칙과 같이 전하도 거리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글래스고의 조지프 블랙의 학생이었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1739-1805)의 실험(1769년),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l731-1810)의 실험(1771년), 군사공학자이자 토목공학자였던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Charles Augustin Coulomb, 1736-l806)의 실험(1785년) 등을 통해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정량적인 법칙이 얻어지게 되었다. 결국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발견되고 전기와 자기에 대한 지식이 누적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났으며, 전기, 자기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다. 

 

동전기의 발견과 전기화학의 발전


1780년대에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루이기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는 금속을 개구리 신경에 접촉했을 때 개구리가 움츠리는 것을 보고 동물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소위 동물전기 현상을 발견하고 이것을 1791년 세상에 발표했다. 당시 갈바니는 이것이 동물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동물전기라고 불렀지만, 실상 전기는 쇠와 구리가 접촉해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개구리는 이 실험에서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했었다. 물론 갈바니도 두 금속의 접촉에 의해서만 전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해부학자였기 때문에 전기 현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생리학적인 측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집중했다. 

갈바니의 친구였던 볼타(Allesandro Volta, 1745­1827)는 갈바니와는 달리 동물의 생리학적 현상보다는 전기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1794년부터 금속만을 가지고 전기를 발생시키는 실험을 한 끝에 갈바니 실험에서 개구리는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즉 서로 다른 금속들이 젖은 도전체를 사이에 두고 접촉할 때 흐르는 전기가 발생하고, 이것을 여러 개를 쌓아 기둥으로 연결하여 강한 전류를 얻어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공 전기 발생 기관인 볼타 전지의 효시가 된다. 

금속 전기를 옹호하는 볼타의 주장에 대해 동물전기 옹호자들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1797년 볼타는 동물 전기 이론을 제압하고 자신의 접촉 이론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냈다. 3년 뒤인 1800년 볼타는 최초의 전기 배터리를 대중 앞에 선을 보이면서 자신의 배터리가 지닌 증거 효과를 극대화시키며 동물 전기 옹호자와의 논쟁에서 마침내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승리했다. 이 소식은 곧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해져 이듬해 볼타는 나폴레옹 앞에서 배터리에 의해 전기가 발생하는 것을 시연함으로써 학문적 명성과 아울러 정치적인 힘도 얻었다. 

 

전기화학의 출현


볼타의 배터리 발명 소식은 곧 유럽의 여러나라에 전달되어 새로운 여러 학문 분야들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볼타의 연구가 영국의 왕립학회지에 발표된 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는 전기 분해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나트륨(sodium)과 칼륨(potassium)과 같은 새로운 화학원소를 발견했다. 전기화학은 영국보다도 독일에서 더 많은 각광을 받았다. 특히 당시 독일에서는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인 과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화학 물질과 전기의 상호 작용을 다루는 볼타의 전기화학은 이 사조에 속했던 과학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독일의 과학자 리터(Johann Wilhelm Ritter, 1776-1810)는 자연적 힘의 단일성 및 변환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과학자였다. 그는 자연철학주의 사조의 전도사들인 노발리스, 셸링 등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화학적 에너지, 전기적 에너지, 빛 에너지 등이 서로 변환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에너지 변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갈바니 전기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볼타를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연철학주의의 이런 전통은 동력학주의(Dynamismus)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무게가 없는 입자를 바탕으로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원자주의(Atomismus)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1800년 항성 천문학과 성운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셀(William Herschel, 1738-1822)은 열 작용과 관련되고 가시광선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적외선을 발견했다. 독일의 낭만주의적 과학 전통 속에서 리터는 그 이듬해 자연철학주의의 중요한 철학 원리 가운데 하나였던 양극성(Polaritt)의 원리에 입각해서, 적외선의 반대편에 있으며 강한 화학적 작용을 보이는 자외선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자기 효과의 발견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 1777-1851)도 바로 독일의 낭만주의 과학자들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던 덴마크 과학자였다. 외르스테드가 전기의 흐름이 자석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것도 그가 자연의 통일된 힘을 찾으려는 자연철학주의적인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터와 교분을 가지면서 서로 긴밀한 서신 연락을 하던 그는 이미 1813년에 전자기적 효과를 예견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1820년 7월 21일 코펜하겐에 있던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자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이라는 라틴어로 씌어진 책자를 전 유럽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책은 매우 모호하고 사변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 유럽의 과학자들은 저마다 이 놀라운 현상을 재확인하려는 다양한 실험을 반복하게 되었다. 

외르스테드의 발견 소식이 프랑스에 처음 전달되었을 때 비오(Jean Baptiste Biot, 1774-1862)와 푸아송(Simon-Denis Poisson, 1781-1840)과 같은 프랑스 과학자들은 이 발견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과학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대적인 입장을 지녔던 프랑스 과학자들도 이 현상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면서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이 현상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4일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는 아카데미에 이 사실을 발표하고 11일에는 이 실험을 재현해 보였다. 그 뒤 앙페르(Andr Marie Ampre, 1775-1836)는 9월에서 11월 사이에 전류가 흐르는 두 평행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발견하는 한편 전자기 효과와 관련된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1820년에서 1825년을 거치는 동안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의 작용으로 일반화하는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와 전자기 유도의 발견


전류가 자기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전개한 앙페르의 작업은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에 의해 전자기 유도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13세의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적 판매 및 제본공으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어려서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나오는 전기에 관한 127쪽의 글을 읽고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12년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전기화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데이비와의 만남은 패러데이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813년 데이비의 조수가 된 그는 이때부터 1861년 사임할 때까지 평생동안 왕립연구소와 인연을 함께 했다. 

패러데이는 1824년 벤젠과 부틸렌을 발견했으며, 벤졸을 분리하는 등 화학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전기화학과 전자기학 분야에서 보다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국에 있었지만 데이비 등의 작업을 통해 자연의 통일적인 힘을 찾으려는 독일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 아래서 그는 1820년 10월 1일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스스로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가 1831년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하고, 1849년,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중력이 다른 종류의 힘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려고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런 영향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힘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패러데이는 1825년에서 1828년 사이에 이미 전자기 유도를 확인하려는 초보적인 실험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패러데이가 사용했던 측정 장치의 한계로 말미암아 전자기 유도 현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831년 8월 29일 패러데이는 오늘날의 변압기와 유사한 장치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는 이 변압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실험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시켜 마침내 10월 17일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11월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설명하면서 전압에 의해 극성화된 입자선의 기하학적 표현인 유도력선(line of inductive force)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845년 패러데이는 자기장에 의해 편광면이 회전하는 광자기 회전효과를 발견했으며, 비스무트와 유리와 같은 물질이 반자성의 성질을 보임을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광자기 회전 효과와 반자성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력선(Magnetic Field)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기장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패러데이는 1852년 '자기력선의 물리적 특성'(The physical character of the lines of force)이라는 논문에서 힘들은 주위 공간을 통한 굽어진 역선에 의해서 서로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자기력선을 단순한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패러데이의 자기력선과 장의 개념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패러데이가 제창한 장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자기력이 무한한 속도가 아니라 유한한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845년 3월 19일 가우스는 자신의 공동연구자였던 빌헬름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에게 빛과 유사한 속도로 전달되는 전자기 전달 현상에 관한 생각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유한한 전파 속도를 지닌 전자기장 개념이 담겨 있는 가우스의 이런 선구적인 생각은 당시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가우스가 죽은 뒤에 출판된 가우스 전집에 수록되어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이 완성된 뒤에 맥스웰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1892년부터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도 1840년대에 열현상과 전기현상의 수학적 유추를 이용해 전기현상에 대한 수학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1847년 그는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가 발전시킨 연속매질 속에서의 회전 및 변형력에 관한 수학적 방법을 채용하고 탄성 고체의 직선 및 회전 변형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여 전기력과 자기력의 전파 과정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제안했다. 이후 톰슨은 패러데이의 자기장 개념을 수학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전자기 현상을 에테르 속에서의 소용돌이(vortex) 운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맥스웰의 학창시절


앙페르, 패러데이, 톰슨 등에 의해 발전한 전자기학을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었다. 맥스웰은 1847년 16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광학과 열역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물리학자인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philosophy of common sense)으로 유명한 형이상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9th Baronet, 1788-1856)---광학과 동력학을 통일한 것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수리물리학자인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이 아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에든버러 대학 시절 맥스웰은 기하학과 강체 문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50년부터 맥스웰은 스코틀랜드를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우등졸업생 제조기(wrangler maker)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던 튜터(tutor) 윌리엄 홉킨스(William Hopkins) 밑에서 공부했다. 맥스웰 이외에도 사원수(quaternion)의 연구로 유명한 수리물리학자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 점성 유체의 행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스톡스, 열역학 및 전자기학 연구로 유명한 윌리엄 톰슨, 매트릭스와 공간 기하학 연구로 현대 순수 수학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아서 케일리(Arthur Cayley, 1821-1895), 고전역학의 권위자이며 탁월한 케임브리지 대학 선생이었던 라우스(Edward John Routh, 1831-1907) 등도 모두 홉킨스의 지도 아래 과학자로 성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귀납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과 스톡스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맥스웰이 공부하던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라는 졸업 시험 제도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은 졸업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철저한 수련 생활을 하게 되는데, 시험 문제의 출제 경향 자체가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의 학문적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무엇보다도 혼성 수학(mixed mathematics)의 전통이 매우 강했다. 또한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 제도 내에서 물리학은 해석 동력학의 형태로 수학 교과 과정의 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케임브리지 수학자들은 기하학적이고 역학적인 유비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나중에 물리학자로서 활동하게 되는 과학자들도 전기 동력학을 다루면서 해석학적인 수학 도구를 많이 사용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출현하게 되는 데에도 이런 기하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의 전통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맥스웰은 1854년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에서 라우스에 이어 차석 우등졸업생(second wrangler)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아울러 라우스와 공동으로 첫 스미스 상(Smith's Prize)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성립


맥스웰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된 관계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1856년 맥스웰은 애버린(Aberdeen)의 매리셜 칼리지(Marischal College)의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전자기학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작업을 하게 된다. 학창시절부터 기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맥스웰은 전자기력의 작용을 기하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 주목했다. 아울러 맥스웰은 열과 전기 현상 사이의 기하학적 유추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톰슨의 논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1856년에 발표한 '패러데이의 역선에 관해서'(On Faraday's Line of Force)라는 논문은 초기 맥스웰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물리적 가설과 이론의 방법을 일단 유보하고 유추의 방법을 사용해서 패러데이의 역선과 관련된 문제를 접근했다. 여기서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을 물리적 표현으로 보지 않고 단지 기하학적 유추 표현으로 보았다. 한편 같은 해 톰슨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광자기 회전효과를 자기의 소용돌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스웰은 톰슨의 논문을 접한 뒤 패러데이 자기력선을 물리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패러데이의 역선을 이해하는 데 소용돌이 메커니즘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1860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 교수가 된 맥스웰은 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패러데이의 자기력선을 바라보게 된다. 우선 그는 1861-2년에 출판한 '물리적 역선에 관해서'(On the Physical Lines of Forces)라는 논문에서 전자기장을 가설적이고 유추적인 차원을 넘어서 물리적이고 역학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톰슨과 랭카인(William Rankine, 1820-1872) 등에 의해 제안된 분자 소용돌이(molecular vortices) 모형을 도입했다. 또한 맥스웰은 유체역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를 이용해서 전자기 장을 "자기-전기 매질"을 꿀벌집 모양의 세포 에테르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각 세포는, 그것들의 운동이 불균일한 자장 내의 전류의 흐름에 해당하는, 일종의 '공전 입자'(idle-wheel particle)의 층에 의해서 둘러싸인 분자 소용돌이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상적이고 유추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맥스웰은 이 모형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설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여기서 비탄성 유체의 탄성 변위 뒤틀림(elastic displacement distortion) 현상에 대한 유추로서 전기적인 변이전류(displacement current) 개념을 도출해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기계적인 형태에서 나온 것으로 전류, 전하를 중심으로 하는 전자기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유체역학적인 유비에 의한 전기장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었다. 

맥스웰은 이 논문에서 탄성체의 속도를 피조(Armand Hippolyte Louis Fizeau, 1819-1896)가 측정한 빛의 속도와 비교해본 뒤 광학과 전자기학의 통합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런 통일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마침내 "빛은 전기적, 자기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매질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light consists in the transverse undulations of the same medium which is the cause of electric and magnetic phenomena.)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기계적인 모형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 형태로서 일종의 '빛에 대한 전자기계 이론'(electro-mechanical theory of light)이라고 할 수 있다. 

1865년 '전자기장의 동력학 이론' (Dynamical theory of the 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비로소 앙페르 법칙과 변이전류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빛에 대한 전자기론(electromagnetic theory of light)을 분명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맥스웰은 그 동안 자신이 얻은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전자기론』(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맥스웰의 전자기학 체계는 완전한 모습을 띠고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와 전자기파의 발견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톰슨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독일의 과학자들은 맥스웰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전자기학 체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완성하던 무렵 독일에서는 베버의 전자기학 전통에 따라 쿨롱 법칙과 앙페르 법칙을 포괄하는 전자기학을 전개했다. 앙페르가 발견한 전자기 법칙은 독일의 빌헬름 베버를 비롯한 추종자들에 의해서 원격작용에 의한 전자기 역제곱 법칙으로 발전되었다. 즉 베버의 영향을 받은 많은 독일 과학자들은 전자기력이 무한대의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수용되어 결과적으로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데에는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독일 과학의 대부였던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세련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1879년 베버의 이론틀 내에서 매질의 극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헬름홀츠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유전성 극화에 의한 전자기 효과를 검출하는 내용을 현상 공모 문제로 출제했다. 그는 자신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헤르츠(Heinrich Hertz, 1857 ­1894)에게 이 문제를 풀도록 격려했으나, 헤르츠는 당시에 이 전자기 효과를 실험적으로 검출하는 데에 실패했다. 

결국 헤르츠는 전자기 효과 검출 실험이 아닌 다른 주제로 박사학위를 하게 되었다. 그 뒤 헤르츠는 베를린, 킬 등을 전전하다가 1885년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Technische Hochschule Karlsruhe)의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그는 1887년 10월에서 1888년 2월 사이에 전기스파크를 이용해서 행한 유명한 전자파 발견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는 전체적으로는 헬름홀츠의 이론틀 내에서 실험을 진행시켰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실험은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발전시킨 헬름홀츠의 이론을 부정하고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을 검증한 셈이 되었다.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고 난 뒤 독일에서는 맥스웰 전자기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로렌츠의 전자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1] W. D. Niven, (ed.), The Scientific Papers of J. Clerk Maxwell, 2 vols. (Cambridge, 1890; repr. New York, 1952).
[2] J. C. Maxwell,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2 vols (Oxford, 1873).
[3]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4] Thomas L. Hankins,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다음 호 제목 볼츠만과 통계역학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