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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볼츠만과 통계역학

볼츠만과 통계역학의 출현 

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뜨거움과 차가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온도라는 개념이 실제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에 대한 최소한의 정량적인 개념은 온도계가 발명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지만, 온도계의 발명만으로 열에 대한 학문 분야가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열에 관한 분야가 열역학이라는 체계적인 이론 체계로 발전한 것은 에너지 보존법칙과 엔트로피 법칙 등 열역학의 기본 법칙이 정립된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말 클라우지우스, 맥스웰을 거쳐 볼츠만은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정립하고 열에 대한 현상을 통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통계 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출현과 칼로릭 이론의 발전


온도계는 1592년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갈릴레오는 온도 측정을 위한 팽창 매질로 공기를 사용했는데, 갈릴레오가 발명한 이 기체 온도계는 구체적인 온도 단계가 없어 체계적인 정량적 측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의 온도계는 기압계와 같은 맥락에서 발전했다. 이 기체 온도계가 점차로 액체 온도계로 대체되면서 비교적 정확한 온도 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온도계가 발명된 뒤 과학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온도계를 고안해냈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에 이르면 무려 35 종류나 되는 다양한 온도 체계가 창안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스웨덴의 천문학자였던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 네덜란드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Gabriel Fahrenheit, 1686­1736), 프랑스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 등이 제안한 온도 체계가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다. 18세기 초 파렌하이트는 오늘날 우리가 화씨라고 부르는 온도 체계를, 그리고 1742년 셀시우스는 수은을 사용해서 섭씨 온도 스케일을 창안했다. 파렌하이트는 애초에 물의 빙점을 30, 체온 90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32와 96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빙점은 32, 체온은 98.6으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1730년 프랑스의 레오뮈르는 물의 빙점을 0, 비등점을 80으로 정한 온도 스케일도 제안했었다. 이 체계는 창안 당시에는 다른 체계에 비해 아주 널리 사용되었지만, 19세기 말에 다른 체계들로 흡수, 교체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재 물의 빙점을 32로 하고 비등점을 212로 하여 그 사이를 180 등분한 화씨 온도 체계와, 물의 빙점을 0으로 하고 비등점을 100으로 하여 그 사이를 100 등분한 섭씨 온도 체계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등장과 함께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열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물리학자인 라플라스와 화학자인 라부아지에는 열량계를 이용해서 열에 대한 정량화 작업을 추진했다. 이들이 전개한 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열을 무게가 없는 입자로 생각하는 칼로릭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당시에 칼로릭은 화학 원소와 마찬가지로 근본 물질로 간주되었다. 근대적인 원소의 개념을 확립했던 라부아지에가 열거한 원소 가운데에는 빛과 함께 열의 양을 나타내는 칼로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이공학 교육기관이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공학자들은 칼로릭 이론을 기반으로 해서 열 현상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전개시켜 나갔다.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와 같은 사람들은 칼로릭 이론에 입각해서 열 전달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루었으며,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는 열 효율 문제를 수학적으로 다루었다. 전문가로서의 분명한 경력을 쌓은 이들은 열의 전도도, 온도 변화, 기울기 등과 같은 열과 관련된 수학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24년 사디 카르노는 '열의 동력에 관한 고찰'(Rflexions sur la puissance motrice de feu)이라는 글에서 열기관의 열효율은 그 열기관의 구성물질에 관계없이 그 열기관을 구성하는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카르노는 물이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떨어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물의 양과 한 일의 양의 비가 두 위치의 차이만의 함수로 표현되는 데에 주목했다. 물의 낙차와 마찬가지로 열도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열의 양과 그 과정에서 한 일의 비, 즉 열효율은 두 온도의 차이만의 함수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 카르노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하지만 열기관의 효율을 이론적으로 다룬 카르노의 이 논문은 출판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학자들에 의해 거의 무시되었다. 우선 이 논문은 아주 적은 수량만 복사되었고 따라서 문헌의 전파 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에 증기기관 기술의 중심지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무명의 프랑스 저자가 쓴 이 책이 영국으로 전파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이외에도 이 논문은 공학자들이 주로 읽는 공학 전문잡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논문의 내용도 열기관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문제를 취급했기 때문에 공학자들마저 이 논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동시 발견


한편 1840년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 즉 역학적 에너지와 열, 화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고, 이것들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에너지가 서로 변환가능하다는 생각이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계몽사조에 대한 반발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자연철학주의(Naturphilosophie)의 영향이 컸다. 셸링, 노발리스를 비롯한 자연철학주의들은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장한 분석적, 기계적, 실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에 다시 조화와 감성을 부여했다. 자연친화적이며 유기체적인 자연관을 선호했던 자연철학주의자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다양성의 밑바탕에는 통일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조의 영향 아래 1840년대에 열역학 제1법칙에 해당하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본래 의사였던 로버트 마이어(Robert Meyer, 1814­1878)는 음식물이 몸 속에 들어가서 열로 변하고, 이것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학적 에너지로 변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해서 모든 종류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가능하며, 전체 에너지의 양은 보존된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즉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며, 자연에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로서 열과 일의 변환 계수를 계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물리 분야의 전문학술지인 『물리학 및 화학 연보』(Annalen der Physik und Chemie)에 보냈다. 하지만 당시 '새로운 물리-화학 잡지'를 표방하며 학술잡지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편집인 포겐도르프(Johann Christian Poggendorff, 1796­1877)는 마이어의 논문이 너무 사색적이고 전문적인 물리학 논문이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수록을 거절했다. 마이어의 논문이 수록을 거부당한 것은 당시 독일 과학이 초기의 낭만주의적인 단계를 벗어나 과학 방법에서 분석적이고 수학적인 강조하는 형태로 제도화되어 기존의 자연철학주의에 영향을 받은 낭만적인 과학활동에 대해 반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예에 해당한다. 마이어는 할 수 없이 자연철학주의에 대해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구스타프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가 운영하는 화학저널인 『화학 및 약학 연보』(Annalen der Chemie und Pharmacie)에 자신의 논문을 기고했다.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1842년에 마이어가 한 작업을 모른 채로 1847년 생체의 열은 생명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음식물의 화학에너지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그는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역학적 에너지에만 적용되던 에너지 보존법칙을 다른 에너지까지 확장시켰다. 헬름홀츠는 이런 생각이 담긴 논문을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및 화학 연보』에 투고했지만,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편집인으로부터 수록을 거부당했다. 헬름홀츠도 할 수 없이 이 내용을 물리학회 강연집인 『에너지 보존 법칙에 관해서』(Uber die Erhaltung der Kraft, 1847)라는 소책자로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생각은 독일뿐만이 아니라 실험적 전통이 강했던 영국에서도 등장했다. 영국의 제임스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은 1840년대의 여러 작업을 통해서 에너지는 보존되고 또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줄은 자신의 실험을 정리해서 1850년 '열의 역학적 등가에 관해서'(On the mechanical equivalent of heat)라는 논문으로 출판하고 여기서 772 파운드가 1피트 내려갈 때 생기는 역학적 에너지로 물 1파운드(453그램)를 화씨 1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클라우지우스와 엔트로피 개념의 출현


1834년 철도 공학자였던 에밀 클라페롱(Emile Clapeyron, 1799­1864)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카르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다시 정리해서 물리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카르노의 열기관 효율에 관한 이론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47년 6월 훗날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던 줄을 만났다. 이 때 톰슨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입증하려는 줄의 실험에 대한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줄의 발표를 들은 뒤 톰슨은 칼로릭 이론을 사용한 카르노의 법칙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르노와 클라페롱의 견해에 의하면 칼로릭이라는 열 입자는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떨어지면서 일을 할 때 칼로릭의 양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은 열과 일이 같은 종류의 양이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는 칼로릭 양에 변화가 생겨야만 하고 따라서 이 두 주장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톰슨은 카르노 법칙과 줄의 법칙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1854년 열에 관한 동역학적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1850년 당시 베를린의 공병 및 공업학교 교수였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의 동력에 관해서'(Ueber die bewegende Kraft der Wrme)라는 논문에서 카르노의 원리와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열효율은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카르노의 원리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부합되게 하기 위해서는 열에서 일이 나올 때는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열은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고, 외부의 일의 작용이 없이는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올릴 수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초보적인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나타낼 수 있었다. 

1851년 톰슨은 '열의 동력학적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Heat)라는 논문에서 한편으로는 클라우지우스의 우선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카르노의 이론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 즉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톰슨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스스로 옮겨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열은 낭비(dissipation)가 되기 때문에 일단 일이 열로 바뀐 뒤에는 그 열이 모두 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이렇게 열이 낭비되는 과정을 비가역적(irreversible) 과정이라고 말하고 "현재의 물질 세계는 역학적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반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클라우지우스는 1857년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운동에 관해서'(Ueber die Art der Bewegung, welcher wir Wrme nennen)이라는 글에서 기체에 대한 운동학적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클라우지우스는 분자를 당구공으로 간주할 뿐만이 아니라 병진 운동, 회전 운동, 진동 운동 등 복잡한 분자 운동을 고려하여 기체 운동을 다루었다. 클라우지우스의 이 논문은 19세기 기체 분자 운동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850년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정성적인 논의를 제기한 이후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의 결과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물리량을 정의하게 되었다. 

1865년 클라우지우스는 


라는 방정식(S는 엔트로피, T는 온도, Q는 열의 양)을 기술하면서 엔트로피(entropy)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때 그는 열 현상을 지배하는 두 개의 일반적 법칙을 제안했다. 우선 그 하나는 열역학 제1법칙으로 '우주의 에너지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 다. 

다음으로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당시에 클라우지우스가 수학적으로 전개한 엔트로피 개념은 에너지 개념에 비해 직접적으로 이해되기 힘든 것이었고, 또한 개념 자체도 모호한 점이 많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과 맥스웰의 악령


한편 열역학은 대개의 경우 수많은 입자로 구성된 계를 다루기 때문에 통계적인 취급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등장하게 되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맥스웰(James C. Maxwell, 1831­1879)이었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맥스웰은 애덤스 상(Adams Prize) 문제인 토성 띠의 역학적 체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많은 물체에 대한 상호작용을 다루었고, 이 과정에서 역학에 대한 통계적 취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맥스웰은 1859년부터 많은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체 동력학의 문제를 다루면서 열역학의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주로 속도의 분포에 관한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1866년과 1868년에 발표한 '기체의 동력학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Gases)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분자들의 속도 분포가 최소 제곱(Least Square) 이론에서 관찰 오차의 분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형태를 띤다고 간주하고,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도 등과 관련된 여러 열역학적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었다. 

기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취급하였지만, 맥스웰 자신이 결정론을 포기하고 비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1867년 맥스웰은 피터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일 톰슨에 의해 '맥스웰의 악령'(Maxwell's Demon)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별 분자의 운동을 탐지하고 이에 반응할 수 있는 가설적인 지적 존재, 말하자면 맥스웰의 악령이 있다면 열역학 제2법칙이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맥스웰은 열역학 제2법칙이 자연계에서 절대적인 법칙이 될 수 없고, 단지 통계적인 확실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 가상적인 장치를 고안했다. 탐지 능력 자체에는 정보가 들어 있고 따라서 악령의 행위 자체가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있기 때문에 정보 자체도 엔트로피와 관련이 된다. 하지만 맥스웰이 이 문제를 제기했던 당시에는 이런 이해가 없었고, 따라서 맥스웰 악령 이야기는 정보 엔트로피 개념이 분명하게 확립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볼츠만 통계역학의 출현


맥스웰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한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통계역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볼츠만은 1866년 빈 대학의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 밑에서 기체 운동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볼츠만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역마살'이 아주 강하게 낀 사람으로 기질상 어느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25세의 나이로 그라츠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된 볼츠만은 그 뒤 그라츠(1869­73; 1876­79), 빈(1873­76; 1894­1900; 1902­06), 뮌헨(1889­93), 라이프치히(1900­02) 등 아주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학 및 물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렇게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볼츠만은 기체 운동론에 대한 자신의 연구만은 항상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볼츠만이 맥스웰의 기체 운동론을 처음으로 접한 증거는 1868년에 출판한 열평형에 관한 논문에서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맥스웰이 논의한 분자의 속도 분포에 관한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 오늘날 우리가 맥스웰-볼츠만 속도 분포함수이라고 부르는 식과 모든 통계역학의 계산에서 기본이 되는 '볼츠만 인수'를 얻어냈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가는 과정도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평형 상태의 분포 법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스웰의 작업을 더욱 확장시키려던 볼츠만은 수송 방정식(transport equation)으로 알려지게 되는 보다 일반적인 해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열역학적 엔트로피를 분자 짜임새(configuration)의 통계적 분포와 연결시켜 엔트로피의 증가가 분자 수준의 무질서도 증가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열역학 제2법칙을 해석하는 것으로 '볼츠만의 최소 정리' 혹은 '볼츠만의 H-정리'로 알려지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법칙을 역학의 법칙과 확률의 방법을 사용해서 유도해 낸 것이었다. 

 

H-정리를 둘러싼 논쟁들


1872년 볼츠만은 기체 분자가 열 평형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체 내의 일반적인 수송 과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기체 운동론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업적 중에 하나인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일반적인 수송 방정식으로부터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볼츠만의 수송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해를 구하는 것은 특별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 볼츠만은 비평형 상태에서도 엔트로피의 정의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볼츠만의 H-함수에 관한 논의도 전개했다. 1872년 논문에서는 H-함수는 E-함수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1890년대에 와서 E는 H로 표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리하여 비평형 상태에서 H-함수는 항상 감소한다는 볼츠만의 H-정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H-정리로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적인 처리가 어느 정도 해결한 듯이 보였으나, 1876년 빈 대학에서 볼츠만과 함께 연구하던 요제프 로슈미트(Joseph Loschmitt, 1821­1895)가 볼츠만의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슈미트는 가역적인 뉴턴 역학의 법칙으로는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유도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뉴턴 역학으로 비가역적인 열역학 제2법칙을 유도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윌리엄 톰슨에 의해서도 지적된 사항이었다. 

로슈미트의 반론에 대해 볼츠만은 처음에는 실제 세계 내에서 과정의 비가역성은 운동 방정식이나 분자 사이의 힘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조건의 문제 때문에 야기된다고 대응했다. 로슈미트와의 논쟁을 통해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률적인 것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1877년 볼츠만은 열역학 제 2법칙과 열 평형 상태에 관한 확률 계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통계역학의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엔트로피와 확률 사이의 관계인 S=k log W라는 유명한 관계식에 해당되는 식을 확률 방법을 써서 유도했다. 여기서 W는 체계의 주어진 거시 상태에 상응하는 미시상태의 가능한 분자의 배열수이고, S는 엔트로피를 말하며, k는 볼츠만 상수이다. 

1890년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 ­1912)는 삼체 문제를 다루는 현상 논문에서 일정한 전체 에너지를 갖고 유한한 부피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한된 임의의 역학 체계는 종국적으로 특정한 초기 짜임새로 되돌아온다는 정리를 발표했다. 영원 회귀의 원리는 이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예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적도 있었다. 이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무한정 증가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초기 값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회귀 정리를 볼츠만의 통계역학에 적용할 경우 볼츠만의 H-정리는 항상 유효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1895년 12월 베를린의 젊은 수학자로서 당시 플랑크의 학생이었던 체를레모(Ernst Zerlemo, 1871­1953)는 이 회귀 정리를 이용하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역학 모형을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이 경험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면 결정론적인 역학적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를레모의 주장은 1896년 『물리학 연보』에 발표되었고, 이어 볼츠만과 체르레모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명한 것이지만, 제를레모는 그것을 열 이론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신의 H-정리에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완전히 조화될 수 있으며,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 평형 상태는 단일한 짜임새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가능한 짜임새의 집단이다. 특정한 초기 상태가 회귀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나타나는 하나의 요동으로서 이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하는 자신의 H-정리의 유효성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최후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기체론 강론』(Vorlesungen ber Gastheorie)을 출판하면서 기체 운동 이론을 포함한 통계물리학의 일반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볼츠만의 통계 역학이 수용되는 과정은 현대 양자론이 등장하는 과정과 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새로운 복사이론을 제기하면서 볼츠만의 논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그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서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실재를 부정하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와 그의 추종자들은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원자론에 대해 계속 끈질기게 비판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볼츠만은 심각한 학문적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06년 여름 볼츠만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으며 아드리아 해 북동부에 위치한 트리에스테 근처의 아름다운 두이노 만으로 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해 9월 5일 볼츠만은 갑자기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볼츠만이 자살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룩한 평생의 업적이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이 그로하여금 자살로까지 이르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볼츠만이 세상을 떠난 때를 전후에서 브라운 운동과 같은 요동 현상에 관한 분자 운동에 관한 비평형 통계 이론이 1905년 독일의 아인슈타인, 1906년 폴란드의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Marian von Smoluchowski, 1872­1917)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1908년 경 프랑스의 장 페랭(Jean Perrin, 1870­1942)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의 이론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여 원자의 실재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와 아울러 1905년 이후 흑체복사 이론과 연관된 양자론이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수용되어 갔으며, 핵 및 원자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등장했다. 이처럼 볼츠만의 사망을 전후해서 볼츠만이 이룩한 통계역학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 고 문 헌


[1] J. C. Maxwell, Phil. Mag. 32, 390- 393 (1866); Phil. Mag. 35, 129-145, 185-217 (1868).
[2] L. Boltzmann, Wiener Berichte 66, 275-370 (1872).
[3] L. Boltzmann, Wiener Berichte 76, 373-435 (1877).
[4] L. Boltzmann, Vorlesungen ber Gastheorie (Leipzig, 1896-1898).
[5] W. E. Knowles Middleton, A History of the Thermometer and its Use in Meteorology (Baltimore, 1964).
[6] Stephen G. Brush, The Kind of Motion We Call Heat (Amsterdam: North- Holland, 1976).
[7]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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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