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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1930년대는 인류가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은 중성자를 발견했으며, 프랑스 파리의 졸리오-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하는 데 성공하여 방사성 추적자법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로마의 페르미 연구팀은 중성자를 이용해서 수많은 원소의 핵변환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938년 말에는 독일 베를린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에 의해 우라늄 핵분열이 발견되어 인류는 바야흐로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성자 발견


인류로 하여금 핵변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핵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32년 채드윅에 의한 중성자의 발견이었다. 1930년 독일 베를린의 제국물리기술 연구소에서 일하던 발터 보테(Walter Wilhelm Georg Bothe, 1891­1957)와 벡커(H. Becker)는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를 베릴륨에 쏘았을 때, 다른 원소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감마선'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프랑스에서도 퀴리 부인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Irne Joliot-Curie, 1926년까지 Irne Curie, 1897­1956)와 그의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퀴리(Frdric Joliot-Curie, 1926년까지 Jean-Frdric Joliot, 1900­1958)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이 강력한 감마선으로 실험하던 중 역시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파라핀, 물, 셀로판 등과 같이 수소를 포함한 물질을 알루미늄 창 앞에 삽입시키고, 여기에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이 경우에 이온화 상자로 측정한 이온화의 강도는 통상의 감마선처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들은 이것이 수소 함유 물질에서 나오는 양성자 때문이라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만약 이 현상을 감마선에 의해서 나타나는 컴프턴 효과에 의해서 양성자가 튀어나온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 감마선은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와 작용 단면적(cross section)을 가져야만 했다. 이 놀라운 현상은 이렌 퀴리가 1931년 12월 28월 과학아카데미의 주례 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했으며, 1932년 1월 18일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더욱 자세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문은 파리의 과학아카데미 논문집인 『콩트 랑뒤』(Comptes Rendus)에 실려 이것이 1월말에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퀴리의 첫 번째 논문이 나오고 이어 두 번째 논문이 나오는 사이에 케임브리지에서는 채드윅의 지도 아래 보테와 벡커가 관찰한 현상에 해당하는 실험을 2년간 계속하던 웹스터(H.C. Webster)가 왕립학회지에 자신의 실험 결과를 기고했다. 웹스터는 자신의 실험에서 아주 수수께끼와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즉 알파 입자의 빔이 베릴륨 표적 위에 쏘아질 때 알파 입자의 입사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이 반대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에 비해 훨씬 투과력이 강했다. 만약 이 방사선이 감마선이라면 이것은 이해하기 아주 힘든 현상이었다. 

채드윅은 웹스터의 지도 교수로서 자신의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 주목하는 한편, 파리에서 전해오는 소식도 면밀히 검토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 러더퍼드의 베이커 강연의 영향을 받아 핵 내부에 중성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또한 채드윅은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으로부터 양질의 폴로늄을 얻을 수 있었으며, 1920년대를 통해 발전한 새로운 전자공학적 실험 기법과 정교한 계수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1932년 2월 17일 채드윅은 '중성자의 가능한 존재'(Possible existence of a neutr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이것은 열흘 뒤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서 채드윅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매우 강력한 '감마선'이 감마선이 아니라 수소원자와 질량이 비슷하고 중성을 띤 새로운 입자인 '중성자'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이 복사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채드윅의 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추론에 의해 여기에는 감마선과 아울러 새로운 소립자인 중성자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인공방사선 원소의 발견과 방사선 추적자법의 발전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고, 곧이어 우주선에서 양전자가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핵과 관련된 현상을 더욱 분명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성자 발견의 근처까지 갔었던 파리의 졸리오-퀴리 연구팀도 이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1934년 방사성 원소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3년 졸리오-퀴리 팀은 가벼운 원자들에 알파 입자를 쏘면 양전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 성과를 그 해 10월에 열린 솔베이 회의에서 보고했다. 이 실험을 계속하던 중 파리 라듐 연구소의 졸리오-퀴리 팀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폴로늄 시료 위에 알루미늄 판막을 갖다 놓으면, 시료를 제거하여도 양전자의 방출이 급격히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알루미늄 판막이 방사성을 띠면서 마치 통상의 방사성 물질처럼 지수적으로 방사선 붕괴의 방출이 감소하였다. 이런 현상은 보론과 마그네슘과 같은 가벼운 원소에서 발견되었는데, 반감기가 보른은 14분, 마그네슘 2분 30초, 알루미늄은 3분 15초였다. 결국 졸리오-퀴리 팀은 이 실험에서 질소, 규소, 인의 동위원소에 해당하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1934년 2월 10일 『네이처』지에 출판되었는데, 다음 해 졸리오-퀴리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합성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인공 방사성의 합성 성공은 무엇보다도 과학 연구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는 방사선 추적자법의 보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미 1913년 헝가리 태생의 과학자 에베시(Gyrgy Hevesy, 1885­1966)는 납의 동위원소인 라듐D가 보통의 납과 화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라듐D를 보통의 납과 섞어서 방사성을 추적하는 '방사성 지시자'(radioactive indicator)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오늘날은 '방사성 추적자'(radioactive tracer)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하지만 당시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그리 많지 않아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31년부터 사이클로트론을 비롯해서 여러 입자 가속 장치가 고안되었고, 1932년 채드윅에 의해서 발견된 중성자를 이용해 보다 용이하게 새로운 원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인공 방사성 원소의 합성에 성공하면서 방사성 추적자 방법은 물성 과학은 물론, 생명 과학, 생태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중요한 연구 수단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


한편 영국의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이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을 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쉽게 원자핵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핵을 쉽게 변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과학자들에게 이 중성자는 아주 유용한 연구수단이 되었다. 1930년대에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 원자핵이 변환되는 것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 가운데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한 것은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었다. 그들은 1938년 말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바륨이 생성되고, 여기서 두세 개의 중성자가 나와서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을 연구하고 있던 여러 연구팀 가운데 왜 하필이면 베를린의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당시 우라늄의 핵변환을 연구하던 팀 가운데에는 베를린 팀 이외에도 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연구팀이 많았다. 우선 졸리오-퀴리 팀은 1934년 붕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에 폴로늄에서 나오는 강력한 알파선을 충돌시켜, 최초로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실험을 본 로마의 페르미는 졸리오-퀴리가 사용한 고에너지 알파입자 대신에 채드윅이 발견한 느린 중성자로 인공적으로 원소 변환시켜 방사성 물질을 만들려는 착상을 했다. 결국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와 아말디(E. Amaldi), 다고스티노(O. D'Agostino), 라세티(F. Rasetti), 세그레(Emilio Gino Segr, 1905­1989) 등으로 구성된 로마의 연구팀은 1934년 중성자를 쏘아서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때 이들은 수많은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서 원소변환을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우라늄에도 중성자를 쏘아서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초우라늄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파리 팀도 1934년부터는 우라늄과 토륨에 중성자를 쏘아 핵의 변환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다. 

 

학제간 연구조직의 중요성


우선 베를린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가장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 팀의 특이했던 연구조직을 들 수 있다. 당시 파리의 이렌 퀴리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과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 연구팀은 주로 물리학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반면에 베를린의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슈트라스만 연구팀은 물리학자와 화학자들로 구성된 완벽한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팀이었다. 

우선 팀장인 오토 한은 유기화학자 출신으로 핵 현상을 연구한 경험이 있었던 방사화학자였다. 1897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간 오토 한은 대학 당시에는 주로 맥주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공부에는 그다지 뜻이 없던 학생이었다. 1901년 박사학위를 한 뒤 그는 병역을 마친 뒤 1904년 9월 자비로 영국으로 건너가 비활성 기체의 연구로 유명한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 1852­1916) 연구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램지는 방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한에게 100 그램의 바륨염을 주면서 마리 퀴리의 방법을 이용해서 라듐을 추출하라고 부탁했다. 방사화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 오토 한은 이것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다가 운이 좋게도 방사토륨(radiothorium)을 발견했다. 

뜻밖의 중대한 발견을 한 오토 한은 유기화학보다는 방사화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보다 넓은 경험을 쌓기 위해 1905년 9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 있던 러더퍼드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그는 방사악티늄을 발견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1906년 가을 오토 한은 베를린의 에밀 피셔(Emil Fisher, 1852­1919)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도 메조토륨(mesothorium)을 분리해내는 등 방사화학 분야에서 계속 좋은 연구 업적을 냈다. 1910년에 베를린 대학 화학과 교수가 된 그는 이곳에 있던 루벤스, 네른스트, 제임스 프랑크, 막스 폰 라우에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물리학자 가운데 오토 한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그와 평생을 같이 연구했던 리제 마이트너였다. 물리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당시 독일에서는 드물었던 여성과학자였는데, 한과는 이미 1907년부터 함께 연구를 했었다. 

1912년 말 베를린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가 설립되자 오토 한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줄곧 이 연구소에서 방사성 분과를 이끌었다.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가 설립되자 리제 마이트너도 처음에는 한의 연구실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917년부터는 자신의 연구실을 얻어서 한과 계속 공동연구를 했다. 화학자 오토 한과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의 오랜 공동 연구의 성과는 우라늄 핵분열 발견으로 나타나게 된다. 

페르미 팀과 졸리오-퀴리 팀의 작업을 검토한 뒤 1934년 가을 중성자를 이용해서 우라늄을 변환시키는 실험을 한에게 제안했던 것은 물리학자였던 마이트너였다. 한과 마이트너는 핵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원소를 분석할 전문적인 분석화학자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슈트라스만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과학자들의 협동적 연구가 베를린 팀이 우라늄을 발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파리 팀과 로마 팀에는 우수한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라듐과 바륨이 원소의 주기율표상에서 같은 2A족에 속해서 그것들의 화학적 성질이 비슷했다는 것도 이 연구에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기율표상에서 2번째 세로축에 해당하는 제 2A족 원소들은 원자주위를 돌고 있는 최외각 전자들이 모두 2개씩이어서 다른 물질과 화학결합을 할 때 비슷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유사한 화학적 성질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아주 꼼꼼한 분석화학자가 아니고서는 이것을 구별해내기가 대단히 힘이 들었다. 1930년대까지 과학자들이 얻은 원자변환 지식에 따르면, 원자번호가 92번인 우라늄은 자연붕괴를 하여 알파선과 베타선을 방출하면서 당시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커다란 초우라늄 원소로 변환되거나, 혹은 원자번호 91번인 프로탁티늄, 90번인 토륨, 89번인 악티늄, 88번인 라듐 등과 같은 여러 원소로 변하다가 마침내는 안정한 납으로 되어 방사성 원소로서의 일생을 마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자핵에 변환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작은 범위에서 일어나지 우라늄이 절반으로 쪼개져서 원자번호가 56번인 바륨으로 변화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얻어낸 생성물 속에는 분명히 바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한편 1937년 파리 라듐 연구소의 이렌 퀴리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공동연구자인 사비치(Paul Savitch)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3.5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 이렌 퀴리와 사비치는 애초에 그것을 원자번호 90번인 토륨의 동위원소라고 생각했다. 베를린 팀은 이 토륨의 동위원소를 찾으려고 했으나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정적인 결과를 파리 팀에게 알렸는데, 이후 계속된 실험에서 파리 팀은 이번에는 그것이 원자번호 89번인 악티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던 파리 팀은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바로 이 3.5 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오토 한, 마이트너, 슈트라스만으로 구성된 베를린 연구팀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했던 것이다. 

 

베를린 팀의 승리


1938년 7월 중순 외국인 신분이었던 마이트너가 나치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베를린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이상적이던 베를린 연구팀이 깨어졌다. 이제는 마이트너가 빠진 상태에서 방사화학자 오토 한과 분석화학자 슈트라스만이 그들이 하던 연구를 계속해야만 했다. 베를린 팀의 분석화학자였던 슈트라스만은 기존의 핵 물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 없이 오직 생성물의 화학조성을 분석화학 방법으로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마이트너의 추측대로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만든 생성물에서 라듐을 찾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실험을 하면 할수록 자꾸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이 라듐이 바륨과 같이 행동한다는 느낌이 분석화학자인 그에게 와 닿았다. 물리학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바륨이 분석화학자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슈트라스만의 이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과 슈트라스만은 함께 '화학자의 입장'에서 실험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반복했다. 이 실험을 행한 다음 주 월요일인 1938년 12월 19일 그들은 마이트너에게 놀라운 결과를 전하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라듐 동위원소가 라듐처럼 행동하지 않고, 바륨처럼 행동한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마침내 마이트너가 떠난 지 불과 5개월 뒤인 1938년 12월 베를린 팀은 중성자의 충돌에 의한 우라늄 핵변환의 생성물이 바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라늄은 약간 작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일단 우라늄이 중성자에 의해 분열된다는 착상이 확인된 뒤에는 나머지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으며, 마이트너와 그의 조카인 오토 프리시(Otto Robert Frisch, 1904­1979)의 해석에 힘입어 거의 순식간에 대략의 우라늄 분열 메커니즘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우라늄은 바륨과 크립톤으로 분열된 뒤 두세 개의 중성자를 방출하고, 또한 심한 질량 결손에 의해서 막대한 에너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원자탄의 기본 원리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현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우라늄 핵분열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인 핵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핵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석화학자에 의해 그 발견의 실마리가 잡혔던 것이다. 

페르미 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는 연구조직의 차이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과학외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페르미 팀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서 사분오열되어 연구에 단절이 생겼다. 1938년 파시스트 인종법안은 페르미 처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1938년 12월 페르미는 중성자를 사용해서 방사성 물질을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에 갔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그냥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핵분열의 발견과 핵에너지 시대의 진입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에 의한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으로 우리 인류는 새로운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1933년 핵물리학자인 러더퍼드는 우리 시대에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요원하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이렇듯이 1939년 봄까지도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이나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1938년 말에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핵분열의 산물인 바륨을 발견하고, 다음해 1월 6일 이것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돌변했다. 우라늄 핵분열 소식은 발견되자마자 급속히 퍼지면서 과학자들은 곧바로 이와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한과 오랫동안 함께 연구했다가, 우라늄 핵분열 발견 직전에 독일을 떠나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던 리제 마이트너는 한에게 핵분열 발견 소식을 듣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그녀를 방문한 오토 프리시와 함께 1월 16일에 공동으로 이에 관련된 글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머물고 있던 보어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1월 20일에 역시 『네이처』지에 핵분열과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불과 한 달도 안된 사이에 핵분열 소식은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돈 셈이었다.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척되면서 우라늄235 외에도 자연에 보다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라늄 238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핵 물질이 미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40년 5월 버클리 대학의 맥밀런(Edwin M. McMillan, 1907­1991)과 에이블슨(Philip M. Abelson)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원자번호 93의 넵튜늄을 발견했고, 이어서 1941년 2월 버클리의 젊은 화학자인 시보그(Glenn T. Seaborg, 1912­1999)는 세그레와 함께 연구하여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세그레와 시보그가 1941년 5월 느린 중성자에 의한 플루토늄의 단면적이 우라늄 235의 1.7배라는 사실을 계산해내면서 플루토늄은 주요 핵연료로 부상되었다. 

핵분열과 새로운 핵연료의 발견에 따라 핵에너지의 산업적, 군사적 응용 가능성이 급속도로 현실화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페르미는 1942년 역사상 최초로 원자로를 건설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에 의해서 1945년 원자탄은 제조되었다. 원자탄은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된 지 겨우 6년만의 일이다. 

1945년 오토 한은 독일 핵 개발에 관한 전후 조사 때문에 영국으로 잡혀가 억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인 1945년 7월 3일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전쟁 중에 독일이 어느 정도까지 핵 개발을 진행시켰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 발터 보테, 카를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cker), 오토 한 등 핵 개발과 관련된 핵심적인 과학자들을 독일에서 납치하여 케임브리지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한 농가에 억류해 놓았다. 알소스 특명(Alsos Mission)으로 이름 붙여진 이 군사 활동을 통해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독일 과학자들을 외부와 차단시켜 놓고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 노벨상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억류된 과학자들을 풀려나게 하는 데에도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1945년 11월 16일 오토 한은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 그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던 슈트라스만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에서 1980년 생애를 마감했다. 

 

참 고 문 헌


[1] J. Chadwick, Nature 129, 312 (1932).
[2] J. Chadwick, "The Existence of a Neutron," Proc. Roy. Soc. London (1932), Vol. 136, pp. 692-708.
[3]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11-15 (1939).
[4]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89-95 (1939).
[5] John Hendry, Cambridge physics in the thirties (Bristol, Hilger, 1984).
[6] William R. Shea (ed.), Otto Hahn and the rise of nuclear physics (Dordrecht, Reidel, 1983).
[7] Fritz Krafft, Im Schatten der Sensation: Leben und Wirken von Fritz Straßmann (Weinheim, Verlag Chemie, 1981). 

다음 호 제목 가모프와 대폭발이론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