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 시기 (1938.4 - 1945.10)
  서울대학교 물리학부의 뿌리는 일제가 우리 땅에 설립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이공학부 물리학과”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경성제국대학은 1924년 5월 일본정부 칙령 제103호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때에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두었고, 이어 1938년 4월 일본정부 칙령 제251호에 의해 경성제대 안에 이공학부가 개설되었다. 이공학부 안에는 물리학과, 화학과,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의 7개 학과가 설치되었다. 이공학부의 부지는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 잡았고 16만평이 넘는 넓은 터에 제1, 2, 3, 4호관으로 호칭되는 대형 건물들을 교사로 건축하였다. 물리학과는 제1호관 중심부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여유 있게 자리를 잡았다.
  이리하여 물리학과는 설립 초기부터 최신의 시설기구를 완비하고 수준 높은 교육과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 4월에 이공학부에 진학할 대학예과의 이과 갑류(3년과정) 학생을 입학시켜 3년 후인 1941년 4월부터 이공학부의 강의가 시작되었는데 물리학과에는 한국인 정근(丁根)이 (예과가 아닌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별도 시험을 거쳐) 홀로 입학하였고, 1942년도에는 한국인 2명(金鍾喆, 李林學)과 일본인 1명(根本茂)이 입학하여 각각 1943년 9월(제1회)과 1944년 9월(제2회)에 졸업하였다.
  개학 1년반 후에는 물리학과에 음극선 회절장치, X선회절장치, 고성능 분광기 6대를 포함한 광학기구와 오실로스코프를 비롯한 각종 전자기 계기류가 잘 갖추어지는 등 모든 시설이 훌륭히 정비되어 물질구조학에 관한 이론 및 실험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제1회와 2회 졸업생은 졸업과 동시에 전원 조수로 임명되어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학생실험도 지도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당시 졸업반에 재학중이던 이용태(李容泰; 대학예과 수료생)는 제3회 졸업생으로 1945년 9월에 경성제대의 마지막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경성제대 이공학부 물리학과는 설립한 지 불과 7년여, 개학한 지 4년여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소중한 한국인 졸업생 4명(후에 이임학은 수학자가 되었지만)을 배출하고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로 승계되면서 장차 이 땅위에 물리학의 꽃을 피우기 위한 터전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뒤에 발생한 일들은 이를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잘 말해준다. 비극의 출발은 1945년 9월초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진주한 미국군이 이공학부의 전시설을 군(軍)병원으로 사용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김종철(한국과학사학회지 제23권 제2호, 180 - 204, 2001)의 회고에 의하면 물리학과의 정밀기기를 포함한 모든 실험기구가 이삿짐처럼 단 3일 동안에 인근에 있던 경성광산전문학교로 옮겨져 그 창고에 저장되는 운명을 맞았고 물리학과를 이어받을 수 있는 한국인 조수 2명(김종철, 전평수)도 연구실은커녕 모든 근거지를 잃은 나그네로 전락하였다. 경성제대는 간부 및 교수진이 전부 빠진 공백상태에 더하여 이공학부는 건물과 시설마저 잃은 비참한 종말을 고한 것이다. 1

경성대학 물리학과 시기 (1945.10.16 - 1946.8.21)
  일본정부의 무조건 항복에 의한 8·15 종전에 따라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군이 조선총독부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아 군정을 실시하고 군정청법령 제15호(1945.10.16)로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여 경성대학으로 개명(영어로는 Seoul University가 사용되었다)함으로써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가 발족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교수진도 교사(校舍)도 시설도 없는 상태에서 다만 한국인 조수 2명과 학생 1명(李興國)을 인계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정은 해방 후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면서 교육분야, 특히 공백상태에 빠진 경성대학을 위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경성대학이 당시 우리 땅 위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학(여타 고등교육기관은 전문학교였다)이었기에 그때까지 일본 등지의 대학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편입을 위해 찾아오고 또 공백이 된 교수진을 메우기 위해 이미 공부한 학사학위 이상 소지자들이 모여들어 그 기능의 회복을 모색해나갔다.
  그때까지 물리학을 전공한 한국인 이학사는 통틀어 손꼽을 정도였고 대학교수의 자격을 가진 이는 더욱 적었다. 경성제대가 3명의 이학사를 배출했으니 큰 역할을 한 셈이지만, 그 졸업생들(정근, 김종철, 이용태)이 물리학과를 주도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고 외부 물리학자의 영입이 절실한 현실이었다.
  국내에는 연희전문학교에 수물학과(數物學科)가 있어서 그 교수였던 최규남(崔奎南)이 물리학과의 재건을 주도할 적임자로 꼽혔는데, 그는 경성대학 초대 이공학부장으로 임명된 이태규(李泰圭, 일본 경도제대 교수)의 귀국이 지연되는 동안 이공학부장 대리로 임명되어 잠시 활동했지만 물리학과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국외에서 활동한 물리학자로는 만주의 신경공과대학(新京工科大學) 교수로 있었던 도상록(都相祿, 1932년 東京제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교 조수로 있다가 신경공대로 갔다)이 있었다. 그는 해방 후 일찍 귀국하여 자진 경성대학에 나와 물리학자들을 규합하면서 대학본부에 사무실을 차리고 물리학과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그래서 1945년 11월 미군정청 학무국은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및 조교수로 19명을 처음 임명하였는데 그 안에 물리학과의 교수로 도상록, 조교수로 전평수, 정근이 들어 있었다. (이공학부장 대리(Acting Dean)는 미국식으로는 교수(Faculty)가 아니어서인지 최규남은 교수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다.) 해방전 京都제대에서 연구하던 박철재는 귀국이 늦어져 뒤에 합세하게 된다. 이공학부 교수 발령과 같은 시기에 물리학자로서 한인석(연희전문학교 수물학과를 졸업하고 東北제대 물리학과 이학사)과 이용태(경성제대 물리학과 이학사)가 경성대학 예과 교수로 발령받았기에 이들도 경성대학 안의 물리학 분야를 재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1946년 7월 13일에 미 군정청 문교부(문교부장 유억겸)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하였다. 이 국대안은 경성대학을 모체로 하여 서울 근처에 있던 국공립전문학교 9개를 통합한 종합대학교 (university)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고 그 조직을 미국식으로 개편하자는 것이었다. 경성대학 물리학과를 주도해 왔던 교수들 대부분이 이 국대안 반대세력에 가담하여 교수직을 떠났는데, 국대안을 반대하고 자리를 떠난 도상록, 정근, 이용태 등은 그후 육이오전쟁을 전후해서 월북하였으며, 김일성대학, 과학원 등 이북의 물리학계에서 활동하였고 대학예과에 있던 한인석은 연희대학교(1948년에 대학으로 승격)교수로 옮겨가 있다가 역시 육이오전쟁 중에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다.
  이러한 교수들의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경성대학의 시대는 1946년 8월 21일로 막을 내리고 국립서울대학교로 이관되어 갔다. 결국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암중모색과 태동상태를 계속하다 그 전신인 경성제대 물리학과와 비슷한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의 태동기 (1946. 8 - 1950. 6)
  1946년 8월 21일 미군정청 문교부는 법령 102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고 동년 9월 2일에는 “국립서울대학교” (“국립”의 두 글자는 1949년 12월 3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법률 제86호 교육법에 의하여 삭제되었다)가 정식으로 문을 열고 개학하였다. 이로써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는 공식적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물리학과”로 승계되었다.
  초기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들은 교수발령상황표(1946 - 1948)와 같다.



  경성대학의 물리학과에 공식적은 아니지만 참여했었던 것으로 보이는 (윤세원 증언) 박철재가 새 물리학과의 주임을 맡았으며, 함께 발령을 받은 권녕대 부교수와 김종철 전임강사는 구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재직한 바 있다. 권녕대는 고향인 개성(38선 이남)에 사업과 학원운영 등의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1948년대까지 늦어졌고 한준택 전임강사는 주로 대학예과 강의를 맡으면서 학생실험을 주관하였다.
  1946년 9월에 시작된 1학기에 등록한 물리학과 학생으로는 3학년에 4인(김영록, 윤세원, 이기억, 조순탁), 2학년에 김영욱 외 6인이 있었으며 1학년에는 경성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입학한 이상수 외 4인(이들은 舊制로 학부 3년과정으로 졸업하여 3회 졸업생이 됨)과 1946년 8월에 학부 입학시험을 거쳐 입학한 강동권 외 7인(新制로 학부 4년과정, 4회 졸업생)이 있었다. (국대안 반대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미등록으로 한때 제명된 학생이 상당수 있었으나 1947년 6월에 원래의 학년으로 복교됨) 강의는 경성제국대학의 교과목에 준하여 개설되었으나 교수진이 역부족인데다 사회혼란의 영향 등으로 충실할 수가 없었다. 많은 경우 일본어 교과서를 구해 복사하여 학생들이 윤강(輪講)으로 공부해나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1947년에는 1학년 18명(대학예과 수료생 12명과 신입생 6명)을 맞이하였고, 최규남이 교수로 발령받았다. 1948년이 되자 대학예과의 마지막 수료생들이 대거 물리학과에 진학하였고 (1946년도 대학예과 입학생) 또 그해부터 졸업생을 낸 일반 중학교 졸업생(6년제)들도 입학시험을 거쳐 들어오게 됨으로써 물리학과는 총 80여명의 신입생을 맞이하여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48년도 2학기부터는 광학실험실(권녕대, 한준택)이 정비되고 원자스펙트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으며, 48년 10월에 발령받은 지창열 전임강사가 전자기학 과목을 강의하면서 전자기 실험실이 정비되었고, 김종철의 물성연구실험실도 가동되었다.
  졸업반 학생들은 이론연구실이나 실험실로 배당되어 졸업논문 준비를 위한 특수 연구과목(학기당 6학점)에 등록하고 소그룹 세미나가 진행되는 등 연구분위기도 점차 호전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교수진에도 큰 변동이 있었다. 최규남이 교무처장직을 내놓고 1948년 6월 문교부 과학교육국장으로 떠나갔고 이어 1949년 7월에는 박철재가 문교부 과학교육국 부국장으로 떠나갔다. 권녕대 부교수는 1948년 7월에 교수로 승진하여 동년 10월부터 문리과대학 이학부장의 보직을 받았고2, 1949년 3월에는 교수조무원으로서 강의를 맡아왔던 4명의 제1회 졸업생이 석사학위를 받은 후, 그중 3명(김영록, 이기억, 조순탁)이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고 윤세원은 연희대학교로 옮겨갔다. 또 제2회 졸업생 중에서 김영욱, 여철기가 교수조무원으로 남아 바로 강의를 맡기 시작하였다.
  교과과정은 경성제대 물리학과의 것에 준해 제정되었으나, 신제 학생(1946년도에 입시를 통하여 입학한 학생과 1947년도 이후의 입학생)은 졸업(이학사 학위)이수 학점으로 4년간 180학점을 취득하게 되었고 학기당 23학점까지 수강이 허용되었으므로 과목당 학점 수가 늘어나고 더욱 다양한 과목들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물리학과가 이제 막 제자리를 잡아가려 할 무렵 육이오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모든 것이 혼돈상태에 빠져들어 새로운 역사의 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육이오전쟁 중의 물리학과 (1950 - 1954)
  서울이 수복되었어도 전쟁은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화의 자국이 너무 심하였기 때문에 대학의 정상화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정부는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 전시연합대학을 개설하여 1950년 11월과 12월에 걸쳐 강좌를 개설하는 것으로 임시 대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정부는 부산으로 남하하였고 (1·4후퇴), 전시연합대학 역시 1951년 2월에 부산에서 속개되었으나 형식적일 뿐 알맹이 있는 교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부는 다시 1951년 5월 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을 반포하여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 전주, 대전에 전시연합대학을 세우고 모든 대학생들이 어느 곳에서나 공부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물리학과 학생들도 제각각 흩어져 학점을 취득하고 진학하게 되었다.
  교수들 또한 제각기 헤어져서 호구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0월까지 이학부장 보직을 가졌던 권녕대는 1950년 12월부터 근 2년 동안 진해의 해군사관학교 교관(해군대령으로 제대)으로 근무하였고, 조순탁 전임강사는 광주 전시연합대학에서 강의하며 보냈다. 1952년 5월에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면서 문리과대학이 부산 서대신동에 가교사(판자집)를 짓고 문을 열어 1952년과 53년도 입학생을 이 가교사에서 입학시켰다. (1953년도 입학생의 일부는 서울 분교 - 약대 자리 - 에서 입학) 이 무렵 그동안 연희대에 가 있던 윤세원이 1952년 9월에 전임강사로 복귀하였고, 1953년에 들어서는 김영록이 영국(버밍엄대), 이기억이 미국(플로리다 주립대)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으로서 외국유학의 문을 처음 열게 되었다. 몇 되지 않은 교수 중에서 두 명의 교수가 일시에 떠났다는 것은 큰 타격이라 할 수 있지만, 부산에서의 물리학과의 상태는 그러한 영향을 감지할 상황조차 되지 못했다. 이러한 피난살이 중에서도 한국물리학회가 1952년 12월에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있던 최규남의 주도 아래 그의 집무실에서 창립되었음은 한국 물리학계를 위해 뜻 깊은 일이며, 특히 서울대학교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일이다. 1953년 9월 정부 환도와 함께 서울대학교가 서울로 복귀하였고 물리학과도 부산의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 환도 후의 물리학과 (1954 - 1964)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정부와 함께 서울대가 환도하였으나 물리학과는 청량리의 교사와 시설이 9·28수복 전에 이미 폭격으로 소멸되었고 1·4 후퇴 이후에는 그곳이 피난민 판자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다시 1948년 이전과 같이 동숭동의 문리과대학 (문학부) 교정으로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전에 사용했던 구공업전문학교 실험실을 다시 사용할 수 있어서 부산 피난시절보다는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흩어져 있던 교수들도 속속 귀임하였다. 1953년 10월에 권녕대가 복귀하여 학과 주임을 다시 맡았고, 조순탁, 김종철과 윤세원이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954년도에는 신입생 30명을 모처럼 차분한 분위기에서 선발하여 입학시켰다.
  이미 부산에서 해외로 떠난 김영록, 이기억에 이어 1955년에는 김종철이 미국으로 이주, 아이오와대학교로 유학하였고, 또 같은 해에 지창열이 미 아르곤연구소로 떠났고 (2년 체류), 조순탁이 미시간대학교로 유학하였으며, 1957년에는 권녕대가 영국의 브리스톨대학으로 연구차 떠났다(1년체류). 또 윤세원은 1955년부터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시작한 원자력 평화이용 사업에 관여하여 자주 외국에 나가야 했고 1956년부터는 문교부에서 새로 생긴 원자력과장을 겸직하여 활동하다가 1957년 10월에는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이리하여 물리학과의 강의는 주로 시간강사와 대학원생들에 의해 진행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7년 9월에 석사학위를 받고 우주선 실험실에 있던 이주천이 전임강사로 임명되어 물리학과의 유일한 전임 교직원으로 학과를 지키게 되었고 사실상의 학과주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58년 10월에는 조순탁(부재중에 조교수에서 부교수 승진)이 미시간대학에서 통계역학에 관한 훌륭한 업적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바로 귀국하여 과에 모처럼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미국의 대학원 교육에 대해 생생하게 소개하고 최신의 학문동향을 직접 국내에 전달하여 준 첫번째 이학박사 학위 소지 교수였던 것이다. 실험분야의 교육에서도 1957년 2월에 윤세원(원자력과장 겸임중)의 지도 아래 활발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4학년 학생들이 졸업실험의 일환으로 전자석을 제작하고 나아가 핵자기공명장치를 한국최초로 제작하여 물속에 있는 양성자의 핵자기공명을 관찰하는 데 성공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대학원생들(이문종, 조성호, 권숙일)이 조순탁, 이주천의 지도를 받아 싸이클로트론을 제작하여 양성자를 1.5MeV로 가속시키는 데 성공하는 큰 개가를 올렸다. 이 일련의 실험장치들이 선진국에서와는 달리 극히 질박한 소재들 (청계천시장의 물건들)을 써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공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은 이른바 미네소타 프로젝트라고 하는 미국정부(AID)의 원조를 받고 있었지만 문리과대학 이학부는 여기에서나마 제외되어 물리학과는 전쟁으로 파손 소멸된 실험(연구용 포함)기구를 보충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UNKRA(UN한국부흥처)의 원조로 X선회절장치와 방사선 측정장치가 도입되어 일부 보충된 것이 다행이었다.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여 과내에서는 권녕대의 주도 아래 우주선 측정과 원자핵 건판의 관측이 진행되었고, 1956년 8월 여름방학에는 학생들이 제주도 한라산 산정에 올라가 우주선을 관측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그후에도 우주선 관측은 국제지구물리학 관측(IGY, IQSY)의 일환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겼고 권녕대는 이들 업적으로 1961년에 서울대학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한편 교수진의 부족으로 여전히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1953년 부산 피난시절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영록 전임강사(당시)가 버밍엄대학에서 이론물리학 전공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보어연구소(코펜하겐) 등지에서 연구를 하다 1959년초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한 학기를 강의하다가 원자력연구소 이론연구부장으로 옮겨갔다. 1959년에는 조순탁이 서울대 교무부처장을 2년간 역임했고 다시 1962년 4월부터는 문리대 이학부장의 보직을 맡아 과의 일에 힘을 기울이기 어려웠다. 1960년 4월에는 영국 퀸즈메리대학(런던대학교)에서 실험 핵물리학 전공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동녕이 조교수로 부임하였고, 1960년 11월에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강우형이 전임강사로 임명되어 교수진을 보강하였다. 이동녕은 동숭동에서 강의를 끝내면 바로 신공덕에 있는 원자력연구소의 실험실로 가서 중수소 가속장치를 제작하는 등 연구를 하면서 실험 전공의 대학원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또한 이 역할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1964년 1월에 미국 캐톨릭대학교로 옮겨가면서 사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1962년 7월에는 그동안 학생들과 젊음을 나누며 애써오던 이주천이 유학차 미국으로 떠나갔다. 그런데, 1964년 8월에는 조순탁마저 새로 설립된 서강대학으로 옮겨감으로써 물리학과는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64년 7월에 이르러 그 무렵까지 줄곧 학과주임을 맡아왔던 권녕대가 문리과대학장이 되자, 지창열이 학과 주임을 맡으면서 과에 홀로 남게 되었다. 공석이 많을수록 남아 있는 교수들의 책임과 부담이 늘어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시의 물리학과는 유능한 교수를 초치하거나 붙들어두기에 퍽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 이 해 (1964년) 공과대학에서는 응용물리학과가 신설 발족하였는데, 공대에 소속되어 있던 박봉열(원자력공학과), 민광식(응용물리학과) 등이 출강하여 문리대 쪽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리대 물리학과의 정비기 (1965 - 1970)
  한편 조순탁은 서울대를 떠나기 일년 전부터 자기 후임을 물색하던 중 미국 네브래스카대학교에서 박사(핵이론) 학위를 받고 노스다코다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있던 고윤석에 교섭한 결과 고윤석은 1964년 9월에 귀국하여 전임자가 맡아왔던 강의(18시간)를 이어받았으며, 이듬해인 1965년 5월에 조교수 발령을 받았다. 또한 미국 유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시카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권숙일이 1966년 9월 전임강사로 부임함으로써 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와는 별도로 물리학과 제2회 졸업생인 김철수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유체역학)를 받은 후 귀국하여 1960년 2월에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 조교수로 발령받았는데, 물리학과 강의도 담당하고 대학원생들을 지도하며 교수로서는 홀로 청량리에 나가 물리학과 실험실에서 충격파관(Shock Wave Tube)을 만드는 등, 연구에 열중하다가 1963년에는 미국 캐톨릭대학교에 초청되어 2년간 연구하고 훌륭한 업적을 내고 귀임하였다. 그의 소속을 물리학과로 옮기는 일이 일찍부터 논의되었으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래 끌다가 1967년 9월에 마침내 물리학과로 전속되었다. 전속되기 이전에 그의 유체역학 및 자기유체역학(MHD) 연구실에서는 7명의 석사학위와 1명의 박사과정 수료생(김직현, 박사학위는 1969년 2월에 수여)을 배출하고 있었다.
  이제 교수진 5명으로 짜여진 물리학과는 교수 증원에 노력하며 적임자를 찾고 있던 중, 마침 13회 졸업생 이구철(미국 워싱턴대학교 이학박사 - 통계물리)이 일시 방문차 귀국하였다. 교수들은 그의 세미나가 끝난 후 그를 유치하기로 합의하고 그에게 적극 권유하여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교의 연구원(Research Associate) 임기를 마치고 부임하기로 약속받았고, 그는 마침내 1970년 5월에 귀국하여 조교수 발령을 받았다. 교수들은 바로 부임해온 신임교수에게 문교부 연구비를 선뜻 제공하기로 했다. 또 강의 부담에 있어서는 그 이전까지는 젊은 신임교수가 으레 많은 강의를 맡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것을 깨고 신임교수의 정착을 돕고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조금이라도 마련해주기 위해 기존의 교수들이 호의적인 배려를 한 것이었다. 이러한 약속은 그대로 이행되었고 그는 이후 조순탁이 남기고 떠난 통계물리 분야를 이끌어나가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젊고 유능한 교수가 늘어나면서 학과를 육성하려는 욕망과 열의가 고조되었고 개선의 노력이 더해졌다. 교수들은 첫째로 충실한 강의로서 세계 일류대학에 손색없는 물리학 교육을 제공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교수들 자신이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자기의 모교를 방문, 물리학의 밝은 미래를 설명하는 일 등의 대외활동도 주효하여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물리학과에 영재들이 대거 입학하여 왔다. 강의의 활성화를 위해서 교수의 담당과목을 2, 3년마다 교체하기로 교수회의에서 결의하였다. 교수들은 교과과정의 정비에도 착수하였다. 고윤석(위원장), 권숙일, 이구철, 3인의 교수로 교과과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물리학과 학부과정의 교과목을 점검 정비하고 과목들 간의 연계를 중시하면서 각 과목의 교과내용(Syllabus)을 세밀히 작성하였다. 교과내용을 결정하기 전에 위원회는 대학원과 상급학년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수집분석하기도 하여 물리학과의 교육목표를 설정하였다. 물리학과의 학생 대부분(80% 이상)은 장차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직 또는 교수직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졸업생 진출의 추세도 동일하였다) 세계일류를 내세우는 어느 대학원 과정에도 충분히 연계될 수 있는 튼튼한 기초교육을 위한 교과과정과 교과목 내용을 마련하도록 노력하였다.

물리학과와 서울대 종합화 계획 (1970 - 1975)
  1970년대에 들어 문리대 물리학과는 대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권녕대가 1973년 8월에 정년을 맞이하여 퇴임하게 되었다. 그는 서울대학교의 발족 이래 물리학과를 떠나지 아니하고 다사다난한 학과의 선임교수의 자리를 지켜 인재양성에 진력하고 우주선 실험연구로 업적을 내면서 한국물리학회, UNESCO, IUGG 등의 대외활동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가 퇴임함에 따라 물리학과는 교수진의 보강, 특히 고체물리 분야 교수의 충원을 서둘렀고, 이 시기에 마침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 대학의 조교수로 재직 중인 우종천이 일시 귀국하였다가 채용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 서울대학교의 종합화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새 캠퍼스의 물색을 정부 요로와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 4월에는 그 추진을 위해 “서울대학교 종합계획위원회”가 발족하였고 김철수가 그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 1970년 5월에는 공식적으로 발족한 종합화계획위원회 산하의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에 권숙일이 그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하였다. 이어 1970년 12월에는 김철수가 서울대 교무처장으로 보직을 맡아 1975년에 단행될 종합화를 추진하는 주역을 담당했다. 그중에도 가장 예민한 사항은 대학 및 학과의 재편 문제였고, 여기에는 바로 공과대학의 응용3과(수학, 물리, 화학)와 문리대 3과와의 통합여부의 문제였다. 그는 또한 서명원 부총장의 지원을 받아 주한 미대사관의 교육담당관인 윌리엄스(Williams)와 접촉하여 서울대 기초과학분야의 대학원 육성을 위한 미 AID자금의 차관을 교섭하였다. 결국 AID로부터 미화 500만달러의 도입합의를 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서울대 기초과학분야를 위한 AID 차관사업은 그 액수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로 획기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었다.
  AID당국은 서울대의 제안을 검토한 후 1974년 봄에 미국의 권위 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가능성조사 팀(Feasability Study Team)을 보내 현지방문을 실시하였다. 물리학 분야에서는 한국계 이론물리학자 벤저민 리(Benjamin Lee, 이휘소,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Stoney Brook 교수 겸 Fermi Lab 이론부장)가 서울대측에서 지명한 고윤석의 지원을 받아 물리학 분야의 교수들(문리대, 공대, 사범대, 교양과정부)의 성향과 업적을 서류와 면담을 통하여 검토하고 대학원 교육의 실정을 파악한 후 실정에 맞는 육성방안과 건의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벤저민 리는 이 보고서에서 당시 진행중인 종합화방안이 흩어져 있는 물리학 교수들을 통합된 단일학과에 집결시킴으로써 교육과 연구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할 것이라 평가하고 여기에 충분한 외부적 지원과 알맞은 내부적 전략이 병행된다면 불원 상당한 수준의 연구성과와 세계수준의 대학원 교육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서울대학의 물리학과의 육성에 대단한 열정을 보이면서 통합된 학과의 훌륭한 리더십과 교수 연구 활동을 위한 조직화와 협력방안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당시 응용물리학과의 존속을 희망하는 일부 교수들의 의견에 대해서 그는 통합하여 상호 협력하는 것이 서로를 위한 최상책이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물리학과는 종합화에 의한 통합과 AID사업의 시행을 앞두고 그 준비를 착실히 진행하였다. 관악캠퍼스의 신축건물을 위한 구상과 설계가 교수들의 상당한 부담이 되었지만 (당시 화학과의 최규원이 이학부 대표로 건설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우종천이 실험실 등의 상세한 설계와 함께 통합된 학부 및 기초과정의 실험에 대한 준비작업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문리대 물리학과는 새로운 희망을 지니고 그 막을 내리게 된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수한 학생들을 맞이하여 한국 물리학계의 동량을 육성하는 데 공헌하였음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더욱 큰 발전의 계기를 찾아 관악의 새 터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 (1964 - 1975)

  한편 공과대학에서는 1964년에 응용물리학과를 설치하여 1975년의 서울대학교 종합화에 따른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와의 통합에 이르기까지 11년간에 걸쳐 별도의 물리학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였다. 응용물리학과는 공학계 학생들에게 충실한 기초물리학 교육을 실시함과 동시에 물리학과 공학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며 물리학을 산업계에 활용할 응용물리학 분야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러한 필요성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설치되면서 기존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기능이 문리과대학 이학부와 공과대학으로 분리되었고 두 대학의 캠퍼스가 멀리 떨어져 있게 된 데서부터 잉태되었다. 사실 훌륭한 공학교육과 그 연구를 위해서는 튼튼한 기초과학의 교육과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공과대학으로서는 그 캠퍼스 안에 수학, 물리, 화학의 응용 3학과를 갈망하였고, 이것이 우여곡절 끝에 1964년에 이르러 실현된 것이다.
  그 전까지 공과대학은 기초물리학교실을 두고 필요한 기초물리 교육을 제공하였는데, 1950년도까지는 2학점의 물리과목을 공통필수 과목으로 하였고, 신공덕동 교사(구 경성제대 이공학부 교사)로 이전한 1954년 이후에는 기초물리 실험실을 제1호관에 마련하여 1학년에게 물리실험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1955 - 1956년에는 물리 및 실험 (3학점)을 공통필수과목으로 설정했고 1957년에는 원자물리학을, 1958년에는 현대물리학 개론을 전공선택 과목으로 각각 개설하였다. 1959년도부터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해 물리실험 기구가 새로 도입되어 더욱 충실한 물리실험 교육을 수행하게 되었다.
  기초물리교실에는 1945년 방성희, 김종철, 권녕대가 취임하여 교육을 시작했고, 국립서울대학교 발족 직후 권녕대, 김종철이 문리과대학으로 옮겨간 이후 방성희가 남아 많은 시간강사들과 함께 강의를 담당해 오다가 1956년 이후 전임교수로 홍순복(1958. 3. 조교수), 민광식(1956 전임강사), 성백능(1958. 4. 전임강사) 등이 보강되었다. 홍순복, 민광식은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의한 교수연수에 참여했고 민광식은 이를 통해 1962년 박사학위(원자로 물리학)를 받고 돌아왔다. 또 성백능 전임강사는 1962년에 일본 도후쿠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원자핵 실험)를 받았으니 당시로서는 훌륭한 교수진이 형성된 셈이었으며, 이 교수진은 곧 이어 응용물리학과의 신설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1960년대에 들어 미국 피버디 고등교육교육사절단의 권유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확충안을 마련하고, 그 일환으로 기초과학교육의 보강을 강구하면서 1964년에 응용3과(수학, 물리, 화학)를 공과대학내에 신설하였다. 응용물리학과가 출범한 후, 1965년에는 조교수 민광식이 미국으로 떠났고, 원자력연구소 연구관으로 있던 맹선재(고체물리 전공)가 조교수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3년 후 이임하였다. 한편 1966년에는 최병두(고체물리 실험)가 전임강사로 부임했고, 1967년에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송희성(입자물리 이론, 아이오와주립대학교), 남천우(원자핵물리 실험,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가 그리고 1971년에는 장회익(고체물리 이론, 루이지애나주립대학교)이 각각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비교적 활발했던 이러한 교수 초빙은 학과 주임을 맡았던 성백능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따라 응용물리학과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준이 높은 충실한 교육을 제공할 수 있었다.

교양과정부 (1968 - 1975) 및 기타 물리교육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오랫동안 학생들의 교양교육을 단과대학별로 시행해 왔으나, 1968년에 정식으로 대학 규모에 해당하는 교양과정부를 설립함으로써 교양교육을 담당할 교수진을 별도로 구성하고 입학생들을 2년간 교양과정부에 소속시켜 1975년 종합화 계획에 의해 폐지되기까지 독자적인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 교양과정부는 신공덕동 공과대학 부지 안에 교사를 마련하였고, 물리학에 관련된 교수로서는 1969년 3월에 장준성이 전임강사로 처음 전임으로 부임하여 많은 시간강사들과 함께 교육을 담당하였고, 이어 농과대학에서 물리학 교육을 담당해 온 이민호가 전임강사로 전속되어 합세하였다. 다시 1972년 9월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입자물리 실험)를 받고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연구조교수를 지낸 김제완이 조교수로 부임하여 한층 활기를 띠었다.
  학생 실험은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의 실험실을 이용하였고, 일부 교수들의 연구는 응용물리학과 또는 가까이 있던 원자력연구소의 실험시설을 이용하여 수행되었다. 1975년 종합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교양과정부는 폐지되고 이들 3명의 교수는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로 전속되었다.

그 외의 물리학 교육 및 물리학 전공 교수들
  1975년 이전까지 위에 기록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 교양과정부 등에서 이루어진 물리학 교육 이외에도 사범대학 과학교육학과,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 등에서 물리학 또는 물리학 관련 교육들이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이들 학과에는 물리학 전공의 교수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사범대학 과학교육학과 소속 교수로는 정연태, 이수호, 신희명, 박승재가 있었고,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에는 박봉열이 있었다. 특히 박봉열은 교토대학의 유가와(Yukawa) 교실에서 이론입자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0년에 귀국하여 공과대학에 신설 발족한 원자력공학과(이후 원자핵공학과로 개칭)에 부임하여 그 학과의 창설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의 학부 및 대학원에서 이론물리학 계통의 강의를 담당하는 등 아직 생소했던 입자물리학을 국내에 소개 전파하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들 교수 중 1975년 종합화계획 시행 시 이수호, 박봉열은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로 전속되고 정연태, 신희명, 박승재는 사범대학에 남아 물리교육 관련 교육을 지속하였다.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시기 (1975 - 현재)
  1975년 3월에 단행된 서울대학교의 관악캠퍼스 이전과 종합화계획의 시행에 따라 자연과학대학(이하 자연대로 약칭)이 신설되고 종전의 문리과대학 이학부, 교양과정부 이학부, 공과대학 응용2과(수학, 물리)가 여기에 합병되었다. 이와 함께 자연대 물리학부는 서울대 안에서 모든 물리학의 교육(학부의 교양 및 전공, 그리고 대학원)과 연구를 총괄하는 큰 학과가 되었다. (사범대학 물리교육학과는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여기서는 과학교육 관련 학위를 수여함)
  교수진은 자연대 발족 당시, 문리대에서 6명(지창열, 김철수, 고윤석, 권숙일, 이구철, 우종천),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에서 6명(홍순복, 성백능, 남천우, 송희성, 장회익, 최병두), 교양과정부에서 3명(장준성, 이민호, 김제완), 그리고 공과대학 원자핵공학과에서 1명(박봉열), 사범대 과학교육과에서 1명(이수호)이 자연대 물리학과로 합류하여 총 17명이 됨으로써, 그때까지 흩어져 있어서 겪던 영세성을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학생의 구성도 문리대 물리학과, 공대 응용물리학과에 소속되었던 학부 및 대학원 학생들이 통합되어 큰 규모의 집단이 되었다. 시설 또한 건물들이 신축되어 점유공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물리학과는 새 캠퍼스 27동의 대부분과 25동 일부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학생용 실험실 16개(25동에 10개, 27동에 6개)를 포함하여 교수 연구실(실험실 포함)들이 있었다.
  이와 함께 충분한 교수인력의 확보로 교수의 강의부담 또한 감소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도 교수의 의무 강의 시간인 주당 9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강의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으나 이제 실험담당까지 포함해도 초과시간을 거의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리학과는 또한 비교적 넉넉한 활용공간을 확보했기 때문에 실험교육과 실험연구의 확충을 위한 공간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제 충분한 기구 구입비와 연구비만 지급된다면 이를 활용하여 교육과 연구에 임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긍정적인 여러 변화를 활용하여 교육과 연구를 향상시켜보려는 구체적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실험교육의 충실화 작업이었다. 일반물리실험의 경우, 총 10개의 실험실 가운데 8개의 실험실에서 8반의 학생이 동시에 작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조교의 인력과 실험기구를 충분히 확보하였고, 한 반의 인원을 16인으로 하여 2인 1조로 실험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교육의 총괄책임을 맡은 우종천은 실험조교로 임명된 30여 명의 대학원생들을 개강 전 2주일에 걸친 집중적 수련을 통해 실험기구들을 직접 조립하는 작업을 비롯한 교육의 준비에 임하도록 하였다.
  한편 물리학과 교수진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그 운영의 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종전에는 5, 6명의 교수로 학과가 짜여져 있어서 대체로 가족적인 분위기 아래 학과 주임 등의 선임교수를 중심으로 격식 또는 격의 없는 방식의 운영이 가능하였으나, 이제 인원과 업무가 방대해졌기 때문에 조직화된 운영이 불가피해졌다. 이리하여 채택된 것이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활용되고 있던 민주적 운영방식이었다. 학과장의 리더십을 전제로 전체교수회의(의장은 학과장)를 심의기관으로 하고 학과의 주요 결정사항에 대해 의결권을 갖게 하였다. 이와 함께 업무별로 7개의 위원회 (운영, 학사, 인사, 도서, 시설 및 실험, 기초과정, 세미나)를 구성하여 소관 업무에 대해 학과장을 보좌토록 하고 교수마다 2개 이상의 위원회에 소속하여 학과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각 위원회 위원장은 학과장이 임명하였고 모든 회의에서는 회의록을 작성하여 비치하도록 하는 등 격식과 절차를 갖추도록 하였다. 학과의 체계적이고 민주적인 운영체제인 이 방식은 1975년 2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교수들의 높은 호응을 받음으로써 학과의 단합과 운영의 효율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진작시키고 전체의 생산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안 또한 강구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수들의 강의 부담이 경감되고 학과내의 교수수가 일정 수준(critical mass)을 넘어섰기 때문에 교수 연구활동의 기획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곧 착수하게 될 AID 차관사업에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이 작업은 절실한 과제였다. 이에 종합화 이후 초대 학과장인 고윤석과 몇몇 교수들의 주도 아래 여러 단계의 협의를 거친 끝에, 물리학과의 교수 연구활동을 효율적으로 진작시키는 방안으로 “우선육성분야”를 한두 개 선정하여 향후 이들 분야에 대해 인력과 재정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안을 채택한 물리학과는 곧 우선육성대상 분야의 선정에 착수했다. 몇몇 연구 분야에서 분야별 연구계획서가 제출되었고, 기존의 연구업적과 미래의 성취가능성을 기준으로 하여 이 가운데서 입자물리이론[송희성(위원장), 박봉열, 김제완] 분야와 고체물리이론 및 실험[장회익(위원장), 권숙일, 우종천] 분야가 우선육성대상 분야로 선정되었다.
  물리학과의 이러한 결정은 1976년도 후반에 시작된 “서울대학교 기초과학분야 대학원 육성”을 위한 AID 차관사업에 곧바로 반영되었다. 이 AID 사업은 서울대의 종합화계획 시행과 더불어 물리학과 발전의 한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USAID 차관 자금 총 500만달러와 약 200만달러에 해당하는 내자를 재원으로 계획된 이 사업은 1973년도부터 서울대 본부와 AID 서울사무소 사이에서 추진되어 왔으며, 그동안 미국의 학자들로 구성된 가능성검토(Feasibility Study) 위원회의 면밀한 검토를 거쳐, 1976년 9월에 구체적 실행에 들어갔다.
  AID 사업은, 1) 교수의 연구능력 제고를 위한 미국 대학 및 연구기관 파견연수, 2) 미국인 저명 학자의 초빙을 통한 협동연구 및 대학원 교육 강화, 3) 실험기자재 및 도서의 지원, 4) 단기간의 학회 참석 및 연구협의 지원의 네 가지 항목에 따라 시행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물리학과의 우선육성대상 분야, 즉 입자물리 이론과 고체물리 분야에 대한 우선적 배려가 취해졌다.
  AID 사업 기간 중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사업자금과 정부 등의 지원을 받아 물리학 분야에서 길이 기억될 특별한 국제 심포지엄 하나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78년 9월 1일부터 5일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개최된 “Seoul Symposium on Elementary Particle Physics in Memory of Benjamin W. Lee”인데, 이는 AID 사업에 대한 타당성 연구를 위해 내교한 바 있는 벤저민 리(이휘소, 1935 - 1977)가 1977년 여름 미국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게 되자, 그의 업적과 공헌을 기리는 취지에서 개최된 입자물리학 분야의 학술회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세계적인 각광을 받았고 그에 대한 학계의 기대가 매우 높았으므로 이 대회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인 살람(A. Salam), 레더먼(L. M. Lederman)과 같은 입자물리학계의 세계적 거장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당시 상황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국제 학술대회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준 파급효과는 그후 물리학과가 이 분야의 우수한 신진교수들을 유치하여 높은 수준의 입자물리학 연구집단을 육성하는 데에까지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교수 수는 이후에도 증원을 계속하여 <그림 1>에 나타난 추이를 보이고, 이후 1999년 9월 BK21 사업에 선정되면서, 연구 능력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림 2>는 물리학과의 연구 능력의 향상도를 나타내는 도표이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는 물리학 발전에 기여하는 활발한 인력을 배출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이 임무를 계속할 것이다. (물리학부 석·박사 학위수여자 배출 현황표(519쪽) 참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는 1929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에서, 1945년 광복으로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 1946년 국대안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 이학부 물리학과,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 물리학과, 1950년의 전시연합대학 물리학과를 거쳐 9.28 수복후 안정. 1964년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 신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로 자연대학 물리학과로 통합, 1949년 석사1회 졸업.

 

 







 


1 참고자료,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초기약사(1999) 서울대 출판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1987)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간, 김종철: 경성제국대학 물리학과에 대한 회고(한국과학사 학회지 제23권 제2호, 2001년 12월).

 

 

 

 

 

 

 

 

 

 

 

 

 

 

 

 

 

 

 

 

 

 

 

 

 

 

 

 

 

 

 

 

 

 

 

 

 

 

 

 

 

 

 

 

 

 

 

 


2 권녕대는 박철재의 뒤를 이어 학과 주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학부장직과의 겸직 허용 여부로 논란이 있었으나 (김종철의 증언), 육이오 때까지 겸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