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노벨 물리학상에 즈음하여:
토프트,벨트만,이휘소,그리고 입자 물리학의 미래

20세기의 마지막 노벨물리학상은 기본입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인 - 게이지 장이론(Yang-Mills gauge field theory) 있어서 양자역학적 요동효과를 정량적으로 계산할 있는 수학적 근거를 마련한 소위 재규격화 가능성(renormalizability) 증명한 공로로, 네델란드의 유트레히트 대학교 소속 벨트만 명예교수와 토프트 교수에게 수여되었다. 이로써, 네델란드는 지난 20세기 중에 물리학자중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 노벨화학상 수상자 3명을 배출한, 기초과학의 최강국임을 면면히 보여주었다.

벨트만, 토프트 교수의 업적 자체와 그들의 업적이 현재까지 소립자물리학에 끼친 지대한 영향에 관하여서는 다른 지면에서 소개되었으므로, 글에서는 토프트 교수가 노벨상 업적을 완성한 70년대 이후의 연구 내용, 특히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홀로그래피 원리'에 관하여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토프트 교수와 이휘소 박사 사이의 학문적 교류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토프트 교수 자신의 표현을 빌려 밝히고자 한다.

소립자 물리학 분야에서 토프트 교수의 업적은 대략 1982년을 분기점으로 구분할 있겠다. 1970 이후 1982년까지 토프트 교수의 관심분야는 - 게이지 장이론과 관련된 제반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이었다. 먼저, - 게이지 장이론과 이를 이용하여 핵자를 구성하는 쿼크(quark) 글루온(gluon) 기본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색소역학(QCD, quantum chromo-dynamics)에서 가장 중요한 비섭동적 물리현상인 색소의 무한구속현상(color confinement) 카이랄 대칭성의 비선형화 현상(chiral symmetry breaking) 해결하는 것이 토프트 교수의 관심사였다. 이를 연구함에 있어서, 토프트 교수는 강한 상호작용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비섭동 현상이 문제해결의 관건이라고 간파하고, 수학적으로 발산하지 않는 대표적인 비섭동 준고전 물리현상의 예로, - 게이지 장이론으로부터 전자기력현상이 발생하는 모형이론의 경우, 유한한 질량과 양자화된 자기전하를 가지는 소위 '자기홀극자'(magnetic monopole) 존재함을 처음으로 보였다 (토프트 교수와 독립적으로 소련 란다우 연구소의 폴리아코프(Polyakov) 박사도 자기홀극자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또한, 토프트 교수는 자기홀극자 자기소용돌이류(magnetic vortex) 같은 비섭동 상태들에 기인하여, 색소구속현상이 직관적으로는 초전도체의 마이스너 효과(Meissner effect) 동일한 물리현상임을 확신하였다. 당시 주도적인 학자들인 윌슨(K. Wilson, 1980 노벨물리학상 수상), 폴리아코프(A. Polyakov), 만델스담(S. Mandelstam), 남부(Y. Nambu)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색소구속현상을 이해할 있음을 주창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토프트 교수는 1979년­1982 기간 동안, - 게이지 장의 전기적 성분과 자기적 성분의 준고전 양자요동을 비섭동적으로 취급하는 방법을 개발하였으며, 이로부터, 전기적 성분과 자기적 성분사이의 양면성을 처음으로 밝힐 있었다. - 게이지 이론의 다른 종류의 비섭동적 준고전 현상으로서, 특히 터널링 효과인 '인스탄톤'(instanton) 존재를 밝혀 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게이지 장이론에서 발생하는 카이랄 대칭성의 붕괴, 특히, 소립자의 스핀 방향성에 민감한 회전대칭성 (axial U(1) 대칭성) 인스탄톤 효과에 의하여 보존대칭성이 되지 않음을 밝혀 10여년 동안 문제로 남아있던 η-η' 문제를 해결하였다. , 인스탄톤에 의하여 전자기-약력에서, 바리온(baryon) 렙톤(lepton) 양자수의 차이는 항상 보존되지만 합은 보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초기 우주에서 현재 관찰되는 물질들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 양자역학적으로 - 게이지 장이론이 섭동전개를 가능케하는 매개변수가 없음에 착안한 토프트 교수는, 1973년도, 색소의 자유도가 수학적으로 타당한 섭동변수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소위 무한색소 전개방법으로 불리우는 방법론은 - 게이지 이론이 초끈이론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 극히 중요한 내용이었으며, 따라서, 지금까지 이들 분야에서 밝혀진 다수의 결과가 무한색소 전개방법에 기인하였음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1982 이후, 토프트 교수의 주요 관심분야는 양자중력현상으로 이동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여 밝혀진 블랙홀(black hole) 고전물리적 성질에 관하여 심층적으로 연구된 이후, 1970년대 , 호킹(S. Hawking), 베켄스틴(Bekenstein), 하틀(J. Hartle) 등에 의하여 블랙홀이 양자역학적 요동효과에 의하여 흑체복사(black body radiation) 일으킨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규명되었다. 토프트 교수는, 이미 암시적으로 베켄스틴 호킹에 의하여 계산되었던 결과를 바탕으로 1990년대 '홀로그래피 원리'를 주창하였다. , 중력의 열역학적 특성은 통상적인 열역학계와는 판이하게 달라, 물질들이 진즈 불안정성(Jeans instability) 의하여 블랙홀로 중력수축된 상태가 최대 엔트로피 상태이며, 특이하게도 최대 엔트로피는 물질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체적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 블랙홀의 지평선 면적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력에 의하여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물질들은 원래 3차원 공간에서 기인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원에 구속된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토프트는 이러한 현상이 블랙홀과 같은 강한 중력계에서는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며, 블랙홀은 3차원의 미시계 정보를 2차원 면에 표현할 있는 훌륭한 '홀로그래피'라고 일컬었다.

이후, 토프트 교수가 주창한 '홀로그래피 원리'는 중력이 작용하는 물리계에서는 항상 나타나는 현상일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최근에는 양자중력의 유일한 이론인 초끈이론 역시 '홀로그래피 원리'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음이 밝혀졌다. 홀로그래피 원리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다른 물리계는 양자분율 홀효과의 경계상태들이다. 강한 상관관계에 의하여, 모든 여기상태는 구속된 2차원 전자유체의 1차원 경계에서만 발생하여, '홀로그래피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 홀로그래피의 원리는 양자 블랙홀 아니라, 비섭동적 초끈이론, 그리고 강한 상관관계의 전자계까지 광범위에 걸친 비섭동 현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물리학적 원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홀로그래피 원리'의 정확한 이해와 규명이 현재 소립자물리학에 내재되어있는 크고 작은 개념적인 문제들 -- 예를 들면, 우주상수문제, 입자의 종류 질량 분포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기원과 미래 --- 해결할 있는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공통된 의견의 기반에서, 지난해 초부터 토프트 교수의 그룹과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초끈이론 그룹사이에 향후 7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공동연구를 추진하기로 하고 현재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직후, 나는 토프트 교수에게 수상 축하 메시지를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워낙 바빴던 탓인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전자우편 답장이 왔는데, 무려 8절지 페이지에 걸쳐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담아 보내왔다. 물리학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내용이 같아 직역하여 내용별로 모아서 실어 보기로 한다.

* 이휘소 교수와의 인연에 관하여 ---

당연히 나는 물리학자로서 이휘소 박사를 너무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휘소 박사 부부와 여러 차례 같이 어울린 적이 많이 있었다. 특히, 시카고에서 이휘소 박사 부부와 자주 들렀던 화려한 중국식당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이휘소 박사는 나의 인생의 전환점에서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학원생일 , 그의 여러 논문들을 공부하였으며, 이들 논문은 나에게 과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 나의 박사학위 논문지도 교수인 벨트만 박사는 지중해에 위치한 프랑스령 코르시카 (Corsica) 있는 카쥐스(Cargese)라는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 하계입자물리학교에 참가하도록 추천하여 주었다. 원래, 벨트만 교수는, 유명한 하계학교인 프랑스령 알프스에 위치한 레쥬쉬(Les Houches) 하계학교에 것을 추천하였지만, 나는 최종심사에서 낙방하여, 없이 '카쥐스'로 밖에 없었다. '카쥐스' 하계학교는 3주동안 개최되었으며, 이곳에서 나는 입자물리학 분야의 권위있는 세계적 학자들의 강의를 직접들을 있는 기회를 가졌다.

'카쥐스' 하계학교의 주관자는 프랑스의 입자이론물리학자인 레비(Maurice Levy) 교수였다. 레비 교수는 이미, 칼텍의 저명한 입자이론물리학자인 겔만(Murray Gell-Mann) 교수와 함께, 강한 상호결합작용을 주고받는 소립자들의 동역학에 관한 모형이론인 소위 겔만-레비 모형(Gell-Mann Levy Linear Sigma Model) 주창하여 주목을 받고 있었다.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모형이론은 핵자들 사이의 강한상호작용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하는, 미완의 이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러하듯이 모형이론의 이론적 구조는 엄청나게 중요하며, 지금까지도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자세하게 모형이론의 수학적 체계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만큼 심오한 모형이론이다. 사실 나는 '카쥐스'에 오기 전에, 모형이론을 자세하게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이미 모형이론의 양자동역학에 관하여 엄청나게 깊이 연구한 이휘소 박사를 만난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라고 하겠다.

'레비' 교수가 초빙한 강연자 한사람이 바로 이휘소 박사였다. 이휘소 박사는 부인, 그리고 기억이 맞다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왔었다. 하계학교 나는 그들과 함께, 코르시카 내지 깊숙이 같이 등산을 생생한 기억이 있다. 한참 등산한 , 우리는 아주 아름다운 작은 호수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가족의 젊은 아빠로서 그때 그의 행복한 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당시는,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직 '카쥐스' 하계학교에 참가하였던, 학생 그리고 강연자들이 전부여서 아주 조용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학문의 선배인 이휘소 박사를 이렇게 가까이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물론, 이휘소 박사의 강연이 어떤 것보다도 나에게는 중요하였으며, 나의 향후 연구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부분이었다. 이휘소 박사와 다른 독일의 수리물리학자인 시만직(Kurt Symanzik) 박사가 모두 겔만-레비의 모형이론에 관한 양자현상을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들 선배학자의 강연을 가장 흥미롭게 들었다. 사실, '카쥐스' 하계학교에 오기 ,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는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관하여 전혀 다른 수학적 접근방법을 내게 심어주었으며, 모형이론의 중요성을 그다지 강조하지도 않았었다.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을 경청한 , 나는 이들의 접근방법이 보다 적절하며, 특히, 당시 내가 풀고자 시도하고 있었던 소위 - 게이지 장이론(Yang-Mills gauge theory) 아주 유사한 방법으로 적용해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강연 , 나는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 각각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겔만-레비 모형이론에 대한 양자현상 접근방법을 - 게이지 장이론에도 적용해 있을까요?" 대가의 대답은 똑같았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당신의 지도교수인 벨트만 박사가 -밀이론에 관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니, 그와 상의하여 자문을 구하도록 하세요!".

'카쥐스' 하계학교를 다녀온 , 나는 벨트만 교수에게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의 강연에 대하여 설명하고, - 게이지 장이론에 적용하려는 나의 착안도 피력하였다. 그러나, 벨트만 교수는 그다지 신통하지 않다고 느끼는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심층적인 토론과 수많은 계산을 나갔다. 당시, 벨트만 교수는 까다롭고 지리한 계산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수행할 있는 '스쿤쉽'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는 1970년도이었으며, 손으로 계산하기에는 벅찬 까다로운 계산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수행한다는 발상은 가히 영웅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벨트만 교수는 우리가 같이 설정한 모형이론이 제대로 계산이 되도록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계산상,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많은 모형이론들의 양자현상 보정효과 계산이 수렴하지 않고 발산하는 적분꼴로 표현된다는 난점이었다. 나는, '카쥐스' 하계학교에서 이휘소 박사와 시만직 박사로부터 배워 응용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가 제안한 방법보다 우수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오랜 설득 끝에 나는 드디어 지도교수인 벨트만 교수가 고집을 꺾고, 내가 제안한 계산방법을 그의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며칠 , 벨트만 교수는 계산한 결과를 보여주며 "거의 비슷한 답이 나왔네!"라고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답은 몇가지 맞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했다 -- 서로 상쇄되어 없어지리라 예상한 몇몇 항들이 2 만큼 차이가 있었다. "내가 보여드린 식을 얼마나 정확히 컴퓨터에 옮겨 적었나요?" 자세히 조사해보니, 벨트만 교수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바꿀 숫자 2 군데에서 빠뜨린 것을 찾아낼 있었다. 다음날 아침, 모든 계산들이 예상한 결과대로 나옴을 확인할 있었다. 벨트만 교수가 수년 동안 매달려온 -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결국 1999년에 이르러서 벨트만 교수와 내가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결정적 내용이었다. 벨트만 교수는 분야, -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론의 개척자이었다. 그는 문제에 관한한 생각할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 분석하였다. 다만, 마지막 결정적인 부분이 내가 중요하게 기여한 부분이며, 이는 모두 이휘소 박사의 업적으로부터 얻은 영감의 결과이다.

1970 12월경에 암스테르담에서 대규모 입자물리학 국제학회가 개최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내가 소속한 유트레히트 대학교에서 아주 가까우며, 벨트만 교수는 학회의 주관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양자장이론을 다루는 분과발표회의에서 벨트만 교수는 여러 유명한 학자들에게 그들이 동안 - 게이지 장이론에 대하여 계산한 결과를 발표를 하도록 먼저 순서를 마련하였다. 유명한 학자들의 발표내용을 들으며, 벨트만 교수와 나는 그들 방법론이, 내가 발표하고자 하는 내용에 비하여 얼마나 쓸데없는 틀린 내용인가를 서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여 당시 나는 전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대학원생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유명한 학자들과는 달리, 나에게는 단지 10분의 발표 질의시간 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10분이란 시간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간결하게 전달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휘소 교수 역시 국제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발표한 내용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휘소 박사는 당시 진행하고 있던 연구과제들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벨트만 교수가 개발한 -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 소위 재규격화 방법론의 규명에 본인의 모든 심혈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던 같다. 명석한 이휘소 박사로서는 우리가 발견한 방법론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도리어 우리의 방법론을 보다 조직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전혀 무명의 대학원생이었던 나로서는, 이휘소 박사와 같이 저명한 학자가 우리의 결과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휘소 박사는 학계를 돌아다니며, 벨트만 교수와 내가 발견한 방법론만이 올바른 방법론임을 보여주었으며, 이로 인하여, 무명의 대학원생이 계산한 결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의구심을 잠재울 있었다.

이휘소 교수는 명성에 걸맞게 아주 정직한 학자였다. 그는 자신이 분야에서 보탠 업적이 정직하고 공정하게 평가되도록 항상 노력하였다. 그는, 전혀 반대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많은 미국의 물리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에 합당한 학문적 기여도 이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휘소 박사와 오랜 친구인 벨트만 교수는, 이후 학회에서마다 그의 불같은 성미를 이기지 못하고 이휘소 박사에게, 박사의 논문들이 자신의 업적에 새로운 것을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아무런 공로도 인정할 없다고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휘소 박사는 내게 개인적으로 다가와, 벨트만 교수가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이휘소 박사가 모두 옳았다. 그가 우리의 계산 이후, 문제에 관하여 발표한 논문들은 모두 상당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었으며, 그에 관한 업적은 충분히 인정받아야만 하였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에이버스라는 젊은 연구원과 함께, - 게이지 장이론의 양자현상 계산방법에 관한 비평논문을 완성하였다. 비평논문은 이후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었는데, 이유는 당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많은 학자들이 이휘소 박사가 개발한 방법이 벨트만 교수와 내가 원래 개발하였던 파인만 도형을 이용한 증명방법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공평하게 이야기하자면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은 우리의 것들과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휘소 박사의 논문들로 인하여 국제학계에서 많은 동료학자들이 우리가 개발하였던 방법론이야말로 제대로 완성된 방법임을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70년대 수년간 이휘소 박사는 -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되돌아 보건대, 때가 가장 즐겁고 흥분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러 가지 이론적인 착안들이 고안되었고 이들 논리적으로 보다 타당한 내용들이 살아남았다. 이론적 착안 아니라 실험적으로도 여러 가지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 게이지 이론을 바탕으로 구성된 전자기-약력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실험과 이론이 서로 건설적인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중성전류에 의한 실험 결과가 있는가?", "매혹입자 (charmed particles) 포함된 중핵자를 발견할 있을까?", "가속기에서 새로 발견된 입자들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등등, 수많은 이론과 실험의 문제들에서 이휘소 박사는 항상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모든 국제학회에서 이들을 발표하여 학계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학자였다.

그가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는 소식은 정말로 슬픈 뉴스였다.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로부터 이휘소 박사의 사고가 최근 한국 소설로 미화되어 취급되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사고는 끔찍한 사고였지만, 트럭 운전사가 트럭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일어난 평범한 사고였었다. 이휘소 박사는 당시, 가족과 함께 시카고에서 하계 연구활동을 위하여 콜로라도의 아스펜으로 가고 있었던 중이었다.

----- 노벨상 수여 소식이 발표되었을 어디에 있었으며, 기분은 어떠하였는가?

나는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물리학상을 발표할 당시, 2006년경 스위스 제네바 근방에 완성될 LHC (Large Hadronic Collider)라는 거대한 입자가속기에서 수행할 실험을 준비하고 있는 동료학자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이태리 볼료냐(Bologna) 방문하던 중이었다. 이곳에서 작은 학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나는 당시 차례가 되어 연구내용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친구들이 은밀하게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던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스톡홀름에서 흘러나오는 노벨상에 관한 뉴스에 기울이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이런 뉴스야말로 내가 진정 이해하며 밝혀보고 싶은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는데 방해가 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사실 볼료냐에서 연구내용을 발표하는 날이 바로 노벨 물리학상이 결정되어 발표되는 날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노벨상을 받은 본인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생을 바꾼 같지 않다. 최근 부쩍 이런 저런 상을 받는 기쁨을 느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받은 상들은 노벨상에 비하면 무게가 적은 상들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커다란 상'이 항상 이름을 따라다닌다는 것이 인생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야만 같다.

--- 한국학자들과의 교류는?

정확하게 이야기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많이 한국을 방문할 같다. 이미 한국은 두차례 다녀온 적이 있다. 물론 이휘소 박사가 서거한 한참 뒤의 일이다. 특히, 한국물리학회에서 주관한 '이휘소 추념 강연 시리즈'에 초청되어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강연 시리즈가 이제는 계속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애석한 일이다. 한국은 이휘소 박사와 같은 학문적으로 아니라 인격적으로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였음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것이다.

이미,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우리 (유트레히트 대학교 이론물리연구소의 토프트 교수 드윗 (Bernard de Wit) 교수) 상호 관심사인 "홀로그래피, 블랙홀 초끈이론"에 관하여 공동연구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통하여 연구팀의 긴밀한 연구체제가 구축될 것이며, 상호 방문 연구를 통하여 좋은 공동연구 성과를 이루리라고 믿는다.

끝으로, 개인적으로 토프트 교수와 관련되어 몇가지 기억을 모아보기로 하겠다.

1983 토프트 교수는 한국물리학회에서 주관한 '이휘소 박사 추모 강연회'의 4번째 초청 강연자로 서울을 방문하여, 일련의 강의를 적이 있다. 당시, 미국에 유학 중이었던 관계로 토프트 교수의 금싸라기 같은 강연을 듣지 못하였던 나로서는, 1985년도 방학 잠시 귀국하자마자, 허겁지겁 물리학회 사무실을 찾아 강연록을 2부나 사서 열심히 공부하였던 기록이 새롭다. 사실, 이후, 초끈이론 분야에서 내가 성취한 업적들은 강연록을 공부한 받았던 영감에 기초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무한 색소 영역 전개에 관한 토프트 교수의 접근 방법은 앞으로도 게이지 장이론 아니라 초끈이론의 제반 현상에도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남아있으리라 생각한다.

1989, 나는 캐나다의 휴양지인 반프(Banff)에서 개최된 하계학회에서 처음으로 토프트 교수를 조우할 있었다. 동안, 전자우편을 통하여 여러 가지 관심사에 관하여 접촉하고 있었던 터라, 즉각 서로 많은 대화를 있었다. 당시, 토프트 교수는 양자 블랙홀의 비섭동적 정체에 관하여 많은 관심이 있었고, 나는 초끈이론의 비섭동현상, 특히 후에 초끈이론의 양면성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였던 인스탄톤 (axionic instanton) 5차원 솔리톤 (five-brane) 규명에 집중하고 있던 터이었다. 구체적인 대상은 달랐지만, 양자중력의 비섭동현상에 공히 관심사가 있었으므로, 광범위한 내용을 가지고 서로 토론할 것들이 많았었다. 같이 있었던 3 동안, 캐나다 록키산맥을 같이 등산하면서 그대로 "무한히 많은 것"들을 토프트 교수로부터 배우고, 영감을 얻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토프트 교수의 일면을 느낄 있었던 다른 생생한 기억이 있다. 아마, 1991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수년 토프트 교수가 발표한 논문의 내용을 기초로 양자중력의 비섭동 현상을 연구하면서, 토프트 교수에게 논문에 기술된 수식에 관하여 전자우편을 통하여 문의한 적이 있었다. 즉각, 답신이 날아왔는데, 시작이 "Are you sure there is no factor of 2 in the exponent?" 라는 확인 질문이었다. 자세히, 나의 노트에서 계산을 따라가보니, 과연 숫자 2 도중에서 빠뜨린 것을 찾을 있었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지엽적인 사항이었고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즉각 계산에서 유도될 결과를 간파하는 그의 분석적 능력에 탄복할 밖에 없었다.

토프트 교수는 지난 30 동안 항상 다른 학자들보다 앞서서 입자물리학의 제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시도하여 왔다. 시대에 너무 앞서다 보니(?), 유행을 좋아하는 다른 학자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토프트 교수와 나는, 지난 수년간 Institute of Physics에서 발행하는 SCI 학술지인 "Classical and Quantum Gravity" 편집위원으로 같이 참여해오고 있었다. 그의 가장 최근 논문인 "Quantum Gravity as a Dissipative Deterministic System" 예의 학술지에 투고하면서, 그는 자신의 논문이 Referee 헐뜯음을 당하지 않고 제대로 인정받아 실릴 있는 유일한 학술지가 "Classical and Quantum Gravity" 것이라고 익살을 보인 것도, 그가 소립자물리학 분야에서 진정한 선구자임을 보여주는 일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수종 교수는 미국 CALTECH 물리학과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 1988년부터 90년까지 미국 산타바바라 이론물리연구소 연구원, 90년부터 93년까지 미국 예일대학교 물리학과 연구조교수(SSC Fellow),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물리학과 연구교수, 1996년부터 1997년까지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정회원을 역임하였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부교수, 국제이론물리센터 객원 연구원, 'Classical and Quantum Gravity' 편집위원, CERN (유럽공동체가속기센) 외부참여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수상경력으로는 Erice 하계입자학교(Italy), J.J. Sakurai Fellowship, 미국 에너지성 SSC Fellow, 서암학술재단 Fellowship, 미국 Monell 재단 Fellowship 등이 있다.

(sjrey@phya.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