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만들었다. 시간 측정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사기> 제8권에는 “신라 성덕왕 17년(718년) 여름, 6월에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물시계 제작에 관한 기록이다(전상운, 1994).
조선시대에 이르면 물시계인 누각 이외에도 해시계와 같은 다양한 시계가 발명된다. 세종 19년(1437년) 4월에 장영실, 정초, 김빈, 김돈, 이천 등은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縣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을 비롯한 일련의 해시계를 제작하였다. 또한 장영실은 김빈과 함께 세종 16년(1434년) 6월 자동 시보장치인 물시계 자격루를 만들었다. 자격루는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되어 세종 16년 음력 7월 1일부터 조선왕조의 새로운 표준시계 역할을 하였다.

   

세종대왕(1397-1450)







장영실
(세종때의 과학자)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자 장영실>

  장영실(蔣英實)은 원나라 소항주에서 귀화한 아버지와 기녀 사이에서 태어난 동래현의 관노였다. 기술적 재능이 뛰어난 장영실은 태종 때 궁중에서 기술적인 사업에 참여하였고, 이때부터 그의 창조적 재질을 크게 인정받았다. 세종의 특명을 받은 그는 관노의 신분으로는 드물게 중국에 파견되어 천문기기를 연구했으며, 마침내 면천되어 1423년(세종 5년) 노비 신분을 벗고 상의원별좌(尙衣院別座) 종6품의 기술관료가 되었다. 장영실은 혼천의와 같은 천문시계 장치와 자격루, 옥루 등 자동기계 시계를 제작하여 세종시대의 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했다. 1433년 호군(護軍)이 된 장영실은 그해 6월 혼천의(渾天儀)를 완성했으며, 1437년(세종 19년)에는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소간의(大小簡儀), 공중시계인 앙부일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태양시(太陽時)와 항성시(恒星時)를 측정하여 주야 겸용 시계로 쓴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을 완성했다. 장영실은 1434년(세종 16년) 김빈과 함께 11세기 송(宋)의 소송(蘇頌)이 제작한 천문시계장치와 아라비아 시계의 자동시보장치를 참고하여 자동시보(自動時報)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으며, 1438년 1월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도 만들었다. 이외에도 그는 1441년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 수위 측정기인 수표(水標)를 제작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종3품의 벼슬인 상호군(上護軍)까지 승진한 장영실은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우연한 사고로 그해 5월 장형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더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