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광학적 현상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황룡사 구층탑에서 나온 화주(火珠)라는 구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고려 때의 동경(東京)이었던 경주의 내력을 적은 책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광학적 현상을 말하는 화주에 관한 기사가 적혀 있다. 이 물건은 바둑알 같은 모양의 구슬로 수정처럼 투명하고 들어서 물체를 비춰보면 더 잘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전상운, 1984). 더욱이 화주로 햇볕을 모아 헝겊에 쪼이면 불이 나서 헝겊을 태운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화주는 수정 렌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학적 현상에 대한 언급으로는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전상운, 2000). 이외에도 광학경(光學鏡)과 화경(火鏡)으로서의 화주는 7세기 초에 중국을 거쳐서 또는 인도에서 직접 신라에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렌즈와 안경과 관련된 광학 원리와 서양의 사원소설(四元素說)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독일 태생의 예수회 선교사 테렌츠 (Joaness Terrenz: 鄧玉函, 1576-1630)가 중국에서 쓴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해서 거중기(擧重機)를 발명하였고 이 장치를 가지고 한강에 배다리를 건설하고 수원성을 쌓을 때 이용했다. 렌즈와 관련된 광학적 이론은 19세기 초에 활동하던 인물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안경류(眼鏡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목렌즈와 볼록렌즈의 원리를 설명하였고, 안경, 확대경, 망원경, 현미경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002년 현재는 전자통신뿐 아니라 광통신기술의 발전으로 통신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을 가져왔으나 옛날에는 봉수(烽燧)를 통신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써 급보를 전하던 고대의 통신방법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지펴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던 것인데, 동양에서는 물론 서양의 고대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로부터 이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나 정식으로 법을 제정하여 실시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조진약(曺晋若)의 상주에 의하여 평상시에 1번씩 올리고 2급(二急)에는 2번, 3급에 3번, 4급에 4번씩 올리며, 봉수대에는 방정(防丁) 2명, 백정(白丁) 20명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이조에서는 세종 때에 정식으로 봉수 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서면 4개,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리는데 서울에서는 오원(五員)이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 진장(鎭將)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는 간선(幹線)인 직봉(直烽) 5개처와 보조선인 간봉(間烽)들이 있었다. 각 봉수대에 소속된 인원은 남산에 군사 4인, 오원 2인, 연해와 변경지방에는 군사 10인, 오장 2인, 기타 내륙지방에는 군사 6인, 오장 2인을 배속하였다.


 

다산정약용
(1762-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