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한국에서의 고급과학기술 인력은 전적으로 본국으로부터 공급받도록 하고 조선인에게 과학기술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식민지 과학기술 교육정책을 취했다. 이리하여 일제하에서 대학은 한동안 설립되지 못했고, 일본 유학을 통한 이공계 대학의 졸업자 배출도 192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차단되었다. 1915년에 이르러서야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악화된 불만을 완화시키고 대외적인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해주기로 결정했다.
  1915년 일본인과 조선인의 공학(共學) 형태를 띤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경성공전은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4년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바뀌어서 해방을 맞게 되는데, 일제하 대표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이었다. 애초에 이 학교는 전체 학생 정원을 150여명으로 하고 일본인 3분의 1, 조선인 3분의 2로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더 많이 뽑는다고 표방했지만, 조선인의 다수를 입학 뒤 중도에 탈락시킴으로써 사실상은 일본인을 더 많이 배출하는 학교로 바뀌었다. 설립 초기에 경성공전은 염직과, 요업과, 응용화학과, 토목과, 건축과, 광산과에서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입학시험 과목은 일본어 및 한문, 수학, 물리, 화학, 도화 등이었으며, 설립 초기인 1919년 당시 교직원은 교수 9명, 조교수 25명, 서기 3명이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된 1938년에 기계공학과 및 전기공학과가 추가되었다. 1941년 고야마 가즈노리(小山一德)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교장 겸 중앙시험소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이과 교원양성소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그해 4월 이과 교원양성소가 개설되어 수학, 물리, 화학 등을 가르칠 중등학교 교원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대륙침략 이후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신설학과 및 부속 교원양성소가 추가로 설치되어 교수와 학생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42년에는 교수 30명, 조교수 14명, 학생주사 1명, 서기 4명으로 총 직원이 49명에 이르렀고, 학생 수는 경성고등공업학교 406명, 이과 교원양성소 96명으로 총 502명에 달하였다.
  전반적으로 일제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일본인 중심의 소수 전문기술인력 양성기관 성격으로 운영하였고, 배출된 졸업생들을 산업현장의 기술자보다는 총독부를 비롯한 관청의 기술관리로 활용하였다. 또한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의 조선인 기술자 대부분은 일본의 독점 기업체나 총독부 관청 등에는 취업할 수 없었고, 사립중등학교 교원이나 지방의 중소 산업체에서 주변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정인경,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설립과 운영”, 김영식, 김근배 편,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98).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물리학은 기껏해야 일반물리학 수준의 서비스 과목에 지나지 못했다. 즉 이 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고는 하지만 정역학, 초등열역학, 초등전자기학 수준 정도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일제하의 대표적인 과학기술 교육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