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발발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들이 공업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대한 규제를 좀 완화해주었고, 이에 따라 몇몇 공업전문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광업가 이종만을 중심으로 각계의 조선인 후원을 바탕으로 설립된 대동공업전문학교이다. 이 학교는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것이 계기가 되어 1938년 평양에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대동공전은 약 300여명의 조선인 채광야금학 전공자를 배출했다(김근배, 1996).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대륙 침략 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제는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섰고, 이에 필요한 고도의 기술 및 공업을 뒷받침해 주기 위해 1941년 봄 경성제국대학(1924년 창립, 법문학부와 의학부로 구성)에 새로이 이공학부를 설치하고 물리학·화학·토목공학·기계공학·전기공학·응용화학·채광야금의 7개과를 두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설립되는 데에는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였던 야마가(山家信次)가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37년 도쿄제국대학 내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창설위원회를 설치하고 도쿄제국대 이학부장과 공학부장을 거쳐 경성제대 초대 이공학부장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당시 야마가 부장은 일본 해군 화약청장 등을 역임한 해군 중장 출신으로 응용열역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권위를 지닌 학자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1942년까지 교수 27명과 조교수 21명을 충원했다. 이 인원은 신입생 정원이 겨우 40명인 학부 규모에 비하면 대단히 많은 것이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내에서는 교수들의 윤강회(輪講會)가 학부가 개설된 직후부터 시작되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45년 4월까지 90회에 걸쳐 시행되었다. 이 발표회는 한두명의 교수가 그동안 연구한 내용을 발표하고 그것에 대해 참여자들이 서로 논의하는 매주 또는 격주로 열린 교수들의 연구모임이었다.
  이공학부는 7개학과 및 공통과학(교양담당)에 합계 39개 강좌와 65명의 전임교수가 있었으며, 학생 정원 320명이었다. 해방 전까지 졸업한 조선인 수는 총 37명(선과 1명 포함)이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해외 유학 출신에 비해서도 매우 적은 인원이었다. 이처럼 졸업생의 규모가 작았던 것은 학부의 역사가 짧았을 뿐만 아니라 인력 양성보다는 교수들의 연구 활동에 치중되어 운영된 결과였다. 또한 조선인은 진학상의 차별까지 받은 관계로 그 수가 더욱 적었다.
  이공학부 물리학과에는 과를 주관하는 과주임이 있고 각 전문 분야별로 강좌가 설립되어 각 강좌에는 담당교수 1명, 조교수 1명, 조수 약간 명이 있었다. 강좌에서는 각각의 전문 영역의 학과목을 담당했다. 물리학과의 주임교수는 오쓰가(大塚明郞)였다. 그는 야마가가 경성제대 총장에 취임하면서 그 뒤를 이어 이공학부장을 맡게 되었고, 야지마(矢島祐利)가 그를 이어 학과 주임교수를 승계했다.
  <표I-4> 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서는 실험물리학에 오쓰가, 야마구찌(山口太三郞), 호리에(掘江忠男: 이학사, 광학), 사와다(澤田正三: 이학사)가 있었고, 이론물리학에 야지마(전자기학), 이누이(犬井鐵郞 : 물성론 및 역학), 엔도(遠藤重郞 : 역학), 도다(戶田盛和: 물성론 및 역학), 신라구(新樂和夫: 전자기학), 야나기가와(柳川禎章: 역학) 등이 있었다. 조수로는 야지마 연구실의 전평수(全平水), 오쓰가 연구실에는 김종철(金鍾喆)이 있었다.
  이공학부 물리학과는 <표I-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창립 이래 총 26명(조선인 6명, 일본인 20명)의 학생이 적을 두었으며, 당시에 물리학과 졸업생 가운데 일본인은 1944년 9월에 졸업한 네모도(根本茂) 단 1명뿐이었고, 조선인



은 6명 모두 졸업하였다. 이것은 화학과나 토목공학과의 경우처럼 조선인 졸업생이 전혀 없거나 단 1명뿐인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많은 수였다.
  <표I-6>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43년 9월 정근(丁根), 방성희(方聖熙)가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1944년 9월에는 이임학(李林學: 수학 전공), 김종철이, 1945년 9월에 이용태(李容泰)가 졸업했다. 또한 1945년 10월에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이흥국(李興國)은 1946년 7월에 경성대학을 졸업했다.

참고문헌

·김근배


·김영식, 김근배 편

·김정흠


·김종철



·박성래




·한기언

·전상운



『일제시기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의 성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6)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창작과비평사, 1998)


『한국현대문화사대계』제4권 과학기술사(上) “한국물리학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경성제국대학과 경성대학,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의 변천을 회고함“, 『한국과학사학회지』 제 23권 제 2호 (2001), 180-204

『韓國科學史』(한국방송사업단, 1982)
『한국인의 과학정신』(평민사, 1993)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1998)
『한국 과학기술자의 형성 연구』 (한국과학재단, 1995)

『韓國敎育史』(박영사, 1983)

『시간과 시계 그리고 역사』(월간시계사, 1994)
『한국의 과학사』(세종대왕기념회, 2000)
『한국과학기술사』(정음사, 1984)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설립(19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