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당시 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고등교육 기관은 문학부, 법학부, 의학부, 이공학부로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예과 3년, 본과 3년)과 3년제 전문학교로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4년제 전문학교로 경성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 대구의학전문학교, 그리고 사립으로 경성치과전문학교가 있었다.
  이들 학교는 조선인 학생보다 일본인 학생이 더 많았으며, 교수진은 전원 일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인 학생만이 다니는 학교로는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그리고 평양에 대동공업전문학교 등이 있었다. 이들 학교의 입학정원은 40명 내지 120명 정도로 당시 한국내의 조선인 학생수는 공사립을 합하여 1500명 내지 2000명 정도였고, 비슷한 숫자의 학생들이 일본에 유학하고 있었는데 인문계의 경우는 학병으로 끌려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경성제국대학은 1945년 10월 17일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미군정하의 남한에서는 좌익계열의 백남운(白南雲), 신남철(申南澈) 등을 중심으로 학술원을 조직하고는 경성대학을 접수하려고 시도하였다. 미군정청은 한말의 지사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의 아들이며 전 연희전문학교 교수였던 유억겸(兪億兼, 1895 - 1947)을 교육부장에 앉히고 우리나라 교육행정을 재편성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하면서 백낙준(白樂濬)을 총장으로, 보성전문학교는 교명을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로 바꾸고 총장에 현상윤(玄相允)을,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로 승격시키면서 김활란(金活蘭)을 총장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도 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최동(崔棟)을 총장으로, 혜화전문학교도 동국대학교(東國大學校)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주인도 없고, 교수도 없고, 학생도 거의 없는 경성대학과 여러 전문대학교에 대하여는 좌익계열의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감히 이들 학교를 접수하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군정청 교육부장으로 임명된 유억겸은 1945년 10월에 일제하 연희전문학교에서 함께 추방되었던 이춘호(李春昊: 1922년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 수학교수로 있다 일제말 추방당했던 수학자)를 경성대학 총장으로, 최규남을 경성대학 이공학부 부장대리에 임명하고, 경성대학 재건사업을 맡겼다.
  1945년 10월과 11월에는 일본에서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 조광하가 귀국하였다. 이들과 함께 당시 국내에 있던 윤일선(尹日善), 이병도(李丙燾), 이희승(李熙昇), 권중휘(權重輝), 이양하(李敭河), 김계수(金季洙), 김상기(金庠基), 고형곤(高亨坤), 고병국(高秉國), 신태환(申泰煥) 등의 협력을 받고 경성대학 본부 건물에 대학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들은 이병도를 대학원장으로, 이태규를 문리과대학장으로, 이승기를 공과대학장으로, 윤일선을 의과대학장으로 내세워 대학의 모습을 갖추고 편입생을 모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칭되고 연희, 보성,이화 등 전문학교가 대학교로 승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