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뒤 혼란기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는 이임학, 김종철, 이흥국 등이 조수나 학생으로 남아 물리학과의 문서기록, 도서를 보존하고, 실험기구들을 분해, 이전했다고 한다. 김종철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이공학부에는 일본에서도 최첨단 연구시설로 인정받던 음극선 회절장치를 위시해서 엑스선 회절장치, 6대의 고성능 분광기와 같은 화학 물리학 실험 장치가 있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국내에 남아있던 몇명 안되는 물리학자들은 경성대학 물리학과의 재출발에 노력했고 그 결과 11월 3일에 개강이 되었다고 한다. 초기의 경성대학교 이공학부 물리학과 교수진으로는 최규남, 박철재, 도상록, 정근, 전평수, 김종철, 이용태로 구성되었고, 이어서 권녕대, 한준택이 합류했다.
  경성대학 물리학과에서는 1946년 2월부터 편입생을 모집했다. 3학년에는 경성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에 다니던 오국주(吳國柱)와 이흥국이 복학하고 2학년에는 조순탁(趙淳卓), 윤세원(尹世元)이, 1학년에 이기억(李基億), 김영록(金永祿), 양인기(楊寅祺), 김영욱(金永郁), 여철기(呂鐵基), 김희규(金熙圭), 김상돈(金相敦), 김철수(金哲洙), 현정준(玄正晙) 등이 등록하여 4월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물리학과의 교수로는 역학을 담당하기로 한 최규남, 일반물리와 물성론을 담당하기로 한 박철재, 원자핵물리학을 담당한 도상록, 양자역학을 담당한 한인석, 수리물리를 담당한 전평수, 통계와 열역학을 담당한 정근 등이며 1944년에 경성대학을 졸업한 김종철은 실험을 담당하였고 학과장은 박철재였다.
  이 시기 2학년이던 윤세원과 조순탁은 1학년에 편입학을 한 김영록과 이기억을 2학년에 편입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박철재 과장에게 건의하였다. 당시 김영록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3학년에 다니다가 일본의 명문 제3고등학교로 옮겨 졸업한 뒤 해방 전 1년 동안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에서 조교로 근무한 실적이 있었기에 대학 예과만도 5년 반 가까이 다닌 셈이다. 또한 이기억은 교토제대에서 윤세원과 동기였으며, 조순탁보다는 1년 먼저 입학하고 1학기 동안 대학에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이었다. 박철재는 이들 두 사람을 교토제대 학생시절에 잘 알고 있었으므로 즉석에서 이들을 2학년으로 올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리하여 김영록, 윤세원, 이기억, 조순탁은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경성대학 물리학과는 1945년 11월 개강하고 1946년 2월 편입생을 모집한다. 최규남, 박철재, 도상록 등의 교수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