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에 오국주와 이흥국이 경성대학의 마지막 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경성대학 졸업식이 끝나자 전부터 소문으로 들리던 국립서울대학교 안이 구체화되었다. 즉 군정청은 구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6개 공립전문학교와 1개 사립치과전문학교를 합하고 여기에 음악대학(학장 현제명), 미술대학(학장 장발)을 신설하여 1개 대학원 9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소위 국대안(國大案)을 확정하고 총장에는 미군 소령인 헤리 안슈데트를, 교무처장에는 실천력이 뛰어난 최규남을 임명하였다.
  국대안은 1946년 8월 22일 공포되었는데, 국대안이 공포되기 훨씬 이전부터 좌우익 학자들과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좌익계열의 교수와 학생은 국대안을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며, 문리대 교정과 교실 그리고 정문 앞에서는 좌우 양진영 학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국대안이 공포된 뒤인 9월 5일 이공학부의 좌익계 교원 38명이 집단으로 총사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와중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서도 도상록, 전평수, 정근이 이북으로 가고, 한인석은 연희대학으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는 교무처장직을 맡은 최규남과 학생과장과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은 박철재, 그리고 김종철만이 남게 되었다.
  당시 3학년에 진급한 조순탁, 김영록, 이기억, 윤세원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과 학생들, 공과대학과 공업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일반물리를 강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들 네 사람은 공업시험소와 같은 캠퍼스 안에 있던 공업전문학교로 권녕대(權寧大)를 찾아가 국립서울대학교로 올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개성에 설립한다는 약학대학의 책임자를 권녕대가 맡게 된다는 소문이 돌았고 권녕대도 개성으로 내려갔다. 박철재는 1946년 10월경 김동일(金東日)과 함께 개성에 가서 권녕대를 만나 서울대학교로 올 것을 권고했고 권녕대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48년 5월 10일에는 남한 단독선거를 시행하고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하여 미군에 의한 군정은 폐지되고 모든 행정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하여 처리되게 되었다. 국립서울대학교도 해리 안슈데트 총장이 물러나고 최규동(崔奎東: 중동학교 설립자이며 수학교사로 방성희의 장인)이 총장으로 부임하였다. 물리학과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까지 서울대학교 교무처장을 맡고 있던 최규남이 문교부 기술교육국 국장으로 옮겨가면서 서울대학교 학생과장이며 물리학과 학과장인 박철재조차 기술교육국 부국장으로 데리고 갔다. 이리하여 물리학과 주임교수는 권녕대가 맡게 되었다.
  1947년 9월 물리학과 제1회 졸업생 4명이 졸업하였다. 교수가 아주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은 모두 학교에 남아 월급 4000환을 받는 교수조무원으로 교수 후보가 되었다. 당시 쌀 한가마(60 kg) 값이 9000환이었으니 쌀 반가마도 안되는 월급이었다. 애초에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일반역학은 김영록이, 양자역학은 이기억이, 수리물리는 조순탁이, 전자기학은 윤세원이 각각 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지창열(池彰烈)이 나타났다. 지창열은 일본 제3고등학교를 마치고 나고야(名古屋)제국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를 해방되던 해 졸업하고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토 제3고등학교 학생시절부터 잘 알던 박철재에게 공과대학 교수로서가 아니라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될 것을 부탁하여 마침내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리하여 지창열은 전자기학을, 윤세원은 고전양자론으로 원자물리학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사용한 교과서로 일반물리는 요시다 우사브로(吉田卯三郞)가 쓴 『물리학』이 널리 사용되었으며 김영록이 사용한 일반역학 교재는 다마기(玉木)가 쓴 『질점역학』이었다. 이기억은 양자역학 교재로 디랙(P.A.M Dirac)의 『양자역학 원리』(Principles of Quantum Mechanics)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윤세원이 사용한 원자물리학 교재는 좀머펠트(A. Sommerfeld)의 『원자구조와 스펙트럼선』(Atombau und Spektralinie)이었고 지창열은 일본말로 번역된 베커의 「전자기학」을 사용하였다.
  1949년 7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회 졸업생들인 조순탁, 윤세원, 김영록, 이기억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석사학위를 받았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에 미국 군인을 임명하고 '국립대학안'을 발표하자 동맹 휴학과 좌우 갈등이 심화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는 1947년 제1회 졸업생을 4명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