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1946년 9월 15일 대동공전이 모체가 되어 김일성 종합대학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물리학과가 설립되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는 경제·법학부, 역사·문학부, 물리·수학부, 공학부, 운수공학부, 농학부, 의학부 등 7개 학부가 있었으며, 교원 68명에 학생정원 1500명으로 개교했다.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과가 설립되는 데에는 도상록(都相祿)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03년 10월 13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한 도상록은 1925년 오카야마(岡山)의 제6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에 입학, 1930년에 졸업했다. 졸업후 대학 도서관에서 잠시 일하면서 잡지와 문헌을 수집한 그는 귀국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수소와 결합한 헬륨 이온에 관한 양자역학적 취급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이 논문은 1940년 일본물리학회의 영문학회지인 「일본수학물리학회기사」(日本數學物理學會記事, 1940) 제22권에 게재되었다. 도상록은 1940년경 만주의 신경공업대학(新京工業大學)의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후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을 맡기도 했으나 1946년 6월 4일 좌익 활동과 관련하여 이공학부장에서 파면당했다. 파직 후에도 국대안 반대운동에 앞장서다 월북하여 1946년 7월 3일 김일성을 만나고 종합대학 창립 준비위원이 되어 김일성종합대학의 설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초창기 김일성종합대학 창설에 기여한 공로로 그는 1952년 이북에서 과학원이 설립되었을 때 홍명희(洪命憙), 최삼열(崔三悅: 경성고공 토목과, 1919; 제6고등학교, 1923; 도호쿠대 화학과, 1927; 교토제대 조수 및 이화학연구소 근무), 계응상(桂應祥), 백남운(白南雲), 최명학(崔明鶴), 이승기, 박시형(朴時亨) 등과 함께 원사(院士)에 임명되었다.
  도상록이 월북하기 전에 이북에는 이미 신건희, 전평수가 활동하고 있었다. 1933년 교토제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신건희는 해방 당시 여순공전에 있다가 해방 직후에는 고국으로 돌아와 평양의 대동공전에서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역시 월북한 전평수는 1916년 경북에서 출생하여 1939년 도쿄물리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홋카이도(北海道)제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뒤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경성제대 조수로 임명되어 야지마 연구실에서 일했다. 육이오전쟁 이전에 월북한 물리학자로는 도상록, 전평수, 정근(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 경성대 교수로 있다가 월북, 북한 핵개발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핵물리학자), 이용태, 손원록(교토제대 물리학과 선과생; 이화여고 교사로 있다가 월북), 이흥국 등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창설과 물리학과 설립에 도상록이 큰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