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회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해방직후로 거슬러올라간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물리학과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 바뀌고, 연희전문학교의 수물학과가 연희대학교의 물리기상학과(1950년부터 물리학과)로 재출발을 하게 되자 몇몇 의욕적인 사람들은 하루빨리 학문 활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물리학회를 조직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수가 열명 내외였고, 그나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때 중학교육에 종사한 경험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학회를 조직해봤자 학문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론도 등장하였다.
  학회 창립에 대한 시기상조론이 분분한 가운데 우선 물리학회를 단독으로 설립하기보다는 수학계와 함께 합동으로 ‘수물학회’를 조직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1946년 10월 수학자인 최윤식(崔允植, 1899 - 1960)의 주도로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동시에 참여하는 수물학회가 결성되었다.
  최윤식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비로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에 유학했던 사람이었다. 1922년 도쿄제대에 들어간 그는 1925년 수학과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학교 초대 수학과 주임교수와 조선수물학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1954년에는 조선수물학회에서 분리 독립한 대한수학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수물학회는 창립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비롯해서 각 대학의 수학, 물리학 교수, 중학교의 수학, 물리 교사, 대학생 등 약 50명 정도가 참여했다. 수물학회는 창립한 뒤에 수차례에 걸쳐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으나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육이오전쟁을 맞게 되었다. 수물학회에서는 최종환, 한인석 등 좌파 학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수물학회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찰서에 구금된 사람도 있었다.
  결국 물리학자보다는 수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고 좌익 성향의 단체로 낙인찍힌 조선수물학회는 좌파 학자들이 월북하면서 점차로 활동이 없어지다가 육이오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활동이 마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