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국가측정표준을 확립하여 유지하고 보급하는 국가표준기관에서는 주로 물리량으로 구성된 기본단위의 실현이 연구대상이므로 표준연구소는 물리연구소의 성격이 강하다. 세계 최초의 국가표준기관으로 1887년에 설립된 독일의 연방물리기술청(PTB)과 1900년에 설립된 영국의 국립물리연구소(NPL)의 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측정표준과 첨단기술은 상호보완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물리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연구결과가 측정표준확립에 바로 응용되는 경우도 많다. 조셉슨효과를 전압표준실현에 응용하고 양자홀효과를 전기저항표준에 사용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0년대부터는 레이저냉각을 이용하여 더 정확한 시계개발, 즉 시간표준 확립을 위하여 각국의 표준기관에서 경쟁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1975년에 설립되어 이제 성년기에 접어든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발전과정을 물리학과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한국표준연구소의 설립

  1960년대 중반 현대산업의 발달에 따라 국가측정표준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한 시대적 요청이 연구소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라 하겠다. 이 무렵은 우리나라 제1차 5개년 경제개발 계획(1962 - 1966년)이 시작되어 공업화를 서두르고 수출에 역점을 두게 되면서 선진기술의 도입이 불가피하게 된 시기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존슨 미국 대통령과 한·미 과학기술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66년에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두나라 사이의 과학기술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진전을 시켰으며, 이 결과 설립된 것이 정부출연연구소의 효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이다. 이때에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미 과학기술협력의 상징으로 미터계 표준(질량, 부피, 길이) 한 벌을 기증하였는데 이 시기를 연구소의 태동기로 볼 수 있다.
  1967년에 3명으로 구성된 미국립표준국(NBS) 조사단이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후원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시험, 표준 및 연구제도에 관한 조사를 하였다. 즉 국가 물리표준 체계의 중요성, 제도의 미비점, 정부의 책임, 기존 기구의 검토 등에 대한 조사결과를 얻고 표준관련 기관을 통합하여 NBS와 같은 단일기관을 형성할 것을 추천하였다. 1972년에 내한한 2차 NBS 조사단의 방문 목적은 한국이 목표로 하고 있는 공업화를 뒷받침할 만한 표준제도와 측정지원 태세가 되어 있나 살펴보고 어떤 문제점이 있나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1974년 9월 한국정부는 제너럴 일렉트릭사(GE) - TEMPO 조사단에 한국의 국가표준제도에 관한 조사를 하도록 용역을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표준연구소 설립의 타당성 조사이다. 이 조사의 목적은 그 당시와 장래에 발생할 표준화 수요를 충시족시키는 데 필요한 조직상의 변경을 제해주고 획득해야 할 소프트웨어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한국표준연구소(KSRI; Korea Standards Research Institute)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연구소 설립의 구체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연구소가 설립된 1975년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 - 1976년)의 수행이 거의 끝나는 시기로 수출이 50억달러에 이르게 되어 수출품의 품질보증이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나타나게 되었고, 품질관리를 위하여 표준의 필요성을 시급하게 느끼게 되었다. 또한 그때까지의 경공업 위주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전환 발전시키는 단계가 되어, 높은 정확도의 표준에 대한 요구도가 커져 이에 대한 해결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정확한 표준의 필요성을 한층 더 절실하고 시급하게 느끼게 해준 것은 방위산업 분야이다. 자주국방력을 확립하기 위하여 이 분야의 연구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실제 생산에 들어가는 데 현실로 당면한 문제가 바로 정밀가공 및 측정기술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정확한 국가표준의 확립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GE - TEMPO 조사보고서의 검토에 따라 정부는 한국표준연구소 설립에 대한 정책적 결정을 내리고 1975년 8월 22일 특정연구기관으로 지정 공포하였다. 동년 9월 10일에는 한국표준연구소 설립을 위한 AID차관 500만달러의 협정조인이 있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설립자로 하는 설립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2월 5일에는 재단법인 한국표준연구소의 설립이 인가되었고 12월 24일 등기를 완료하였다. 초대 소장에는 상공부 중공업차관보와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소장을 역임한 김재관이 임명되었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99번지의 국립공업표준시험소 내에 한국표준연구소 임시 사무실을 설치하여 업무를 시작하였다. 연구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는 NBS조사단 일원으로 참여하고 표준연구소와 NBS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NBS의 국제협력실장 파이저(H. S. Peiser)와 초창기 표준연구소 고문으로 활약한 전 과기처장관 정근모가 특기할 만하다.

초창기의 한국 표준연구소(1976 - 1980)

  표준연구소의 연구진 구성은 1976년 3월, 당시 KIST의 반도체 재료연구실장 겸 재료연구부장이던 정원이 표준담당 부소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연구원으로는 한국과학원(KAIS)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물리학과의 원종욱(원다 레이저), 재료학과의 유한일(서울대)이 최초로 입소하였다. 1976년 7월에는 첫번째 해외유치과학자로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고체물리실험을 전공한 정낙삼이 미국 NBS에 위치한 표준연구소 재미사무실에 현지 입소하여 기술조정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초창기 연구소의 연구조직은 표준담당 부소장 산하에 역학표준, 전기표준, 열표준, 방사선표준, 화학표준, 재료표준 등 6개 표준분야에 길이, 질량, 전기, 온도, 광학 등 19개의 연구실로 구성되었다. 연구실은 박사급의 실장과 수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되는데 대다수가 물리학 전공자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77년 3월에는 과학원에서 물리학분야의 석사학위를 취득한(과학원 3회) 젊은 연구원들이 대거 입소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김현중(한림대), 이호근(강원대), 신성철(과기원), 정해양 (경희대), 서상준이 포함되어 있다.
  실장급으로 1977 - 1979년에 입소한 연구원으로는 1977년 4월 독일에서 초전도실험을 전공하고 귀국한 남균(연세대)이 전기표준실장으로 입소한 이래,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이충희(전 표준연구소 소장), 미국에서 유치된 박종철, 김철구(연세대), 임동건(고려대), 강주상(고려대), 정명세(전 표준연 원장), 정광화, 이세경(표준연 원장) , 김창석, 은희준(전 표준연 원장) 등이 입소하였다. 또한 원자력연구소에서 전재식(충남대), 일본에서 강석태(연세대)가 입소되었다. 도진열, 고재귀(숭실대), 이래덕, 박태순, 전덕영(과기원), 홍정기(포항공대) 등은 연구원으로 초창기에 입소한 사람들이다. 물리학분야에서 많은 젊은 과학자들이 외국에서 입소한 배경에는 당시 표준부소장이던 정원의 물리학자로의 명망과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정원은 불행히도 표준연구소의 발전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81년 10월 숙환으로 타계하였다.
  1976년 9월에 충남 대덕군 탄동면 도룡리 일대 현장에서 연구소 기공식이 거행되어 연구소 건설이 시작되었고, 1977년 말에는 직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서울사무소를 2002년 현재 물리학회가 위치한 한국과학기술회관 본관 7, 8층으로 이전하였다. 연구소가 완공되어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200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은 1978년 3월말이다.
  초창기의 연구원들이 수행한 주요업무는 AID 차관으로 도입하게 되어 있는 연구기자재의 구매추진이었다. 500만 달러의 차관 중 약 300만 달러를 700여종의 측정기기 구입에 사용하였다. 다행히도 측정표준 확립에 필수적인 장비와 설비의 규격이 국제적으로 잘 정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GE - TEMPO 보고서와 표준연구소 설립시 체결한 NBS와의 양해각서에 따라 NBS의 도움을 받아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수행업무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연구원들이 작성한 기자재의 규격명세서는 일차적으로 NBS 주재 기술조정관에게 보내져 NBS의 분야별 전문가의 기술검토를 거친 후 구매가 추진되었다.
  연구소 설립초기에 NBS의 지원은 연구소발전에 절대적인 힘이 되었다. NBS에 행정조정관과 기술조정관이 상주하면서 행정조정관은 재미 한국과학기술자협회 회보에 광고를 내고 현지에서 전화나 서신으로 연구소를 소개하고 수시로 면담하여 많은 과학자를 빠르게 유치할 수 있었다. 기술조정관은 NBS 전문가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SI 기본단위 표준뿐만 아니라 초창기 연구소 형성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받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입소한 연구요원에 대한 개별적인 기술연수를 받게 하였고, 유치된 과학자들은 대부분 표준 및 측정과학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귀국하기에 앞서 6개월 정도 NBS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다. 이와 같은 교육훈련을 통하여 연구소는 필요한 전문인력을 빠른 시간에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국가표준확립의 기틀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표준연구소로 성장한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 물리학회와 관련하여 특기할 사항은 1978년 10월 한국물리학회 총회 및 학술발표회를 신축된 표준연구소에서 개최하였다는 사실이다.

성장기(1981 - 1991)

  1980년대 초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런 시기였다. 제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모든 분야의 숙정작업과 정부출연 연구소의 통폐합이 이뤄졌다. 다행히도 표준연구소는 특수성을 인정받아 독립기관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많은 간부급 연구원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초창기에 입소했던 젊은 연구원들이 많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80년대 초기에는 본격적인 표준연구를 하기에는 장비와 시설이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우선은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기기교정과 산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 연구원들의 주요 업무였다. 중소기업지원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산업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지원하는 일이 많던 시절이다.
  1982년에 과학기술처가 지원하는 특정과제가 시작되면서부터 연구비의 규모가 커지고 본격적인 연구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즈음에 아시아개발은행(ADB)차관 800만 달러가 도입되어 부족했던 필수 교정장비의 보완과 아울러 연구장비도 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어서 OECF차관 10억엔과 2차에 걸친 IBRD차관 1500만 달러가 도입되어 많은 연구장비와 시설이 도입되었다. 표준분야도 초기에 기본단위를 위주로 하는 물리표준에서 벗어나 재료공학적 표준과 소재평가분야의 표준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개발을 수행하였으나 표준연구의 특성상 물리학을 비롯하여 기초연구가 주종을 이루었다.
  국가표준확립에 필요한 장비는 대부분 외국에서 구입하였으나 원기급에 해당하는 기기는 자체에서 개발하여야 한다. 초창기에 길이분야의 표준기인 요오드(I2) 안정화 헬륨 - 네온레이저를 NBS와 공동으로 개발하여 10 - 10의 정밀도를 유지함으로써 국내 정밀측정기술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후 자체에서 개발한 레이저로 국제비교에 참여하여 선진국과 동등한 수준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1983년에는 국내 최초로 헬륨액화기를 설치하여 저온표준 및 조셉슨전압표준과 관련된 초전도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는 그후 1986년에 발견되어 세계적으로 엄청난 연구 붐을 일으킨 고온초전도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현재 수행중인 초전도양자간섭장치(SQUID)를 이용한 생체자기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성장기(1981 - 1991)에 해당되는 10년 사이에 연구비 규모가 84배 증가되었고, 연구인력의 수도 1990년에 208명으로 증가하였는데, 그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100여명에 이르게 되어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임계수준에 도달하였다. 당시 출연연구소의 시설은 대학은 물론이고 산업체보다 월등히 좋아서 많은 신진 과학자가 연구소를 선호하던 시기이다.
  표준연구소의 국제적인 위상도 올라가서 1988년에는 국제측정표준의 본산인 국제도량형위원회(CIPM)의 측정자문위원회 중에서 길이(CCL), 온도(CCT), 광도·복사도(CCPR) 분야의 회원기관으로 피선되었다. 표준연구소는 측정표준의 기초가 되는 기본물리 상수연구에 착수하여 조셉슨상수, 양자홀효과, 양성자 자기회전비율, 아보가드르상수, 중력가속도 측정 등 국제표준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연구를 수행할 많은 물리학자들을 유치하였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연구소는 1992년에 전기자기(CCEM), 질량(CCM), 시간·주파수(CCTF)분야의 측정자문위원회 회원기관으로 피선되었고, 1994년에 물질량(CCQM)분야, 1997년에 방사선(CCRI)분야, 2000년에 음향·진동(CCAUV)의 측정자문위원회에 가입됨으로써 총10개 자문위원회 중 현재 9개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대등한 자격으로 활발한 기술교류를 하고 있다. 또한 1996년에는 당시 원장이던 정명세가 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위원으로 선출됨으로써 표준연구소가 명실공히 선진표준기관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성장기 연구소 조직의 한 특징은 행정 기획부서의 상대적인 축소이고 이에 따른 행정인력 비율의 감소이다. 부소장 제도가 폐지되면서 1983년 표준연구부를 표준1부와 표준2부로 분리하는 동시에 기술부를 기술지원부로 개칭하였다. 성장기 조직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정밀계측기기의 수리와 개발을 담당하는 정밀기기 수리센터가 설치된 것이며, 여기에는 도재홍 부장과 이정순(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의 기여가 크다고 하겠다. 이 센터는 정밀기기개발 기능에 치중하면서 후에 정밀계측기기센터로 개칭되었다.
  성장기에 입소하여 연구소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물리학 전공 또는 물리분야 연구원으로는 이인원, 노삼규, 박용기, 송양섭, 이호성, 구자용, 김창순, 엄태봉, 정영붕, 강기훈, 감기술, 이규원, 이윤우, 박승남, 윤태현, 조현모, 신용현, 안봉영, 김규태, 서호성, 신은주, 이용호, 허남회, 하동한, 권혁찬, 박철웅, 서정철, 이주인, 김현경, 엄천일, 남현수 등이 있으며, 거의 같은 수의 많은 물리학자가 연구원을 떠나 대학이나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약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동안의 연구가 결실을 맺어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한다. 1993년에는 조셉슨전압표준 실현에 사용할 수 있는 1 V 조셉슨 어레이(Josephson array)를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네번째로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2000개 이상의 조셉슨접합으로 이루어진 칩으로 초전도기술, 전자파기술, 반도체 제조공정기술이 합쳐진 작품이다. 2002년에는 1만8000개의 접합으로 된 10 V 어레이 제작에도 성공하여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밖에 단전자 터널링(SET), 주사형 터널링 현미경(STM)을 개발하고 측정표준에 응용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모든 물리량 중에서 가장 많이 측정되고 가장 높은 정확도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시간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더 높은 정확도의 시간측정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더 정확한 시간표준이 요구된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표준과학연구원에서는 시간표준확립을 위하여 원자시계 개발을 1988년부터 추진하여 왔으며 2000년에는 광펌핑 원자시계를 완성하여 10 - 13 수준의 정밀도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현재는 차세대 시간표준인 원자분수시계(atomic fountain clock)를 개발 중인데 10 - 15의 정밀도를 목표로 한다. 그밖에 국제온도눈금(ITS - 90) 실현을 통하여 국제적인 수준의 온도눈금을 확립하고 습도 및 수분 표준관련 연구, 각종 고체재료의 정밀한 열물성 평가기술의 확립, 전자파 미소열량계로 전달표준기인 서미스터 마운트의 실효효율 측정에 의한 전자파 전력의 국가 표준 유지, 광도의 측정표준 확립, 복사도, 색채, 복사온도, 박막상수 측정, 그리고 결상광학계 평가 등의 국가표준 관련 거의 모든 분야의 연구가 물리학의 뒷받침에서 가능하게 된다.
  계속적인 성장과 확장의 길을 걸어온 연구소는 외부로부터의 거센 개혁의 요구와 함께 조정 및 안정기(1991 - 2002)를 맞게 되었다. 특히 1991년에 있었던 정부의 연구기관 운영평가 결과에 의해 일부 연구기관들이 통폐합되었는데, 이때 천문대와 기초과학지원센터(현 기초과학지원연구원)를 당시의 한국표준연구소에 흡수 통합시키면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그후 두 기관은 분리 독립하였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통합·축소·조정을 거쳐 당시 많은 연구원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으며 연구인력의 대량 이직현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한때는 500명에 육박하던 직원수도 1998년도에 구조조정을 거쳐 2002년 현재 335명으로 감소하였다. 이중에서 박사학위 소유자가 152명이며, 물리학 박사는 62명이다. 초창기에 비하여 물리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줄었지만 여전히 가장 많다. 아마 단위기관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물리학회 정회원을 보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1990년 이후에 입소한 물리학자로는 황찬용, 박세일, 박병천, 이종만, 정성수, 성대진, 강주식, 이근섭, 권택용, 김진태, 김진희, 임종연, 박용섭, 김재완, 이경범, 정재갑, 이재용, 이인호, 김원동, 김용태, 조용재, 김남, 유대혁, 이원규, 김완섭, 김기웅, 김문덕 등이 있으며, 물리학 전 분야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는 물리표준부 산하 4개 그룹 (질량ㆍ힘, 온ㆍ습도, 유체유동, 음향진동 그룹), 전자기표준부 산하 4개 그룹 (전기ㆍ자기, 전자파, 전자소자, 초전도 그룹), 광기술표준부 산하 4개 그룹 (길이, 시간주파수, 광도영상, 레이저계측 그룹), 물질량표준부 산하에 3개 그룹과 소재특성평가센터(재료평가그룹, 나노표면 그룹), 산업측정표준부 산하 안전계측연구센터 (비파괴계측 그룹, 강도평가그룹)와 교정ㆍCRM센터, 환경계측그룹, 인간ㆍ정보 그룹, 기계공작실 및 표준조사그룹 등이 조직되어 있다. 이밖에 계측기기연구센터, 정보통신표준센터, 진공기술센터, 창의적 연구지원 사업단, 중점 국가연구개발 사업단 등이 조직되어 있고, 7개 분야의 국가지정 연구실이 운영되고 있다. 측정표준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정보기술(IT)과 관련된 연구개발이 활발하게 수행되고 있다. “21세기 정보화시대를 맞아 국가경쟁력강화에 기여하는 최고의 표준기관으로 도약”하려는 비전으로 국제표준기구에서의 협력과 활동을 강화하여 2005년까지 세계 7위의 국가표준기관을 목표로 기술개발의 강도와 수준을 높여 나가고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물리학이 국가표준과 초정밀 측정에 직접 적용되고 있는 현장이며 앞으로도 물리학이 중심이 되는 연구기관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1] 한국표준연구소 10년사, 한국표준연구소, 1986
[2] 한국표준과학연구원 20년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1997
[3]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개책자, 2002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개책자, 2002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에 이어 1966년 존슨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한·미 과학기술협력이 구체화되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존슨대통령이 협력의 상징으로 미터계 표준 한벌을 기증하였다.

 

 

 

 

 

 

 

 

 

 

 



1975년 12월 한국표준연구소 설립.

 

 

 

 

 

 

 

 

 

 

 

 

 

 




1978년 3월말 연구소가 대덕연구단지내 2002년 현재위치로 이전

 

 

 

 

 

 

 

 

 

 

 

 

 

 

 

 

 

 

 

 

 

 

 

 

 

 

 



한국표준연구소는 1988년 국제 도량형위원회 자문위원회 화원기관으로 피선.

 

 

 

 

 

 

 

 

 

 

 

 

 

 

 

 

 

 

 

 

 

 

 

 


1993년 문민정부가 출연연구소들을 축소·통합하여 주요연구인력이 대량 이직. 2002년 현재 152명의 박사연구원중 물리학 박사는 6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