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운(東雲) 최규남(崔奎南, 1898-1992)은 1898년 1월 26일 경기도 개성 숭록동에서 최상억 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으며 기독교 신자였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9세이던 1907년 남감리교 학교인 한영서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한영서원은 그가 입학한 뒤 송도고등보통학교로 바뀌게 되어 결국 그는 1918년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후 최규남은 가정형편상 송도보통학교와 송도고보의 훈도와 체육교사로서 각각 2년씩 근무한 뒤 1922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4회로 입학하였다. 입학 당시 연희전문 수물과는 30명 정원에 17명이 입학했는데, 최종 졸업인원은 6명에 불과했다. 교과과정상에는 물리, 화학이 다 있었으나, 전공교수를 구하지 못해 1학년 때는 수물과임에도 불구하고 물리를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다행히 수학과목만은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춘호가 ‘고등 대수’, ‘삼각 해석기하’, ‘미적분’, ‘미분방정식’ 등의 교과목을 개설하여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1926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최규남은 192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 입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1930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재학중 ‘라만 효과의 분광학적 고찰’, ‘Compton 효과의 재음미’ 등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특히 1930년 1월호 Physical Review에 “Infra Red Absorption Spectrum of HCN”을 발표했다. 이어 미시간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미시간대학 재학 중 그는 Physical Review 1931년 4월호에 “Infra Red Absorption Spectrum of CO2”을 발표했다. 1932년에는 “Announcement of the new value of Moment of Inertia of the HCN Molecule”이라는 이름의 시안화수소의 적외선 흡수 스펙트럼에 관한 연구로 이학박사를 받았다. 이 논문에는 시안화수소 분자의 관성능률의 측정치를 18.68 10 - 40g Cm2로 발표했는데, 이 값은 수정이 없이 오늘날도 채택되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최규남은 1934년부터 1944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연희전문학교를 접수, 일본인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교명조차 바꾸었다. 이때 최규남은 이원철, 유억겸, 최현배, 이춘호, 백남운 등과 함께 연희전문학교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후 연희대학교를 접수하는 일에 참여하다가 1947년 서울대학교 교수로 적을 옮겼다. 최규남은 경성대학과 국립서울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고 교무처장을 맡으면서 서울대학교의 초기 기반을 닦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건국 초기 과학기술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그는 1948년 문교부기술교육국장이 되었으며, 1950년 4월에는 문교부 차관으로 승진하였다.
  육이오전쟁이 발발하고 서울대학교 최규동 총장이 납북되었기 때문에 1950년 10월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이던 김두헌이 서울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가 되었다. 1951년 9월 최규남은 전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제5대 총장직을 맡았으며 총장 재임중이던 1952년 한국물리학회를 창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물리학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10월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54년 5월 대한민국 학술원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학술원 부회장이 되었다. 1956년에는 문교부 장관으로 교육정책에도 많은 역할을 했으며, 1958년에는 민의원이 되어 정치에도 관여했다. 1957년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를 수여받았다. (저서: 『원자』(1959), 『동운논집』(1959))




동운 최규남
(1898~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