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교부는 1952년 2월 미 8군과 민간원조처(UNCACK)를 통하여 가교사 1000 교실분의 자재(목재, 시멘트, 유리 등)를 원조받았고 이것으로 부산을 비롯한 각지에 바라크 건물을 세웠다. 이 가운데 서울대학교는 문리과대학에 10교실, 의과대학에 10교실, 사범대학에 31 교실을 각각 배정받았다. 바로 이 ‘바라크 가교사 시절’에 한국물리학회가 창설되었다. 서울대학교는 부산시 서대신동 구덕산(九德山) 산기슭에 대지 1000평이 채 안되는 터에 미군으로부터 원조받은 목재로 교실 서너개가 있는 건물 네다섯동을 짓고 여기에 1952년 3월부터 피난 국립서울대학교를 개교하였다.
  최규동 총장은 육이오전쟁 초기에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기 때문에 잠시 문교부 관리가 서울대학교 총장 권한대행을 맡았다가 문교부 차관으로 있던 최규남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최규남은 1951년 9월 3일 서울대학교 제 5대 총장(1956. 6. 8까지 재임)으로 부임했다. 부임 후 최규남 총장은 전란기의 서울대학교를 잘 이끌어나갔으며, 이 시기를 이용해서 한국물리학회를 창립했던 것이다.
  당시 문리과대학은 부산시 대신동 저수지를 둘러싼 우거진 숲가(서대신동 3가 54의 3)에 가교사를 세웠다. 총장실은 광복동 3가 3번지에 있었는데, 의과대학 사무실로 쓰는 목재 이층건물의 방 하나를 얻어 활용했다고 한다. 바로 이곳 총장실에서 한국물리학회가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