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피난시절인 1951년 2월 어느 날 윤세원은 부산 구덕공설운동장 근처에서 우연히 최규남 총장을 만나 졸지에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부산시절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는 김종철, 지창열, 이기억, 김영록, 윤세원, 조순탁이 있었으며, 해군 소령으로 진해에서 근무하던 권녕대는 1953년부터 서울대에 다시 합류했다. 이외에도 서울대 사대 물리학과에는 정연태가 있었다.


  1950년까지 한국에는 2개 대학교에 3개의 물리학과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국물리학회가 정식 출범하기 직전인 1952년 9월까지 이 두 대학을 졸업한 물리학 전공의 이학사 수는 <표I-9>와 같다. 이 표의 작성에 있어서 물리화학과(서울대 사대), 물리기상학과(연희전문)와 같은 복합학과의 경우에는 물리학 전공자만을 가려내어 통계 처리를 하였다.
  한편 해외에서는 광복후 일본에서 물리학 전공의 이학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2명(교토제대의 후신인 교토대학, 동경물리학교의 후신인 동경이과대학에서 졸업), 미국에서 이학사를 받은 사람이 워싱턴 주립대에서 1명이 있었다.
  이들을 포함해서 1952년 한국물리학회가 창립되기 전까지 대학을 졸업한 한국인 물리학자의 총수는 북한(10명 정도로 추정)과 해외를 통틀어 박사 3명, 학사 77명, 기타 2명 등 총82명이었다. 전문대학 졸업생으로는 일본 전문대 출신 10명과 연희전문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당시 각급 학교의 물리학 교육을 담당하였고 그중 일부는 각 대학의 물리학과 설립을 주도하였다. 동아대학에 이범삼, 김철수, 김영함, 국립해양대학에 이범삼, 부산대학에 김규태(金圭泰) 한화석(韓華錫), 경북대학에 라병욱(羅炳旭) 강영호(姜榮浩) 조병하(趙炳夏) 진영선(秦榮善), 전북대학에 노판우 김근희 백동기(白東基), 전남대학에 최방 송계범 오국주(吳國柱), 조선대학에 조판상(曹判尙), 충남대학에 조병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