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원의 회고에 의하면 물리학회를 처음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최규남이었다고 한다. 또한 지창열의 증언에 의하면 최규남은 당시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차 대전 직후 “앞으로는 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이 세계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언급을 상기하며 육이오전쟁으로 황폐해진 우리나라에서도 시급한 일은 국가와 민족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며 물리학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며 물리학회 창립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윤세원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에 이기억은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처음에 물리학회 창립에 반대했지만, 조순탁과 윤세원이 중심이 되어 학회 창립을 추진했다고 한다.
  한국물리학회를 조직하기 위한 제1차 준비모임은 부산 피난시절인 1952년 11월 2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본부에서 열렸다. 그날 최규남, 박철재 외 10여명이 출석하여 학회의 명칭 및 성격을 토의한 뒤 회칙 초안 기초위원(起

草委員)으로 조순탁, 김창영(金昌榮), 정연태, 윤세원을 임명하고 산회하였다. 제2회 준비회는 1952년 11월 9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 본부(부산)에서 박철재, 권녕대 외 12명이 참가하여 회칙 토의가 있은 뒤 발기인회 개최 준비를 회칙초안 기초위원에게 일임한 뒤 산회하였다.
  1952년 11월 16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 본부(부산시 광복동 3-3번지, 현 동주여상 자리)에서 최규남, 권녕대, 박철재 외 18명이 참가하여 발기인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회칙을 검토하고 회원 자격을 토의했으며, 총회 준비위원으로 김병렬(金炳烈), 윤일병(尹日炳), 윤세원, 김창영, 정연태, 조순탁을 임명하고 산회하였다.
  한국물리학회 발기총회는 1952년 12월 7일 오후 2시 서울대학교 본부(부산

창립임원단

·회장 : 최규남
·부회장 : 박철재
·운영위원 : 손계술 라병욱 오국주 박흥수 현정준 권녕대 김종철 김영록
                조순탁 윤세원 이기억 지창열 김희규 정연태 방성희 김창영
                김병렬 윤일병 이철주 한준택 박재영



시 광복동 3-3번지, 현 동주여상 자리)에서 개최되었다. 김영록의 사회로 임시의장은 최규남이 맡았다. 윤세원의 경과보고 뒤 회칙을 통과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에는 최규남, 부회장에는 박철재, 운영위원을 선임하고(88쪽 참조) 회장 인사 뒤에 산회하였다. 이외에도 안세희(安世熙), 김상돈, 박동수(朴東秀), 김정흠(金貞欽) 등이 참석했다. 당시 회원은 모두 34명이었다. 총회 직후 서울대학교 총장실에 모여 운영위원회를 개최하여 상임위원으로 김창영, 김종철, 조순탁, 이기억, 지창열, 김영록, 윤세원, 정연태, 윤일병을 선임하여 총무, 편집, 사업, 재무를 합동 위임시킨 뒤 산회하였다. (윤세원, “韓國物理學會 經過記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연구회 회지 「物理學硏究」 창간호, 1954년 12월 pp. 42-43.) (「새물리」창간 10주년 기념 좌담회의 “윤세원의 회고”) 제2차 정기총회는 1953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본부(부산)에서 개최되었고, 총회가 끝난 뒤 학술강연회가 열려 박철재의 “고무의 결정화”에 관한 연구발표회가 있었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는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하였으나 제2차총회 이후 물리학회는 환도 직후의 여러가지 사정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1954년 4월 28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회원 35명으로 가입했지만 유네스코로부터는 별다른 혜택이나 연락이 없었다.


 

 

 

 


1952년 11월 2일 학회 창립을 위한 준비 모임이 열렸다.

 

 

 

 

 

 

 

 

 

 

 

 

 

 

 

 

 

 

 

 

 

 



1952년 12월7일 한국 물리학회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