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1월 10일 한국물리학회는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 부회장 1명을 2명으로 증원하여 권녕대가 새로이 부회장이 되었다. 이 총회와 연결되어 열렸던 학술강연에서 박철재는 “제네바국제원자력회의”에 대한 참가보고를 하였고, 김준명(金俊明)은 “우주선측정 결과”보고를 하였다.

제 3회 총회(1955)이후의 임원단

· 회장 : 최규남
· 부회장 : 박철재 권녕대
· 상임위원
   _총무 한준택 윤세원 _편집 박홍수 김영욱
  _사업 정연태 김정흠 _재무 지창열 김창영
· 감사 : 손계술 노판우 윤일병

  1956년 6월 23일 제4회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가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최규남은 “생산성교육에 대하여”, 이철주(李鐵柱)는 “미국물리학회의 동향”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총회에서는 처음으로 회원명부가 작성, 배포되었고, 각 대학 사이의 교류와 친선을 위해 전국대학물리학과 대항 친선배구대회를 다음날인 6월 24일 개최하였다.
  이미 1955년부터 원자력연구는 물리학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55년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선언하고 핵연료를 후진국에 대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우리나라와도 원자력쌍무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원자력 평화이용 계획의 일환으로 아르곤원자력연구소에 국제원자력학교(School of Nuclear Science and Engineering)를 부설하고 전세계 중견과학자를 불러모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과학적, 공학적 지식을 전수하였다. 1955년 8월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이며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이었던 박철재는,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 교수 윤동석(尹東錫),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 교수이면서 미국 유학 중이던 이기억과 함께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국제원자력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3명의 대표들은 한국의 전력수급 전망과 우라늄, 토륨을 비롯한 지하자원의 분포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귀국하기 전 1개월간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ORNL: Oak Ridge National Laboratory)를 방문하여 원자력 연구의 실태를 눈으로 확인한 박철재는 귀국 즉시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윤세원에게 제네바회의 내용과 ORNL에서의 연구활동을 소개하고 원자력 연구개발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윤세원은 즉시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던 김준명과 상의하여, 그에게서 레이먼드 머레이(Raymond Murray)의 『핵공학개론』(Introduction to Nuclear Engineering)과 미국 원자력위원회에서 발행한 『실험원자로』(Research Reactors)라는 책을 얻어냈다. 윤세원은 이 책을 등사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나 화학과, 공대를 졸업한 30대 전후의 젊은 학자들을 모아 비공식적인 세미나 그룹을 조직하였다.
  1956년 당시의 연구 그룹 참석자 가운데 윤세원, 김희규, 김준명, 이영재(李永在), 민광식(閔光植), 최창선(崔昌善), 박혜일(朴惠一) 등은 1962년 5월 8일 당시 한국물리학회의 회원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초창기 원자력연구에 물리학자들과 물리학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최초의 원자력 연구요원 파견 후보로는 윤세원, 김희규, 김준명, 민광식 등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김준명, 민광식은 건강검진 결과 해외여행 결격으로 판명되어 출국하지 못하고 1956년 4월 윤세원, 김희규 등 2명만이 파견되었다. 이리하여 1956년 4월 2명으로 시작된 원자력 분야의 해외연구생 파견은 1963년 8월에 이르면서 189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125명이 국비로 파견되었다.
  윤세원은 미국 아르곤원자력연구소 부설 국제원자력학교를 마친 뒤 1957년 1월 귀국했다. 정부는 원자력연구를 추진하기 위해 문교부에 원자력과는 만들었지만, 원자력과에는 담당 과장도 없는 상태였다. 윤세원은 원자력과장이 되기 전에 군복무를 하고 있던 이영재에게 원자력과에 근무하면서 박철재를 보필하라고 했다. 이영재는 정보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원자력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는 데 아주 적임자였다.
  최규남은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한 뒤 윤세원에게 서울대교수를 그만두고 원자력과장을 맡으라고 했다. 당시 원자력과에서 일하던 이영재는 단국대학교로 옮겨 유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최규남 장관은 윤세원을 원자력과장으로 발령을 내놓았다. 윤세원은 파리에서 열린 동위원소이용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서 원자력과장으로 발령이 났음을 알았다. 이리하여 1957년 10월 윤세원은 문교부 기술교육국의 원자력과장을 맡아 정식 집무를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적인 면을 고려해서 원자력연구소를 해군부대가 가까운 진해에 세울 것을 원했다. 박철재는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에 군의 호위를 받는 것이 좋다고 했고, 부흥부는 공장부지로 간접 투자가 많이 이루어졌던 충주비료공장 부근을 추천했다.
  윤세원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원했고, 부지 물색을 위해 서울 주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서울 주변을 후보지로 물색하다가 윤세원은 안양 부근에 있는 수리산 계곡을 원자력연구소 건설 후보지로 생각했다. 이 지역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안쪽으로 아주 넓은 장소가 있었다. 하지만 용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을 물색하고 다니던 중 이곳이 미군의 군사시설이 되고 말았다.
  군대에서는 강남의 남한산성 밑을 추천하기도 했지만, 이곳은 기반시설이 거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차에 서울대 공대 윤동석이 서울대 공대 옆자리를 추천했다. 이곳은 서울에서도 가깝고, 대학과 긴밀한 협력이 가능했다. 또한 연구소의 확장 가능성 여지도 많았고, 인근 부대시설도 좋았다. 이리하여 원자력연구소는 서울대 공대 옆으로 오게 되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일종의 거대과학 연구설비로서 물리학 이외에도 공학 분야의 사람들도 함께 지원을 해주었다. 원자력연구소는 많은 과학기술자들을 국비로 유학을 보내주고, 관련 연구비를 지원해줌으로써 우리나라의 과학발전에 기여했다.


















원자력 연구소는 많은 과학 기술자들을 국비로 유학보내고 연구비 지원을 통해 과학 발전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