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6월 22일자로 한국물리학회 최초의 회원명부가 발간되었다(필사본 94명). 동년 6월 23일 서울대학교에서 개최한 제4회 정기총회에 이어 24일 전국 물리학과 대항 친선배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에는 연구논문발표를 통한 학술정보 교류가 활발하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물리학회 회원간의 친목을 통해 상호의견과 정보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매 정기총회마다 친선배구대회를 여는 등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휴전 후에 많은 교수들은 자력으로 혹은 우리나라 최초의 거대과학 연구소인 원자력연구소의 국비유학 등 여러 형태의 기금을 이용해서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해서 대학원 수준의 공부를 하거나 박사 학위를 갖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대학에서는 교수들의 귀국이 늦어져서 학생들의 교육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다.
  물리학회도 1957년과 1958년 사이에 유학 붐이 일어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제4회 정기총회에서 선출한 임원 가운데 부회장 2명 중 1명과 상임위원 8명 중 6명 등 합계 7명의 핵심 임원들이 대거 해외유학을 떠났다. 이리하여 한국물리학회의 활동은 거의 마비되어 정기총회조차 열지 못하고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물리학회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물리학도 국내는 완전히 공백상태가 되고 말았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이기억이 이미 1953년에 부산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54년 봄에는 김종철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1955년 가을에는 조순탁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56년에는 윤세원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1957년 1월에 귀국하였다. 권녕대는 1957년 9월에 1년 기한으로 연구 목적으로 영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거의 모든 교수가 유학을 간 동안 고려대학교의 김정흠이 출강하여(1954 - 1957) 열역학, 수리물리 및 양자역학을 강의하여 그 공백을 메꾸었다. 1957년 9월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는 지창열, 윤세원, 이주천 세 사람만이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이철주가 1955년부터 1년간 유학을 다녀왔고 안세희는 1955년 유학을 떠나 1959년에 돌아왔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김상돈이 1955년부터 1년간 유학하였고 김정흠은 1957년에 외국으로 나가 1961년에야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