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뉴욕대 공대 전기물리학과 부교수로 활동하고 있던 정근모는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 설립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새로운 책임자가 된 한나(John A. Hannah)는 정근모가 박사학위를 하던 미시간 주립대학의 총장시절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그는 정근모에게 한국에서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을 설립할 보고서를 쓰도록 부탁했다. 정근모의 보고서는 미 국제개발처를 통해서 한국 정부의 경제기획원에 알려졌고, 이에 따라 한국의 경제기획원과 과학기술처는 이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의 설립을 검토하게 된다. 이 계획에 대해서도 문교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문교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 출신이던 남덕우 당시 재무부장관의 찬성 발언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을 과학기술처 소관으로 추진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따라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던 김기형이 설립 사업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미국 국제개발처는 스탠퍼드대학 공대 학장과 수석 부총장을 지낸 바 있던 터먼(Frederick E. Terman)과 베네딕트(Donald Benedict) 등에게 이 새로운 형태의 대학원인 ‘한국과학원’(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설립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요청했고, 산업적 연구를 강조하는 터먼의 이념은 자연스럽게 부분적으로 과학원 설립 이념에 스며들게 되었다.
  1971년 2월 16일 “산업발전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분야에 관한 심오한 이론과 실제적인 응용력을 갖춘 자를 양성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하고, 7개 학과, 9개 전공을 갖춘 특수 과학 교육기관인 한국과학원이 서울 홍릉에서 설립되었다. 초대 과학원 원장에는 물리학자인 이상수(李相洙)가 임명되었고, 초대 부원장에는 과학원의 설립 초기부터 이 계획에 깊이 관여했던 정근모가 임명되었다. 초창기 과학원의 물리학과 교수진으로는 이상수(광학), 조병하(이론), 김재관(입자) 등이었고, 1974년에 조순탁(통계)과 김종진(응집)이, 1975년에는 이주천(반도체)이 부임하면서 물리학과 교수진용을 갖추었다.




















1971년 2월16일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KAIST)이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