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여름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욱(金正旭), 윤택순(尹澤淳), 정수억(鄭壽億), 이원용(李元鏞), 조양래(趙亮來), 이용영(李勇榮), 이영근(李榮根), 김영기(金英基), 김영일(金英一), 김호길(金浩吉) 등과 국내 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입자가속기 도입을 위한 심포지엄이 약 1주일간 열렸다. 국내의 가속기 도입 계획은 후일 포항공대의 가속기 건설로 연결되어 현실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