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증가

  한국물리학회의 회원수는 창립 10년 만인 1962년 24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창립 20년 후인 1972년에는 1193명이였고, 30년 후인 1982년에는 1857명, 40년 후인 1992년에는 4051명, 50년 후인 2002년에는 8902명으로 증가하였다. 실로 창립 50년 만에 총 회원수가 261배 이상으로 증가한 셈이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학회의 회원수는 1960년대를 통해 꾸준히 증가하다가, 1970년

대에는 잠시 주춤하였고, 1980년부터 회원수가 다시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신입회원의 수도 1970년대말에 약간 줄어들었으나 1980년대부터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림I-1> 1970년대 후반기에 신입회원의 수가 약간 줄어든 특이한 현상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우선 1970년대 후반은 한국물리학의 선구자격인 인물들이 국내에서 교육시킨 물리학도들이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물리학의 기반이 확충되기 시작하면서 물리학 연구인력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반면 한국물리학회 초창기의 회원 비중이 높았던 중·고교 물리학 교사들의 가입은 197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1960년대에는 중·고교 교사들의 회원수가 대학이나 연구소의 연구 인력보다 오히려 더 많았던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기로 오면서 물리학 박사학위의 수가 늘어났고, 상대적으로 중·고교 교사들의 학회활동이 위축되면서 점점 그들의 학회 가입이 줄어들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박사급 신입회원의 수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고 마침내 이들이 한국물리학회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학회재정의 증가

  1962년 14만6000원으로 시작한 학회의 결산금액은 2001년 5억 원에 이를 때까지 3400배로 증가했다. 1967년은 학회의 재정이 100만원을 돌파했으며, 일반물리학 실험책의 인세가 가세하면서 1977년에 마침내 학회재정이 1000만원을 돌파했다. 그뒤 10여년이 지난 1988년에는 결산 기준으로 학회의 재정이 1억을 넘어섰다. 전체적으로 보아 1960년대에는 예결산 금액이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규모가 작았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완만한 증가를 보이다가, 1999년 이후에는 5억원 규모에서 점차 안정화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림I-2>
  한국물리학회의 정회원 회비는 1962년 200원이었으며, 2002년도에는 4만원으로 40년동안 200배로 인상되었다. 학생회비는 1963년에 정회원 회비 300원의 3분의 1인 100원으로 책정되었다가 1983년부터는 정회원 회비의 반액으로 정착되었다. 분과회비는 1982년 2000원으로 신설된 이후에 1984년에 30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1986년 이후에는 5000원으로 정착되었다. 학회 등록비는 1984년 3000원으로 신설된 이후 꾸준히 인상되어 2000년에 3만원에 이르렀다.

      

학술논문의 증가

  30년 이상 발행한 「새물리」와 JKPS에 게재된 논문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1990년대부터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물리」의 논문수는 1961년 창간 후 1970년대까지 20년 동안 큰 변동이 없이 30여편 정도에 머물다가 1980년대에는 게재 논문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오히려 감소하는 경향마저 보였다 <그림I-3>. 이와는 달리 영문학술지인 JKPS에 게재된 논문수는 창간후 1970년까지는 거의 10여편에 머물러 있었으나 1980년부터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이유는 1992년부터 JKPS가 SCI 학술지로 등재되었다는 것과 학계 전반에 걸쳐 연구 업적에 대한 평가가 강화된 데에 기인했다.

학회포상기금 마련

  1977년 10월 중앙일보사로부터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면서 금메달(45g)과 상금 500만원을 받아 기금으로 적립하였다. 그후 적립된 500만원은 산업금융채권 등에 투자되어 학회 기금의 씨앗이 되었다. 기금에서 발생하는 과실금을 재투자하여 기금을 늘려왔다. 1991년에는 APPC(Asia Pacific Physics Conference)개최 잉여금 6517만 6976원이 학회로 환입되어 기금 증가에 기여하였다. 이 기금의 과실은 학회사무실의 확장에 따른 관리비로 사용하고 있다. 그후 학회운영 잉여금을 모아 현재 2억원의 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1982년 10월 윤세원이 회갑을 맞이하여 한국물리학회상 포상 기금으로 500만원(현금 200만원, 상업은행 주식 300만원상당)을 기증하였다. 이 기금중 현금 부분은 정기예금 등 투자 증식을 통해 상업은행주식(1990년에는 1701주를 보유)의 유상증자 등에 재투자하여 한때는 시가 2500만원이 되기도 하였으나 주식시장의 불황과 상업은행의 감자 처리로 인해 모두 소진되었다.
  1990년에는 김정흠이 정년 퇴직하면서 3년만기 신탁예금 500만원을 학회상을 위한 기금으로 기증하였다. 이 기금은 1992년에 만기가 되어 705만 6656원으로 성장, 한국물리학회상 기금에 흡수되었다.
  1992년 학회 창립 40주년 기념총회 및 학술대회를 마치고 잉여금 2000만원과 김정흠의 기증금을 통합하여 학회상 기금으로 적립하고 그 과실로 한국물리학회상의 시상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과실금의 수입이 생김으로써 그동안 상패만 주어오던 한국물리학회상에는 금메달이 부상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1993년에는 권오석으로부터 고 성봉 권녕대를 기리는 성봉물리학상 제정을 위한 기금기탁(부천 소재 건물)을 받아 성봉물리학상 기금을 학회에서 운영하였다. 시상을 위한 기금은 건물의 임대로 발생하는 임대료 수입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하였다. 시상 내용은 상금 1000만원과 금메달을 주는 것으로 하였다. 이러한 금액은 임대료로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학회가 건물을 관리하다 보니 임대료 수입이 원활히 입금되지 않아 기증자와 협의하여 건물을 매각하고 그 대금을 적립하여 과실로 시상을 하고 있다.
  1996년 5월 조권국(조순탁 장남)으로부터 학회 발전기금으로 2000만원을 기증받아 국제교류기금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기금은 그 해 연말 학회에서 3000만원을 더하여 5000만원으로 확대하였다. 그 후 1999년 학회의 특별사업 소득금 1억원을 추가로 출연하여 총 1억5000만원의 국제교류기금을 마련하였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과실금으로 국제교류위원회의 운영비, 국제단체 가입회비를 지원하고있으며 학회에서 국제회의에 회원을파견하는 경우 그 경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2000년 성봉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성호로부터 그 상금에 해당하는 1000만원을 학회상 시상을 위한 기금으로 기증받았다. 이후 학회에서는 이 기금에서 나오는 과실금으로 기증자의 호를 사용한 봄비물리학상을 제정하고 2002년부터 격년으로 시상하고 있다.


 

 

 

 

 

 

 

 






















2001년 한국물리학회는 1년에 약5억원을 지출하는 큰 학회지만 1962년 당시 학회의재정은 14만6000원에 불과했다.학회의 재정이 100만원을 돌파한 것은 1967년의 일이었다.

 

 

 

 

 

 

 

 

 

 

 

 

 

 

 

 

 

 

 















한국 물리학회상 기금 마련과 성봉물리학상 제정

 

 










국제교류 기금 조성 및 봄비물리학상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