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과 대학

  1980년대에 한국의 과학기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연구중심 공과대학인 포항공대의 설립이었다. 재미 과학자 공동체와 많은 인맥을 갖고 있던 플라스마분야의 전문가인 김호길은 1985년 8월 1일 포항공대 초대 학장요원으로 부임하여 포항공대 설립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포항공대의 형성에는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우선 초대 학장인 김호길은 이 단체의 창립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초대 간사장과 6대 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포항공대로 부임한 중진 교수들 가운데 5명, 즉 변종화, 최상일, 박찬모, 김동한, 이진옥 등은 이 협회에서 회장을 역임했던 사람들이었다. 초대 학장으로 내정된 김호길은 과거 원자력연구소에서 알게 된 이동녕, 오세웅, 장근수를 비롯해서 당시에 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많은 과학자들을 포항공대로 유치하였다. 국내외에서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을 충원한 포항공대는 1986년 12월 3일 개교하게 되었다.
  포항공대는 당시 연구 분위기를 갖추지 못했던 한국의 대학들에게 경쟁적인 연구분위기를 유발시켜 한국 대학들이 본격적인 연구 체계로 진입하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포항공대는 많은 서울 소재 대학들과는 달리 지방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학의 지방화와 과학기술 연구의 분산화를 통해서 대학간의 연구 경쟁을 유발시켜 국가 전체의 대학 교육 개혁에도 이바지했다.

포항공대를 만든 물리학자 김호길

  포항공대를 세운 물리학자 김호길 김호길(金浩吉, 1933-1994)은 1933년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 태어났다. 안동군 도산면의 도산국민학교와 안동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의성공업학교, 안동사범학교 등을 거쳐 1952년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이전했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1956년 공군사관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1959년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최초의 과학전문 연구기관이었던 원자력연구소 촉탁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다. 여기서 김호길은 기초물리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훗날 포항가속기연구소 소장이 되는 이동녕 밑에서 14메가전자볼트 고속중성자빔(fast neutron beam) 발생장치를 설계, 건설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포항공대에서 가속기를 건설하게 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961년 김호길은 국제원자력기구 장학생으로 영국 버밍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버밍엄대학에서 그는 파우엘 밑에서 재발생추출이론(Theory of Regenerative Extraction)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뒤 1963년에는 로렌스-버클리 연구소 연구원이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1966년 6월 미국 메릴랜드대학 물리학과 및 전기공학과 교수가 되면서 플라스마 분야의 전문가로서 국제적인 위치를 굳히게 된다. 1971년 12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창립된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의 초대 간사 및 제6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재미한국과학기술자 공동체의 형성에 기여한다.
  오랜 외국생활 끝에 귀국한 그는 1983년 10월 10일 연암공업전문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으며, 1985년 8월 1일 포항공대 초대 학장요원으로 부임하여 포항공대 설립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1994년 4월 30일 포항공대 체육대회 도중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김호길(1933-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