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본래 학회 사무실은 총무간사(이사)제도가 도입된(초대 총무간사 조순탁, 1959. 6. 27) 이래로 총무간사(이사)가 재직하는 대학에 임시 사무실을 두고 운영해 왔다. 즉 총무간사 윤세원(1960. 10), 안세희(1961. 10), 김정흠(1962. 6), 정중현(1964. 5), 김정흠(1965. 5), 정중현(1967. 4)을 따라 사무실을 서울대학, 연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학, 고려대학, 연세대로 옮겼다. 그러나 1969년 4월 김순식이 새로운 총무이사를 맡게 되었을 때 사정상 1969년 5월 16일 연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 문리대 과학관 306호실로 이전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종합화가 진행되면서 한국물리학회의 사무실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25동 312호로 옮겨졌다.
  1976년 11월 15일 한국물리학회의 사무국을 강남구 역삼동 635-4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관(과총회관 본관 507호)에 위치한 총 40평 규모의 사무실로 입주하게 되었다. 1993년 7월 학회는 과총회관에 31.3평을 추가로 임대하여 과총회관 본관 901, 902호로 이전하면서 독립된 사무실과 회의실 및 서고를 마련하게 되었다.
  학회 업무보조는 총무간사가 지도하는 대학원생이 담당하다가 김정흠 총무간사 임기 중 계화자(1965. 5-1966. 4월)와 박장선(1966. 5-1967. 4월)이 임시 유급사원으로 종사하였다 한다. 한국물리학회 최초의 사무원은 1966년 10월에 들어온 김영숙이었다. 서울대학교로 학회 사무실을 옮긴 이후 1969년 12월 한국물리학회는 박장선을 학회의 사무주임으로, 김선화를 사무원으로 채용하여 학회 행정 사무를 맡겼다. 박장선은 2년간 학회의 사무를 맡았다. 박장선의 후임은 1973년 12월까지 학회의 사무를 맡았던 함소영이었으며, 김선화는 1973년 10월까지 학회 업무를 담당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 고윤석이 상임이사장이 되면서 1974년 1월 정원근(鄭源根)을 2년 계약 정식직원으로 공개 채용하였으며, 사무조원으로는 주승희를 채용하여 학회 사무를 대대적으로 정리하였다. 정원근은 이미 1973년 6월 11일 시간제 편집요원으로 채용되었다가 이때부터 학회의 정식 직원이 되어 30여년 동안 근무해왔으며, 1996년부터는 사무국장(1996.11.29 제 93회이사회 승인) 으로 2002년 현재까지 물리학회 사무국을 지켜오고 있다.
  1974년 4월 25일 당시 소유하고 있었던 학회의 자산으로는 1966년 10월 8만원에 구입한 국문타자기, 1968년 6월 11만5000원에 구입한 전화기, 1969년 6월 5만2000원에 구입한 영문타자기, 과학회관 입주금 80만원, 신탁예금 290만원 등 총 435만2954원이 잡혀 있었다.

2. 학회 사무실

  공간 확보 학회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학회가 사무실을 처음 마련한 것은 1969년 5월16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과학관 306호(서울 동숭동 소재)로 되어 있다. 학회가 처음 마련한 독립된 사무실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소속의 연구실을 빌려 사용한 것으로 물리학과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까지 약 5년간 학회사무실로 이용하였다. 1974년 2월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 학회 사무실의 이전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따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는 안과 당시에 학회가 가지고 있던 기금으로 적당한 건물을 물색하여 이주하는 안 등을 논의하고 장소 물색에 나섰다. 그러나 학회의 재정 형편상 건물을 구입하기는 어려웠고 당시에 건설중이던 과총회관에 20평의 공간을 확보한 상태였으므로 과총회관 완공시 이주할 것을 감안하여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함께 이전을 하였다. 학회 사무실을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운영하면서 이사회 등 학회의 운영을 위한 여러 회의를 개최할 때 공간과 교통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각종 회의를 개최할 때 학회 형편상 근무시간 이후에 회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전 초기의 관악캠퍼스는 불편하였다.
  과총회관은 1970년 11월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산하 학술단체들로부터 투자금 형태로 기금을 모아 건설한 것으로 건축 초기에는 각 학술단체에 투자 지분에 대한 등기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한국물리학회는 입주금 80만원을 마련하여 과총회관에 20평 규모의 사무실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과총회관이 준공되는 과정에서 이 약속은 관련 규정의 개정을 통해 변질되었고 입주 후 학회의 투자금은 영구임대보증금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다른 학회들과 공동으로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등기를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여러 가지 주변여건 상 등기를 통한 소유권은 획득하지 못하였다.
  과총회관의 완공과 함께 학회사무실의 추가 공간 확보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1976년 9월에 입주금 180만원을 추가 납부하고 과총회관에 추가로 20평의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과총회관 완공에 따라 11월 과총회관 본관 507호로 이전하면서 회의용 공간과 창고를 마련하였다. 이때 과총회관 입주시 배정받은 507호는 입주학회 대표들이 모여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된 것으로 우리 학회는 당시의 상임이사장 김순식과 총무간사 박만장이 참여하여 507호(40평)인 남쪽 사무실을 뽑았다. 학회의 숙원중 하나이던 사무실을 확보하면서 11월 16일 입주식을 가졌다.
  학회 사무실이 40평이라고는 하나 가용면적은 35평 정도로 그중 7평에 앵글을 설치하여 서고로 사용하였다. 학회의 입주식을 축하하는 뜻에서 관련기업체로부터 소파와 회의용 탁자 등을 기증받기도 하였다(고미산업, 교문사). 이 후 학회활동의 활성화와 회원의 증가, 사무국의 직원수 증가, 학회업무의 전산화 등으로 인해 보다 넓은 사무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학회 창립 40주년 행사의 잉여금 일부로 과총회관에 31.3평의 공간을 임대하여 회의실과 서고를 만들어 사무공간을 넓혀 1993년 7월, 과총회관 본관 901호와 902호로 이전하였다. 이무렵 학회 이사회에서는 학회 기금과실을 학회사무실 관리비와 운영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결의하여 사무실 운영비의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학술지의 계속적인 증간과 새로운 학술지의 창간에 따른 업무 공간 수요 증대와 아울러 학술논문 포스터 발표제도가 도입되어 학회 보유 포스터판의 저장창고 등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1999년에 서고의 앵글을 제거하고 모빌랙을 설치해서 공간이용율을 높여 사용하고 있다.

3. 학회 업무 자동화 및 전산화

  학회는 1960년대 말부터 독립적인 운영을 하였으나 학회가 가지고 있는 집기는 책상과 타자기만으로 업무를 보았다. 복사기가 없어서 회의자료 복사를 외부기관에 의뢰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회의 개최시에는 자료를 주로 등사하여 사용하였고 복사를 하게 되는 경우는 비용이 저렴한 한국과학원 복사실을 주로 이용하였다. 한국과학원 복사실 이용은 당시 학회 임원 중 과학원 소속 회원들이 있어서 가능하였고 가격도 저렴하였다. 학회가 복사기를 처음으로 구입한 것은 1984년 12월로 학회가 학술원의 용역사업을 하면서 용역에 참여한 회원들의 기부를 통해 처음으로 복사기를 구입하여 사용하였다(기종 제록스2580). 학회에서 처음 구입한 복사기는 제록스 코리아사와 유지보수 계약을 맺어 사용한 결과 이 복사기는 10여년을 사용하다가 1998년에 제록스 250 복사기로 교체되어 사용되고 있다.
  팩시밀리는 1988년 김진의가 한국과학상 수상 기념으로 기종 (GF 3EX)를 구입 기증하여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록스 35로 교체되었다가 권숙일이 대한민국과학기술상 수상 기념으로 삼성 팩시밀리를 기증하여 2002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학회의 컴퓨터 사용은 1988년 5월 현대전자로부터 286 PC 한대, 삼보컴퓨터로부터 도트 프린터 한대를 기증받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기증받은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도 없는 상태여서 이천에 있는 현대전자에 가서 소프트웨어 복사본을 받아다 사용하였다. 그 후 1992년 3월 사무자동화와 전산화를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비를 갖추었다. 당시에 전산화를 위한 구입 장비는 IBM 286 4대, 레이저 프린터 1대와 PC link 1대로 이를 연결하여 학회내에 소규모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당시 총무간사이던 김병택의 지원으로 컴퓨터 교육도 처음 실시하였다. 이 무렵부터 대한화학회에서 개발한 회원관리프로그램을 개발자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어용선으로부터 기증받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이용으로 총회장마다 가지고 다니던 검은색 회비 장부가 사라지게 되고 총회장에는 프린트된 회원 자료가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학회 업무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업무인 학술지에 투고되는 논문의 관리를 위해 자체적으로 논문관리프로그램을 개발(개발자: 금명철, 기초과학지원연구원)하여 운영을 시작하였고, 금명철은 학회 직원들에게 컴퓨터와 DBASE에 대한 기초교육을 실시하였다. 논문관리프로그램에는 논문의 제목, 저자, 심사위원 등의 기록이 입력되고 심사의뢰를 위한 양식 등이 자동 출력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전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후 1993년 회원관리프로그램을 우리 학회 고유의 스타일로 새로 자체개발(개발자: 유현철, 당시 고려대학교 산업공학과 대학원생)하고 운영을 시작하였다. 이때에 개발된 회원관리프로그램은 그동안 여러 차례의 수정, 보완을 거쳐 2002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총회 등록시 컴퓨터가 등장하게 된다.
  1994년 1월에는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인쇄비 절약을 위한 학술지 출판용 KPS.TeX을 개발하고 8월에는 전국을 돌며 그 시연회를 개최하였다.이후 1995년 1월부터 학술지(「새물리」, JKPS, 「응용물리」)는 KPS.TeX을 이용하여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96년 1월, 회장 권숙일과 간사장 최덕인의 노력으로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우리학회가 “과학기술학회 정보화 촉진 시범학회”로 지정되면서 재정지원을 받아 학회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96년 3월 학회 전용 서버(Sun Ultra Spark)를 구입하고 전용선(T1)을 확보하였다. 그후 6월에 LAN(http://mulli.kps.or.kr)을 개통하고 학회지 투고 논문의 이메일 접수를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발표논문초록의 전산 접수가 시작되어 학회의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정보화 사업의 하나로 학술지 게재 논문의 파일과 그림에 대한 파일제공 서비스가 시작되었고 저자들이 투고논문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author inquiry system 도 운영이 시작되었다.
  1단계 정보화 사업 종료후 회장 최덕인과 간사장 김병택의 노력으로 과학재단으로부터 “과학기술학회 정보화 촉진 시범학회” 사업에 이어 “학술정보인프라구축특화사업”을 지원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학회에서는 회계관리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2단계 지원이 확정됨에 따라 우리 학회는 전용선의 속도를 E1급으로 올리고 당시의 총무간사(노태원)와 전산담당간사(김승환)의 주관하에 2002년 2월 서버 구입을 위한 공개경쟁입찰을 통해 학회로서는 두번째 서버인 (SUN ) Mulli2를 구입하였다. 이어서 학회 홈페이지를 새롭게 단장하고 4월부터 학회홈페이지에 물리 Q&A난을 개설하였다. 또한 기존의 논문관리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회장 민석기는 Netien과 계약을 체결하여 KPS-D3 시스템을 개발하여 논문투고에서 출판된 논문의 pdf 서비스를 위해 PC 서버 2대를 구입하여 on-line journal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KPS-D3 시스템은 논문투고에서 심사까지를 전산화하여 운영하는 것으로 신속하고 투명한 논문관리를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4. 사무직원

  기록에 의하면 학회의 사무국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12월 이후라 할 수 있다. 1966년 10월에 김영숙을 최초의 사무직원으로 채용하였으며, 1969년 12월 사무주임으로 박장선과 사무원 김선화를 채용하였다. 역대 사무직원의 임용 현황은 기사 말미에 표로 정리하였다. 그후 1971년 3월 박장선 사무주임의 후임으로 함소영을 채용하였다. 이 기간 중 학술지 편집의 교정업무를 위해 정원근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하여 교정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그후 김선화와 함소영의 사임으로 학회로서는 처음으로 직원 공개채용을 실시하여 1974년 1월부터 2년 계약제로 정원근을 채용하고 보조원으로 공개 채용을 통해 야간고등학생이던 주승희를 보조원으로 채용하였다. 주승희의 사임으로 사무보조원 강은희를 채용하였다. 당시 강은희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임원중 한분의 소개로 학회 근무를 시작하여 보조업무를 담당하였다.
  1975년 사단법인 설립과 함께 과학기술부로부터 직원 정원을 2명으로 승인받았다. 이때부터 학회 사무국이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정원근은 서무과장 대리로 학회 업무 전반을 담당하게 되고 1979년 서무과장, 1997년 사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76년 11월 강은희의 사임에 따라 사무원으로 김인숙을 채용하여 회원관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1984년 9월 김인숙의 사임 후 10월부터 회원담당으로 최희남을 채용하였다.
  2명의 유급직원으로 학회 업무를 처리하던 중 1988년 「응용물리」지의 창간에 따라 증가된 학회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최위숙을 학술지 담당으로 채용함에 따라 사무직원이 3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때부터 학회 규정에 따른 출판부가 정식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시기는 학회의 업무가 새로운 학회지 발간, 기념행사 등 업무의 증가가 매우 많았던 반면 급여는 인접한 학회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형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학회가 사단법인이 되면서 직원 근무 및 급여를 공무원에 따른다고 하였으나 실제 운영은 공무원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무원의 급여가 동결되면 학회도 따라서 동결되는 등 직원 복리문제는 등한시 되었다. 1985년 학회에서 호봉제를 도입 하였으나 실질적인 호봉제가 도입된 것은 1990년부터이다.
  1990년 10월 최위숙이 사직하고 박현정을 채용하여 회원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그동한 회원담당 업무를 보던 최희남이 학술지 담당으로 업무를 교체한다. 최희남이 1991년 5월 사직함에 따라 학회에서는 학술지 담당으로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조순화를 채용하여 박현정과 함께 학술지를 담당하도록 하고 1992년 2월부터 학회 창립 40주년 기념행사 등으로 늘어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원담당으로 김수정을 채용함으로써 학회 직원이 4명으로 증원되었다. 이 기간 동안 학회에는 「물리학과 첨단기술」이 창간되어 조순화는 홍보잡지 발간 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5월에 김수정이 6월에 박현정이 사직한 후 7월부터 홍완숙을 학술지 담당으로 이소영을 회원담당으로 채용하였으나 이소영은 한달만에 사임하였다. 이후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고 1993년 1월 회원과 경리담당으로 이선미를 채용하였다. 1993년 2월 조순화가 사임함에 따라 문선숙을 학술지 담당으로 채용하고, 홍완숙을 홍보잡지 담당으로 업무를 변경하였으나 문선숙은 1993년 5월 사임하였다.
  1990년대 초는 이와 같이 직원들의 수시 교체로 학회 사무국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였으나 직원교체시 항상 공개채용을 하였다. 그러나 직원 채용에는 학회의 과다한 업무와 낮은 급여 체계로 인해 지원자가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격었다. 같은 해 7월 이선미도 사임함에 따라 신혜선을 학술지 담당으로, 이교나를 회원담당으로 채용하였으나 이교나는 1995년 9월 사임하였다. 1996년 학술지 발행업무를 JKPS와 국문학술지로 구분하여 관리하게 됨에 따라 1월 인남영을 JKPS 담당으로 채용하고 신혜선은 「새물리」, 「응용물리」, 「물리교육」에 대한 업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그후 1997년 8월 신혜선이 진학을 위해 사직하고 9월부터 박인숙이 학술지 담당으로 채용되어 근무를 시작하였다.
  KPS.TeX의 발전과 학회 논문투고 및 심사규정이 개정되면서 학회지 업무가 편집과 논문관리로 바뀌면서 박인숙은 논문관리를, 인남영은 TeX을 이용한 출판업무를 담당하였으나 2000년 4월 인남영이 사직함에 따라 학술지 출판담당으로 윤혜영을 5월부터 채용하였으나 12월 사임하였다. 2000년 2월 학회 업무의 전산화가 완성단계로 들어서면서 전산담당 직원 홍은숙(2002년 7월까지 근무)을 계약직으로 채용하여 전산 관리를 시작하였고 윤혜영의 사직에 따라 2001년부터 홍은숙을 정식으로 채용하여 「새물리」 발간업무와 전산담당 업무를 맡도록 하고 경리업무와 회원관리를 위해 김윤옥(2001년 1월부터 근무)을 채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논문관리를 하던 박인숙을 JKPS 출판담당으로 업무를 바꾸었다. 김윤옥은 학회에서 인터넷을 통해 선발한 최초의 직원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국제학술지 발간 지원에 따라 상근편집위원을 채용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2002년 4월 1년계약으로 나의수를 채용하였으나 1개월 만에 사직함에 따라 2002년 9월부터 유명숙을 1년계약으로 채용하여 학술지 발간 업무를 총괄적으로 맡아 관리하고 있다.

5. 학회 자산

  학회의 자산은 1966년 10월에 구입한 한글타자기(8만원), 1968년부터 학회가 보유한 전화, 1969년에 구입한 영문타자기와 1961년부터 정기예금과 신탁예금을 통해 마련한 기금이 원조라고 할 수 있다 (1963년 6월 현재 3만1508원). 1969년 서울대학교에 학회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안락의자, 흑판, 파일박스 등을 구입하여 학회 자산으로 등록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소모품에 해당하는 것 까지도 비품처리를 하여 자산으로 등록을 하였다. 이렇게 정리하고 관리를 해온 학회 자산은 1974년 4월 25일 현재 과총회관 입주금 80만원, 신탁예금 290만원, 비품합계 65만2954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비품가격은 당시의 전화권리금이 사고 팔수 있는 때로 전화를 50만원으로 계산한 것이다. 학회의 결산자료를 보면 비품가격이 감가상각이 되고 있음에도 계속적으로 오른 가격으로 표시되는 것은 이 전화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후 1976년 학회사무실이 과총회관으로 이전하면서 응접세트, 회의용 탁자 및 의자(21개), 앵글선반 등이 늘어난다. 또한 이때 타자기도 새로 구입하고 그동안모아 놓았던 기금을 사용하여 일반물리학 실험교과서 발간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1977년에는 당시로서는 신제품이던 국·영문 전동볼타자기를 구입하여 자산목록에 추가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컴퓨터의 등장으로 이 타자기는 생을 마감한다. 그 이후 학회는 특별히 자산을 구입하지는 않았다. 소모성 있는 비품, 컴퓨터, 복사기, 팩스 등을 구입하여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1977년 10월 중앙일보사로부터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면서 금메달(45g)과 상금 500만원을 받아 기금으로 적립하였다. 그후 적립된 500만원은 산업금융채권 등에 투자증식 되어 기금으로 되었다. 학회가 따로 기금을 확보하거나 증가시킬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기금에서 발생하는 과실금을 기금에 재투자 하는 형식으로 기금을 늘려왔다. 이후 1991년에는 APPC 개최 잉여금 6517만6976원이 학회로 환입되고 기금에 흡수되어 기금 증가에 기여하였다. 이 기금의 과실은 학회사무실의 확장에 따른 관리비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관리비로 사용되고 있다. 그후 학회운영자금중 남은 금액들을 모아 2억원의 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1982년 10월 윤세원이 회갑을 맞이하여 500만원(현금 200만원, 상업은행 주식 300만원상당) 상당을 한국물리학회상 포상기금으로 기증하였다. 이 기금중 현금 부분은 계속 정기예금 등에 투자되어 증가를 계속하면서 상업은행주식(1990년에는 1701주를 보유)의 유상증자 등에 사용되어 한때는 시가로 2500만원이 넘기도 하였으나 주식시장의 불황과 유상증자 대금 납부로 인해 현금부분은 주식으로 운영되다 상업은행의 감자 처리로 인해 모두 소진되었다.
  1990년에는 김정흠이 정년퇴직을 하면서 3년만기 신탁예금 500만원을 학회상을 위한 기금으로 기증하였다. 이 기금은 1992년 만기 705만6656원으로 증식되어 한국물리학상 기금에 흡수되었다.
  1992년 학회 창립 40주년 기념총회 및 학술대회를 마치고 잉여금 2000만원과 김정흠이 기증한 학회상 기금을 포함하여 학회상 기금을 정식으로 적립하고 그 과실로 한국물리학회상의 시상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과실금의 수입이 생김으로써 그동안 상패만 주어오던 한국물리학회상에는 금메달이 부상으로 주어지게 되었다.
  1993년에는 권오석으로부터 그의 부친 고 성봉 권녕대를 기리는 성봉물리학상 제정을 위한 기금기탁(부천 소재 건물)을 받아 성봉물리학상 기금을 학회가 운영하였다. 시상을 위한 기금은 건물의 임대로 발생하는 임대료 수입을 통해 기금을 마련하는 것으로 하였다. 상의 내용은 상금 1000만원과 금메달을 주는 것으로 하였다. 이러한 금액은 임대료로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회가 건물을 관리하다 보니 임대료가 원활히 수금되지 않아 소송도 제기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학회에서는 밀린 임대료를 받기 위해 신용정보회사를 통한 임대료 회수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건물을 임차한 업주가 전기료 등은 미납하고 산업폐기물만 남기고 도주하는 등 학회가 건물을 관리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기증자와 협의하여 건물을 처분하고 그 대금을 적립하여 과실로 시상을 하고 있다.
  1996년 5월 조권국(고 조순탁 장남)으로부터 학회 발전기금으로 2000만원을 기증받아 국제교류기금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기금은 그해 연말 학회에서 3000만원을 더하여 5000만원으로 확대하였다. 그후 1999년 학회에서 특별사업으로 모은 1억원을 추가로 출연하여 총 1억 5천만원의 국제교류기금을 마련하였다. 이 기금에서 나오는 과실금으로 국제교류위원회의 운영비, 국제단체 가입회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학회에서 국제회의에 회원을 파견하는 경우 그 경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2000년 성봉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성호로부터 그 상금에 해당하는 1000만원을 시상 기금으로 기증받았다. 이후 학회에서는 이 기금에서 나오는 과실금으로 기증자의 호를 따라 봄비물리학상을 제정하고 2002년부터 격년으로 시상하고 있다.







1969년5월16일 처음으로 독립적인 사무실을 서울대학교 문리대에 마련하였다.

 

 

 

 

 

 

 

 

 

 

 

 

 

 

 

 

 

 

 

 

 

 

 

 

 

 

 

 

 

 

 

 

 

 

 

 

 

 

 

 

 

 

 

 

 

 

 

 

 

 

 

 

 

 

 

 

 

 

 

 

 

 

1988년 286 PC한대로 시작한 전산화는 2002년 두번째 서버를 설치, 논문투고에서 심사까지를 전산화하는 등 학회업무 자동화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타자기, 전화 등 1963년 6월 현재 3만 1506원이던 학회 자산이 2002년 현재 2억원의 기금을 갖게 되도록 크게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