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분과회가 만들어진 것은 1967년이었다. 1967년 4월 29일 이화여대 학생관에서 제14회 정기총회를 마치는 날 인준을 받았다. 그 당시 외국의 경우나 타 학회에서 학술단체 내의 분과위원회라는 개념이 없지 않았겠지만 물리학회에서도 입자물리학분과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말하자면 미국물리학회의 디비전(division)의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초대 분과회장은 박봉열이었다. 1967년이라면 우리나라가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끝내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가동하던 시기로서 비약적 산업발전의 시대가 도래하던 때였다.
  그러나 물리학회의 규모는 여전히 소규모였다. 입자물리학분과회가 만들어지던 1967년 봄 제 14회 정기총회 참석자가 177명 정도였고 초청강연 4편에 논문발표 수가 30편인 소규모였으며, 전체 회원수는 700명이 조금 넘던 때였다. 2002년 현재의 물리학회 규모의 10분의 1도 안되는 학술단체였던 것이다. 아무튼 물리학회 조직 내에 하부조직으로서 입자물리학분과회가 생겼다. 2002년말 분과 회원수가 200명을 넘고 있지만 출범 당시에는 분과회원이 20여명 정도였다.
  그 즈음,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계 물리학자들도 많아져서 워싱턴 등지에서 미국물리학회가 열리면 참석자의 약 1 %는 한인물리학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유학한 극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김영배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소립자물리학 실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이후 김종오는 시카고대학에서 소립자물리학 실험으로, 김기용은 버클리대학에서 장론으로, 송희성은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소립자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의 경도대에서는 박봉열이 역시 소립자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경북대에는 조병하가 있었다. 이들에 의하여 한국의 입자물리학계는 활력을 충전하게 되었고 연구를 시작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육성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를 더듬어보면 많은 이들의 성명이 나타난다. 이휘소, 강경식, 김정욱, 이영근, 김호길, 김영서, 곽노환, 주동일, 이용영, 김재관, 이원영 등 여러 사람들의 성명이 등장하고 있다.
  1967년에 생긴 입자물리학분과회는 박봉열이 위원장을 1972년까지 맡았고 조병하가 그 뒤를 이어 1977년까지 맡았다. 입자물리학분과회가 생긴 이후 입자물리학 분야에는 쟁쟁한 연구업적을 가진 이들이 국내외에서 활약하였다. 입자물리학분과회의 역대 위원장들을 보면 박봉열, 조병하, 김영덕, 김종오, 김재관, 송희성, 김제완, 정복근, 강주상, 조용민, 주창근, 김정홍, 소광섭, 이재형에 이어 이철훈에 이르고 있다. 소속회원 수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데 1994년에 178명이던 것이 1999년에는 208명이 되었으며 이는 전체 회원수의 약 6.5 %에 해당한다. 그런데 북미한국물리학자협회(AKPA)에 소속된 사람 가운데 입자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비율은 17%를 약간 상회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는 입자물리학을 위한 실험장치가 국내에 없는 대신 미국에는 여러 곳에 국립 가속기연구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 때의 분과회별 발표논문 수를 보면 전체 발표논문의 약 5.9%를 차지하고 있다. 회원 수에 비하여 발표가 평균보다 미진하였다.


 


1967년 4월29일 입자물리학분과회가 창설되었다.




2002년 입자 물리학분과 회원이 200여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