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물리학이 한국에서 비약적 성장을 한 계기가 된 것은 사람에 따라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한국과학기술원 (1973년 개원 당시에는 한국과학원)의 설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이 개원하면서 조병하, 김재관 등은 기초과학 특히 입자물리학에 대한 몰이해와 질시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입자물리학을 가르쳤는데, 고인규, 이현규 등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사정으로는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젊은 국내 박사학위 소지자가 드물었고 서울대 등에서도 학부를 졸업하면 공부를 염두에 둔 대부분이 유학을 떠나던 때라 국내의 대학원에서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하던 인적자원이 적었다. 동시에 국내의 기간산업에 필요한 과학기술인력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기 시작하였던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배출한 고급인력은 여러 연구소와 대학 등으로 공급되었다.
  특히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한국과학기술원은 단기간에 약 50여명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배출하였으며 이 숫자는 단기간에 국내에서 활동하는 입자물리학 분야의 인적 자원을 거의 두배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국내의 각 연구소와 대학 등에 골고루 자리잡게 된 이들 한국과학기술원 출신의 대거 등장은 서울대 등 기존의 유수한 대학교의 대학원 교육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입자물리학계는 선의의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국내 대학원에서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고급인력이 드물었는데, 이 경쟁의 결과로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도 수십명의 국내박사학위를 취득한 입자물리학자들이 나왔다. 이즈음 국내 대학교에서 입자물리학 분야에서 정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첫 그룹이라면 서울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한 이해원, 최종범 등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배출한 입자물리학자는 대부분 이론을 전공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대학에서도 이론입자물리학의 붐이 일어났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실험 입자물리학자들의 주무대는 국외의 실험현장이었으므로 국내의 학자들이 이론에 치우치는 것은 불가피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기간은 대체로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박봉열, 김제완, 송희성을 위시하여, 경북대의 주창근, 경희대의 정복근, 고려대의 김종오, 서강대의 김영덕 등 여러 학자들이 한국의 입자물리학계를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강주상, 조용민, 소광섭, 김성구, 이철훈, 이재형, 김재삼, 김진의, 이준규, 손동철 등 경쟁력 있는 쟁쟁한 입자물리학자들이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경험을 쌓은 후에 속속 국내에 자리잡음으로써 한마디로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군웅할거하는 시대를 연출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까지는 당시의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의 입자물리학분과회 논문발표회장 분위기는 학문적 열기가 가득하였다. 이론 분야의 발표회장은 열띤 토론의 장이었다. 2000년대에도 그렇지만 당시의 대학원생들의 발표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령 어떤 대학교의 대학원생이 발표하면 다른 대학교의 교수가 곤란한 질문을 던지곤 하였으며 발표하던 대학원생을 제쳐두고 그 지도교수가 나서서 답변을 하였다. 반대로 그 대학교의 대학원생이 발표하면 이번에는 먼저 대학교의 교수가 어려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론은 곧장 교수들끼리의 논쟁으로 번지기도 하였는데, 발표하던 대학원생은 그저 멍하니 자기 지도교수와 질문을 던진 교수 사이에 오가는 공중전을 올려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한국물리학회 입자물리학분과회 논문발표회장은 어떤 면에서는 반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기대감에 들뜬 대결의 한판이었다. 교수들이나 대학원생들이나 마찬가지로 논문발표회장을 가득 메우고 실력을 겨루는 현장에서 흥미진진하게 참여하였던 것이다.
  2000년대의 입자물리학분과회 논문발표회장은 예전에 비하여 무게 중심이 이론보다 실험에 쏠리고 있다. 실험 분야에는 실력 있는 입자물리학자들이 국내에서도 활발한 업적을 내면서 국제실험그룹에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좋은 인적자원이 많이 몰리는 편이다.
  실험 분야의 논문발표회장은 청중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반면에 이론 분야의 논문발표회장은 그에 비하여 활기가 떨어지고 참가자들의 열기도 부족하다. 실험 분야의 발표회장은 국제적 실험 그룹에서 활동하던 학자들이 최신 결과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아마도 고려대 강주상이 이끈 팀이 일본 KEK의 AMY 실험을 수행한 것이 국내에서 최초로 국제적 실험 그룹에 정규멤버로서 참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즈음 우리나라의 실험 입자물리학은 고려대의 김종오를 위시하여 경상대 송진섭, 전남대 김재률 등 여러 교수들이 핵건판 실험 등 나름대로 세계 도처의 국제적 실험 그룹에 참여하고 있었고, 척박한 국내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개척자적 열의와 노력에 의하여 국내 실험 입자물리학 분야는 착실하게 발전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미국의 텍사스에 건설 예정이던 SSC에 입자물리학분과회의 중지를 모아 한국이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공식적으로 국내 최초의 일이었으며 서울대 김제완을 위원장으로 한 한국팀의 명칭은 한GEM이었다. 여기에는 당시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실험 입자물리학자들이 거의 망라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SSC가 미국의회의 예산 삭감으로 중단되자 한GEM도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의 노력이 하나의 작은 밑거름이 되어 국내에서의 실험 입자물리학 발전이라는 과제를 추구할 수 있었다. 특히 관계 요로의 비전문가들에게 입자물리학 실험에는 많은 재원과 인력과 시설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한다. SSC 이후 실험 입자물리학자들은 CERN의 LEP 실험, 페르미연구소의 Tevatron 실험, KEK의 여러 실험 등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경상대 송진섭을 중심으로 하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포항공대의 포항방사광가속기가 완성됨에 따라 건설에서부터 가동, 유지 등 가속기관련 기술을 보유하게 되어, 실험 입자물리학 분야의 발전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초창기의 국내 입자물리학 분야가 아무래도 이론에 치우쳐서 발전하였다면 최근의 실험 분야의 발전상은 균형 면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세미나와 워크숍 등 논문발표와 교류의 기회가 최근에는 매우 많아졌다. 하계학교나 겨울학교, 그리고 학술회의도 방학이면 수차례 열리고 있다. 그러므로 굳이 봄과 가을에 열리는 한국물리학회의 정기총회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모여서 토론하고 협력하고 교류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