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의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 전부는 22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4명이 수물과 졸업생이었다. 수물과 1회 졸업생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원철(李源喆, 1896-1963)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남(羽南) 이원철은 보성중학교,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다. 연희전문의 천문학 교수였던 베커와 루퍼스의 주선으로 1922년 북장로교로부터 학비지원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시간주 앨비언 칼리지에서 한 학기를 수학한 뒤 실력이 인정되어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미시간대학에서 수학하고 연희전문 시절의 은사였던 루퍼스 교수 아래서 1926년 “독수리자리 에타별의 천체에서의 운동”(Motion in the Atmosphere of Eta Aquilae)이라는 학위논문으로 천문학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가 되었다. 이 논문은 당시 천문학계에서 논란이 일던 맥동 변광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1926년부터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학교를 그만두게 된 1937년까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를 지냈다. 해방 후 그는 유억겸, 백낙준과 더불어 총독부가 빼앗아간 연희전문학교를 인수하기 위한 접수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한일합병과 더불어 폐쇄되었던 세계적인 전통을 가진 조선의 관상감 기능을 부활시키기 위해 8·15해방 후 미군정장관이었던 하지 장군을 설득하여 중앙관상대를 신설하고 초대 중앙관상대장이 되었다. 인하공대 초대 학장을 맡아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던 이원철은 물리학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했지만, 훗날 창설된 물리학회와는 직접적인 연결을 맺지는 않았다.
  1924년 졸업생 중에는 일본 교토제대(京都帝大)에 유학을 가서 수학을 전공한 신영묵(辛永默: 理學士, 1927)과 수물학과 실험조교로 채용된 신제린(申濟麟)이 있었다. 1925년 졸업생 중에는 도호쿠제대(東北帝大)에 가서 수학을 전공한 장기원(張起元: 理學士, 1929)이 있었다. 1904년 평북 출신인 장기원은 1929년부터 일제의 압력에 의해 사임하기까지 그리고 해방 후에는 1966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연희전문학교와 연세대학교의 수학교수로, 이공대학학장으로 그리고 부총장으로서 학교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26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최규남은 1932년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0년 수물과 졸업생 중 박철재는 일본에 유학, 1940년 교토제대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될 당시 이공분야의 인재는 대단히 적었다. 그 많지 않은 중에도 연희전문학교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특히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몇 명밖에 없었으며, 그중에 3명이 연희출신이었으니 연희전문의 교육성과가 얼마나 컸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연희전문의 수물과를 졸업한 사람들은 거의 다 한국인이었고, 비교적 우수한 교수진 덕분에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많은 졸업생을 배출해서 훗날 우리나라의 과학 발전에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해당당시 우리나라 이공분야 인재가 아주 드물던 시절, 몇명에 불과한 박사학위 소지자중 3명이 연희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