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물리학의 선구자인 볼츠만의 제자인 울렌벡(G.E. Uhlenbeck)의 지도하에 조순탁이 1958년에 발표한 “The kinetic theory of phenomena in dense gases”라는 논문은 비록 정규 물리학 학술지에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는 “조 - 울렌벡 방정식”으로 알려져 현대 비평형 통계물리학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방정식으로, 거의 모든 통계물리학 교과서에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시작된 한국의 통계물리학의 연구활동은 1970년도 이전까지는 조순탁을 중심으로한 두세명의 물리학자들로 명맥이 유지되어 온 것 같다. 그러다가 통계물리학의 모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도 봄부터[1,2]인 것 같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연구는 대학의 교수들 중심으로만 이루어졌는데, 교수들은 과중한 강의 부담을 지고 있었고, 보조 연구인력 및 연구비가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조순탁을 중심으로 한 통계물리학 연구모임이 1970년도 봄에 형성되었던 것이 통계물리학분과회 활동의 씨앗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통계물리학을 전공한 국내의 교수로는 조순탁(서강대), 강우형(고려대), 김성운(고려대), 이구철(서울대), 최철규(충남대), 이경원(서울시립대) 등이었다. 이들 교수들의 연구열에 의해 자생적으로 연구모임이 태동하였는데 그 당시 이 모임을 “통계물리학 수요 세미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요사이로 말하면 이는 일종의 저널 클럽 형식을 취한 연구모임이었던 것 같다. “매주 수요일 오후에 서강대학교 조순탁의 연구실에 모여 논문 하나씩을 돌려읽기”로 한 모임이었다. 또한 “수요 세미나는 1974년 조순탁이 원장으로 부임한 홍능 과학단지 내 한국과학원 원장실로 옮겨서 진행되었는데 과학원 원장이라는 막중한 행정 업무에도 불구하고 별로 거르는 일이 없이 계속 이어져갔다”고 이구철이[1] 기억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수요 세미나 구성원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특히 이 모임은 시작 때부터 그러했듯이 각자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다는 순수한 연구자의 자세로 비용은 각자의 호주머니에서 충당하면서, 꾸준히 모임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모임을 중심으로 1973년 열 및 통계물리학분과회가 한국물리학회의 제 5 분과로 탄생하였다. 분과회 창립총회를 1973년 4월 27일 제 26회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서울대학교 강당) 기간 중 개최하고 전문 15조의 분과회규정을 채택하였으며 이 규정에 따라 임원을 선임하였다. 그후 분과회 창립규정은 1973년도 제1회 이사회(5월 26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인준을 받았다. 초대 임원진은 분과회장에 조순탁, 운영위원에 이병호, 이구철, 이정오, 강우형, 이용태가 선임되었고, 분과회규정은 「새물리」 제13권 2호(1973.6.30)에 게재되었다.
  열 및 통계물리학분과회 창립 후 통계물리학을 전공한 이들이 외국에서 귀국하거나 하여 그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이 모임이 어느새 “통계물리학 월례회”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던 것 같다. 특히 1980년대에는 통계물리학 월례회에 참가하는 연구자가 20여명[2]으로 늘어나면서 그 규모와 발표내용에 획기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순수한 학문적인 모임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이 없어서, 월례회에서 발표한 연사가 강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저녁을 사는 전통이 있었을 정도로, 구성원들의 학문에 대한 정열 하나만으로 월례회가 이어져갔었다.


1958년 조순탁이 발표한 "조-울렌백 방정식"은 거의 모든 통계 물리학교서에 인용된다.

 

 

 

 

 

 

 

 

 

 


1973년 4월27일 열 및 통계물리학분과회가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