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나라의 광학은 말할 나위도 없고, 물리학, 공학 전체가 극히 빈약하였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광학을 전공하고 강의한 사람은 권녕대뿐이었다. 한국 물리학계의 대선배인 그는 학과의 출범에 따른 여러 가지 행정적 문제와 더불어 보직을 많이 맡았고, 교육환경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현실이었기에 강의와 연구가 정상적일 수가 없었다. 1953년에 서울대 대학원 물리학과(청량리에 있었던 경성대학 예과 위치)의 광학·분광학 연구실에는 그래도 분광기(f=1.5m) 1대, 빛전자 빛띠(Photo-electric spectrum) 스캐너 1대 등이 있었다. 이마저 육이오전쟁 때 폭격맞고 다 파괴된 것으로 듣고 있다. 1950-1953년 사이 3년간 우리나라는 육이오전쟁을 겪고 더욱 큰 경제적, 문화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휴전으로 전투가 종식되자, 제대를 한 대학생 또는 대학 졸업자들의 일부가 외국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미국을 비롯해서 서방 각국에서 한국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는 기회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레이저가 광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레이저가 루비 결정(Aㅣ2O3)에 의해서 실험적으로 성공한 뒤인 1960년경부터라 하겠다. 1950년대 말부터 선진국으로 유학갔던 학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960년 우리나라에는 원자력연구소가 창립되었다. 그들 귀국 과학자들은 대학에 취업하거나 원자력연구소 등 연구소에 취업하는데 이 가운데서 원자력연구소에서 추진되던 원자로 내 체렌코프복사 연구와 각종 간섭계 개발 및 이들을 이용한 스펙트럼 선폭 측정연구가 특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원자력연구소에서 Imaging 스파크 상자 연구, 열루미네슨스 연구, 핵검출기 등 광학 기술을 응용하는 연구도 추진되었다.
  1963-1964년 사이에 원자력연구소 물리학연구실에서 He-Ne 레이저를 연구 개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큰 출력을 얻지 못하였고, 다만 출력광속의 결맞음(Coherence)이 향상하는 것을 영무늬(Young fringe)에서 확인하는 데 그쳤다. 1960 - 1970년 사이에는 각종 레이저가 전세계에서 연구되고 그 출력 광속을 홀로그래피에 이용하기 시작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나라에서 홀로그래피는 연세대 물리학과,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이 시기에 연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