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전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은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본과과정(本科課程)이다. 해방 직전에 경성사범학교 본과는 3년제 전문학교 과정으로 개편되어 한국인과 일본인을 반반씩 선발하였다. 학비는 전액 국고에서 지출되었으며 학생 1인당 상당액의 금액을 보조하였다.
  해방 전 일제치하에서는 식민지 국민의 우민정책을 철저하게 고수하면서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극히 제한하였다. 당시 한국내 고등교육 기관으로는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1개교뿐이며 그나마도 한국인은 정원의 20% 정도를 선발하였을 뿐이었다. 전문학교로는 서울과 지방, 관립과 사립을 통틀어 20개교 미만이었다.
  8·15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는 대학 승격을 목표로 예과부(豫科部)를 신설하여 문과와 이과를 두었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들의 귀국으로 재학생수는 정원의 반도 미치지 못하여,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1월에 편입생을 모집하였다. 이과에서는 80명을 모집하여 2개반을 편성할 예정이었는데 400명이 지원하여 5 :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이과에는 1개반이 있었는데 3개반을 편성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 개학 당시 교수로는 일반물리학을 담당한 신효선(辛孝善), 수학을 담당한 정봉협(鄭鳳浹), 정의택(鄭義澤), 국어를 담당한 이택(李澤) 등이 있었다. 위에 열거한 네명의 교수들은 육이오전쟁중 납북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해방직후의 어수선한 사회분위기는 학원을 면학에만 전념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좌우익 학생들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면서 연일 데모의 구호소리가 학원을 소란스럽게 하였고, 동맹휴학으로 강의가 중단되어 학생들은 거리로 내몰리기 일쑤였다. 많은 학생들은 실의에 빠지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더욱이 1946년 미군정청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이 발표되자 학원가는 일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렵게 구성하고 있던 교수사회도 분열의 조짐이 보이더니 많은 교수들이 국립대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청에서 발표하였던 국립서울대학교 종합안은 구 경성대학의 법문학부(法文學部), 이공학부(理工學部), 의학부(醫學部)를 중심으로 서울에 산재하였던 전문학교와 수원에 있었던 농전(農專), 경성사범학교 본과 등을 총망라한 종합대학교 설립안으로 현존하는 서울대학교 기구와 유사한 것이었다. 국내의 교수부족과 시설미비 등을 고려한다면 당시로는 적당한 안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정치환경의 영향을 받아 학원가의 반대와 반발의 기운은 결국 1946년 9월의 개교시까지 이어졌다.

서울대학교 개교와 육이오전쟁의 발발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가 드디어 개교하였다. 우리나라의 발전과 도약을 짊어질 최고학부로서의 국립서울대학교는 행정본부를 구 경성대학 법학부에 마련하였다. 그런데 당시 교무처에서는 학생들의 등록을 지도하던 이종수(李鍾洙, 교무과장, 후에 사대학장 역임)로부터 의외의 사실을 통고받았다. 예과부(豫科部) 이과 1년 수료자 120명 중에서 학업성적이 상위 10%에 속하는 자는 학부 1학년으로 진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례조치를 받은 자는 십여명이었는데, 물리화학과(내용적으로는 물리전공과 화학전공으로 분리) 1학년에는 5명, 수학과 1학년에는 1명, 생물학과 몇 명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사범대학의 재학생은 학부 3학년까지만 있고 4학년에는 재학생이 없었다. 1947년 9월에 열린 졸업식이 서울대학교의 제1회 졸업식이었으나, 사범대학에서는 다음해인 1948년에 제1회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전체 서울대학교 졸업식과 사범대학과는 1회의 졸업 회수의 차이가 생겼다. 서울대학교 개교 당시 사범대학 문리학과(文理學科) 학과장에는 김장석(金章石, 화학전공)이 담당하였으며, 3학년에는 재학생이 없었고, 2학년에는 2명 유경로(兪景老, 물리전공,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 역임)와 강용환(화학전공, 공주사대 교수)이 있었다. 물리학과 1학년에는 5명(물리전공 2명, 화학전공 3명)이 재학하였다. 사범대학 물리학과 제3회 졸업생이 된 이들 5명의 신상을 간단히 소개하면 물리전공자 2명은 정창희(서울대 기상학과 교수 역임)와 김순식(건국대 교수 역임)이며, 이들 두 사람은 1945년 편입시험때 앞뒤로 나란히 책상에 앉아 시험을 치른 기연을 갖고 있다. 화학전공자 3명은 이원식(서울사대 화학과 교수역임), 한용국(서울사대 교수, 부산공전 교장, 동양공전 교장 역임), 최순백(崔淳伯, 재학중 국가약사시험 합격, KBS방송요원 시험합격 등 다재다능한 才士)이 있다. 최순백은 육이오전쟁중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교와 동시에 신학기가 시작되었으나, 국대안반대 동맹휴학, 교수부족 등으로 강의는 지지부진하였다. 당시 사범대학교 물리화학과에는 물리전공교수가 전무한 상태여서 서울대학교 종합안에 따라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일반물리학 강의는 박철재가 담당하였으며 강의실은 공업연구소내 공대교실로 기억된다. 물리학실험은 김종철이 담당하였으며 실험실은 공업연구소내에 마련되었다. 고등미적분은 수학계 원로인 최윤식이 담당하였는데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는 동숭동 교사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언제나 4시간 연속강의를 하였다.
  1947년이 되면서 사범대학에도 물리학 전임교수들이 부임하게 되었다. 이낙복(李樂馥, 일본 도쿄대학 천문학과졸)이 일반역학을 담당하였다. 아깝게도 이낙복은 육이오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북한에서 평양천문대 대장을 역임하였다 한다. 고신득(高辛得, 일본 기상기술원양성소 졸)은 열역학을 담당하였는데 고신득 역시 육이오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그후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1947 - 1949년에 이르는 기간은 남북한이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좌우익의 극한대립이 날로 첨예한 시기였다. 더욱이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사회의 혼란과 학원소요는 그칠 날이 없었다. 국대안 반대로 서울대를 떠나 연세대로 옮겨갔던 한인석(韓仁錫)을 사범대학 강사로 초빙해서 전자기학강좌를 개설하게 되었으며,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학생들도 이 강의를 청강하러 사대에 오기도 하였다. 이기억이 담당하였던 양자역학 강의는 청량리 구 예과교사에서 청강하였다. 이기억은 육이오전쟁 후 도미하여 그곳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하였다.
  1946년 특례조치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1년 후배가 된 동기입학생들은 육이오전쟁으로 대부분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납북되는 이도 있었는데 김순식의 기억으로는 김근수(金根秀, 서울출신), 장세희(章世熙, 경남출신) 등이 있다.
  1949년도 사범대학 이학부 물리화학과 물리전공에는 신효선, 이낙복, 황득현, 이용달 등 4명의 교수와 유경로 조교가 있었다. 신효선은 동경물리학교 출신으로 육이오전쟁중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황득현의 전공은 잘 알 수 없으나 예과에서 독일어교수를 하였고, 52년에 독일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한다. 유경로는 사범대학 물리과의 1회 졸업생이다. 학생은 4학년에 2명, 3학년에 3명, 2학년에 3명이고, 1학년 신입생은 10명이었다. 신효선은 일반물리, 이낙복은 수리물리를 담당하였다. 이때의 캠퍼스는 을지로 5가에 있었다. 당시에는 교과서를 구하기 어려워서 방과후에 물리과 학생들은 모여서 연습문제를 풀었다. 이때 사용한 교과서는 일본의 일반물리 교과서였고 문제풀이는 4학년생인 정창회가 도와주었으며 때때로 이낙복이 도와주어 공부의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1950년 5월 12일, 육이오전쟁이 발발하기 한 달여 전에 서울대학교 제4회 졸업식(사범대학은 제3회 졸업식)이 동숭동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은 최규동이었으며, 사범대학 학장은 고광만이었다.
  1950년 6월 1일 교육법에 의해 사범대학의 문학부ㆍ이학부의 2개 학부 아래에 12학과를 두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물리화학과가 물리과와 화학과로 분리되었다. 물리과로 분리된 후 처음으로 과별 등록을 하였다. 그후 육이오전쟁이 일어나 대학운영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11월에 문교부 방침에 따라 타대학과 공동으로 연합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듬해 1951년에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이 운영되었다. 1952년 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되고 사범대학은 부산 대신동의 판자로 된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물리과 교수로는 서울에서부터 온 황득현과 새로 부임한 정연태, 김희규가 있었다. 학생들은 서울에서부터 있던 사람은 얼마 없었고, 부산에서 편입한 학생들뿐이었다. 강의는 2학년과 3학년이 합동강의 형식으로 하였고 그나마 휴강이 잦았다. 판자로 된 교실이고 보니 옆 강의실에서 강의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마치 시장바닥 같기도 하였다. 1학년은 일반물리, 일반화학, 일반생물 등으로 이어나갔으며 실험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황득현은 52년에 독일로 공부하러 떠났고, 다른 교수들은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아서 주로 정연태만이 과를 지키고 있었다. 김희규는 마산에 있었는데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아 마산까지 학생들이 성적을 받으러 가기도 하였다.
  1953년 8월에 정부의 환도와 함께, 사범대학은 을지로 캠퍼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을지로 캠퍼스에 와보니 전쟁 전의 공부하기 좋았던 환경은 사라지고 운동장과 수영장이 있는 곳에는 미군부대가 차지하여 담을 쌓아 놓았고, 을지로 대로변에 있는 붉은 벽돌로 된 건물만이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납북 또는 월북으로 전쟁 전에 있던 교수들 중 보이지 않는 이가 많았고 남아있는 교수로는 정연태와 김희규가 있었는데 김희규는 거의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생은 4학년 8명, 3학년 7명, 2학년 18명, 1학년 25명이었다. 환도 직후라 실험시설이 없어서 실험은 하지 못했다.
  1954년 12월 을지로 캠퍼스에서 용두동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새 캠퍼스로 와서 유경로가 증원되었으나 교수가 부족하여 강사에 많이 의존하였다. 강의는 강사를 동원하여 계속할 수가 있었는데, 실험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신희명이 당시의 조교로 임명되었다. 실험교재는 일본 실험책으로 하였고 실험재료는 청계천시장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을 사다가 꾸미고 없는 것은 수작업으로 제작하였다. 물성에 관한 실험장치는 이럭저럭 준비하였으나 전기에 관한 기구는 구하기 어려웠다. 표준전지, 표준저항 등은 수작업으로 만들었으며, 변압기는 낡은 변압기를 풀어서 다시 감아 사용함으로써 일반물리 실험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61년 12월 군사정권이 사범대학의 개편을 단행했다. 이학부는 물리과, 화학과, 생물과, 지학과를 폐과하고 과학과로 통합시켰다. 물론 문학부도 개편하였다. 따라서 학생수도 물리전공은 40명에서 15명으로 줄였다. 이런 개편에 대항하여 윤태림 학장, 교육과의 정범모 등 많은 교수 및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토론하였다. 이 사건으로 윤태림과 정범모는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윤태림은 곧 학장직을 사임하였다.
  1963년 사범대학에 교육대학원이 신설되었다. 이때부터 물리교육 석사과정이 시작되어 석사가 배출되었다. 이 당시에는 주로 물리교육과정 분석과 지도법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교수진도 변동이 생겼다. 김희규, 김영욱은 사임하고 유경로는 지구과학과로 옮겼고, 1962년에 신희명이 새로 임명되었고, 1964년에는 이수호, 1969년에는 박승재가 부임하였다. 이로써 물리교육과에는 정연태, 신희명, 이수호, 박승재 등 4명의 교수가 있게 되었다.
  1975년에는 사범대학의 교육대학원이 폐지되고 사범대학 대학원과정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대학원 강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 학교 교사들이어서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다. 1975년 4월에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교수로는 정연태, 신희명, 박승재가 남았고, 이수호가 자연대학 물리과로 옮겨갔다. 관악 캠퍼스로 옮긴 후 물리교육과의 교육환경은 용두동에 있을 때보다 좋지 않았다. 물리실험실을 자연대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실험실의 관리는 자연대 물리학과에서 관장하였기 때문에 물리교육과 시간에 맞추어 사용할 수 없는 때가 많았다.
  교수는 증원되어 1979년에는 소광섭, 1983년에는 홍종배가 부임했으며, 1988년 정연태의 정년퇴임 후에 이성묵, 1995년 신희명의 퇴임 후에 박건식이 왔다. 이렇게 하여 2000년에는 물리교육과 교수는 박승재, 소광섭, 이성묵, 홍종배, 박건식 등 5명이 되었다. 대학원 과정은 잘 운영되어 박사, 석사를 많이 배출하고 있다. 2001년에는 BK21이라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서울대학교 이공계의 교수들의 이동이 있었다. 이때 물리교육과에서 소광섭, 홍종배, 박건식 등 3명이 자연대 물리학과로 이적하였다. 물리교육과에 남은 교수는 박승재, 이성묵 2명이 되었다. 교수보충으로 송진웅이 왔으며, 2002년 박승재가 정년퇴임한 후에는 이성묵과 송진웅만이 학과에 남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물리교육과는 경성사범학교 본과과정 물리화학과, 1945년 광복후 예과부이과, 1946년 국대안에 따라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 사범대학 이학부과학과 물리전공, 1950년 6월1일 과학과로부터 물리학과로 독립, 1951년 부산전시 연합대학 1953년 8월 환도, 1961년 과학과로 통합을 거쳐 물리교육과로 이어졌다.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1963년 교육대학원 물리교육 석사과정 개설, 1975년 사범대학 대학원 과정으로 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