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 학과 신설 초기
  육이오전쟁 중인 1953년 2월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이 부산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문리과대학, 법정대학, 약학대학이 신설되었다. 문리과대학은 문학부와 이학부로 구성되었고, 이학부 내에는 생물학과와 화학과가 신설되었으며, 약학대학에는 약학부 약학과가 신설되었다. 동년 여름, 서울 환도와 함께 성대도 명륜동(明倫洞)으로 복귀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4년 2월 이학부에 심리학과, 수학과, 물리학과가 신설되었다. 수학과와 물리학과의 초대 학과장을 박흥수(朴興秀)가 맡았다. 박흥수는 부산 동아대학 재직 중 1953년 4월에 성대 약학과 초대 학과장으로 부임하여 있었다. 이와 같이 성대 물리학과는 해방 후 종합대학으로서의 성균관대학교 초창기에 신설되었다. 정원 120명(모집정원 30명)으로 육이오전쟁 후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나라를 재건함에 있어서 산업발전에 필요한 일꾼들을 키워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창설되었고, 박흥수는 이때부터 1967년 2월까지 12년 동안 물리학과장을 역임하면서 현대적인 학과의 모양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45년 해방되던 해에 국내에는 물리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수가 열명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해방 후 대학에서 물리학을 강의할 교원이 없었음은 물론이며, 그만큼 물리학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학문이었다. 박흥수는 해방전 일본 도쿄물리학교에서 현대적인 물리교육을 받은 몇 안되는 한국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도쿄물리학교 졸업 후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을 익히기 위하여 도쿄 고바야시 이학연구소(東京小林理學硏究所) 등에서 선진 과학기술을 익히고 연구에 종사하던 중 해방되기 얼마 전 귀국하여 고바야시광업 경성제련소(小林鑛業京城製鍊所)에서 초경질 분말합금 연구를 하였다. 해방 후에는 경성약학대학(京城藥學大學) 강사, 해병학교 교관(육이오전쟁 중)과 동아대학 교수를 거쳐 성균관대에 부임하였다. 성균관대에 부임한 후 초기에는 주로 광학을 연구하였고, 1960년대 초반부터는 국악음향학에 관심을 돌려 이 분야에 있어서 국내에서 독보적인 연구를 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과 우리나라의 도량형 제도에 대한 연구를 하여 서울시문화상, 세종문화상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학과가 창립된 이 시기는 국내 대학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교수들이 한 대학 이상에 적을 두기도 하였고, 이적이 빈번하기도 하였다. 1954년 9월에는 홍순복(洪淳復)이 부임하였는데, 1955년 3월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후에 응용물리학과)으로 옮겼으나, 옮긴 후에도 이 학과에 시간강사로 오랫동안 출강하였다. 1955년 4월에는 최종인(崔鍾仁), 김선규(金璿圭), 방성희가 부임하였다. 최종인과 김선규는 도쿄물리학교 출신으로서, 최종인은 주로 자연과학개론을 강의하였다. 김선규는 해방 전 경성제대 이학부 조교수로 있었고 육이오전쟁 후에는 온양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중이었다. 김선규는 열역학을 주로 강의하였으며 부임 후 실험실습 교육기자재의 정비에 많은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국내 최초로 무연탄 보일러 기술을 개발하여 특허를 출원하는 등 이 분야의 산업발전에 기초를 마련하는 업적을 남겼다. 경성제대 출신인(1943년 졸) 방성희는 주로 전자기학을 강의하다가 1957년 3월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로(후에 응용물리학과로) 옮겼다. 1956년 4월에는 해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이용두(李容斗)가 물리학과에 부임하여 물리수학을 강의하다가 1960년에 수학과로 옮겼다. 또한 같은 시기에 심운택(沈雲澤)이 부임하여 주로 전자기학 강의를 담당하였다. 심운택은 1964년 2월에 우주물리학과가 신설되면서 우주물리학과로 옮겼다. 1957년 4월에는 도쿄이과대학(東京理科大學) 출신의 박문호(朴文灝)가 부임하였고 주로 일반역학과 전자기학을 담당하였다. 1957년 8월에는 김윤수가 부임하였다. 김윤수는 1958년 9월에 캐나다로 연구차 떠나며 퇴직하였다. 이 밖에도 주로 당시 동숭동에 위치하였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들이 외부강사로 출강하였고, 고려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교수들이 간혹 출강하기도 하여 부족한 교수 여건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물리학과 초창기인 이 시기에는 낙제제도가 있어서 1학년 과목인 일반물리학을 이수하지 못하면 2학년에 진급을 할 수 없었다. 그럼으로써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과 실력 배양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다른 학과와의 형평성 등으로 인하여 수년 후에는 낙제제도를 더이상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선수과목(先修科目) 제도를 도입하여 선수과목을 이수하지 못하면 후수과목(後修科目)을 이수할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에는 실험기구는 말할 것 없고 강의 교재도 없는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험교육을 중시하여 김선규를 중심으로 교수들이 직접 동대문시장 등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실험기구를 제작하고 학생들의 실험을 지도하였다. 당시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실험을 정규과목으로 충실히 가르친 국내 유일한 물리학과였다고 할 수 있다. 1학년은 일반물리학실험, 2학년은 소위 정성실험(定性實驗), 3학년은 정량실험(定量實驗), 4학년은 연구실험을 하였다. 한편 1956년 4월에는 교사양성을 위한 교직과정을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았다. 1회 졸업생이 배출된 1958년 4월에는 대학원 물리학과에 석사과정이 신설되었다.
  이 시기는 또한 육이오전쟁으로 대학에 건물이 거의 없던 때였다. 물리학과의 경우에는 주로 현 법과대학 옆에 있던 가건물 등에서 강의와 실험이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박흥수의 주도하에 1959년 6월에 제2과학관을 기공하여 1960년 12월에 이 건물이 준공되면서, 일부는 수학과와 심리학과, 생물학과가 사용하였으나 대부분의 공간을 물리학과가 사용하였다. 이 건물내에는 물리학과 교수실, 연구실, 학생실험실, 강의실, 서고, 열람실, 세미나실 등이 갖추어져 당시로서는 실질적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독건물을 갖는 물리학과가 되었다. 또한 이 건물에는 150 kW 용량의 변전실이 있었고 정전시에도 연구 및 실험에 지장이 없도록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중앙도서관과 별도로 학과 도서실을 갖고 있었고, 연구에 필수적인 국제적인 주요 학술지를 구독하여 학과 도서실에 비치하였고, 그중 몇개 잡지의 경우에는 기존에 출간된 학술지까지 구입함으로써 1930년도에 간행된 학술잡지까지 소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학술지를 보유하고 있는 물리학과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드물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정립기 (1960 - 1970년대)
  1962년 9월에는 박흥수가 직접 설계하고 순수 국내기술로 건설한 천문대(天文臺)의 착공이 있었다. 동년 12월, 구 중앙도서관 옥상에 천문대가 완성되어 이를 성균천문대(成均天文臺)라고 불렀다. 사람의 손으로도 쉽게 돔을 회전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지어졌으며 16인치 반사망원경을 갖춘 국내 최초의 천문대였다. 이 천문대를 이용하여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의 경도와 위도를 측정하였고 태양흑점 관측이 이루어져 외국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이 천문대를 이용하여 당시 3, 4학년 실험의 일부와 대학원생들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박흥수는 이곳에 대한민국 경위도 원점을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예산 등의 이유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62년 12월에는 학부정원이 80명으로 감축되었다. 1964년 2월에는 천문대 시설과 그로부터 이룩한 관측 실적 등을 토대로 문교부로부터 우주물리학과 신설을 인가받아 3월부터 정원 120명의 학과가 창설되었다. 물리학과 심운택이 우주물리학과로 옮겨 초대 학과장을 맡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물리학과 정원이 80명에서 100명으로 증원되었고, 대학원 물리학과에 박사과정이 신설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일본 도후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덕원(李悳源)이 부임하였다. 이덕원은 소프트X선을 이용한 회절실험으로 생물물리학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그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으나, 고국의 물리학 발전을 위하여 귀국을 하였다. 이덕원은 물리학과에 물성물리실험실을 만들어 고가 연구용 기자재를 마련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965년 3월에는 물리학과 소속이 문리과대학에서 이공대학으로 개편되었다. 1966년 7월에는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던 김현창(金顯昌)이 본교로 부임하였다. 김현창은 핵물리실험을 전공하여 이 분야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박흥수는 무향실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음향학 분야에 있어서 국내에서 독보적인 연구를 하여 1968년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덕원과 김현창이 부임함에 따라 1960년대 말에는 전임교수 7명에 차관과 대일청구권 등으로 구입한 분광분석기와 X선회절장치 등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첨단 실험장비를 갖춘 국내 유수의 물리학과로 성장하였다.
  1970년 2월에는 최종인이 정년 퇴직하였다. 1970년에는 교내 여러 학과의 개편이 있었던 시기로 우주물리학과가 폐과되면서 물리학과로 편입되었다. 1977년 2월에는 물리학과의 정원이 160명으로 증원되었고, 1978년 1월에는 이공대학 내 이학부로 소속이 개편되었다. 1979년 2월에는 학부정원이 200명으로 증원되었다.

발전의 시기 (1980 - 90년대)
  1980년 3월에는 이공대학에서 이과대학으로 소속이 개편되었고, 또한 동년 9월에는, 미국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에서 핵물리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택(金柄澤)이 부임하였다. 성균관대 물리학과 9회 졸업생인 김병택의 부임은 학과를 창설한 교수들의 제자가 학과의 교수로 처음 임용된 것으로, 이로부터 차차 교수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1981년 8월 대학시설 확충계획에 따라 수원에 위치한 자연과학캠퍼스로 이전하면서 공간 등 시설설비를 대폭 확충하였다. 1983년에는 성능이 매우 뛰어난 무향실이 박흥수의 설계와 국내 기술만의 제작으로 완공되었다. 1983년 2월에는 이덕원이 정년퇴임을 하게 되면서 그 후임으로 3월에, 일본 도후쿠대학에서 표면물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종윤(朴鍾允)이 부임하였다. 동년 12월에는 문교부의 특성학과로 지정되어 중점 육성되었다. 1983년에는 약 35만달러 상당의 OECF 차관사업을 통하여 대형 실험 실습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물리학과 창설 30년 되는 시기인 1984년 2월에는 박흥수가 정년퇴임을 하였고, 8월에는 김선규가 정년퇴임을 하였다. 박흥수가 퇴임하면서 공백이 생긴 음향학 연구실을 이끌어갈 교수로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윤석왕(尹錫旺)이 1985년 9월에 부임하였다. 1987년 3월에는, 미국 UCLA(Univ. of California at Los Angeles)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무용(崔武鏞)이 부임하여 저온물리 연구실을 만들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입자물리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오필렬(吳弼烈)이 부임하였다. 1988년 3월에는 학부정원이 증원되어 정원 240명이 되었다. 1990년 2월에는 김현창이 정년퇴임하였고, 그 뒤를 이어 3월에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핵물리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홍승우(洪承宇)가 부임하였다. 1991년에는 약 15만달러 상당의 IBRD 차관으로 최신 연구용 실험 기자재가 들어왔다. 1992년도 3월에는, 핵 및 입자물리 실험을 전공하고 미국 피츠버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영일(崔榮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고체물리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한용(崔漢容), 자성체물리 실험 전공으로 일본 도후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권용성(權容聖)이 부임하면서 학과의 교수 수가 처음으로 10명이 되었다. 그해에는 대학교육협의회가 처음으로 도입하여 실시한 전국 대학학과평가 인정제가 있었는데, 이 평가에서 과의 학부가 무순위로 선정한 상위 20개 대학 내에, 그리고 대학원이 상위 10개 대학 내에 들어가는 우수학과로 평가를 받아, 대학원과 학부가 모두 우수학과 판정을 받은 10개 대학 내에 들었다. 1993년도에 실시된 전국 기초과학연구소 평가에서는 이 학과가 속해 있는 성균관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가 지역거점연구소로 선정되었다. 1994년은 물리학과 창설 4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해 8월에 박문호가 정년퇴임하면서 이로써 물리학과 창설 초기의 교수들이 모두 정년퇴임을 하였다.
  1995년 3월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반도체 및 박막실험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동근(鄭東根)이 부임하였다. 1996년 3월에는 학부제의 실시로 인하여 이과대학 내 자연과학부 소속으로 개편되었고, 이에 따라 학부의 경우 기존의 물리학과라는 명칭 대신에 자연과학부 내 물리학전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학원의 경우에는 종전과 마찬가지로 물리학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995년도까지는 입학정원 60명의 신입생이 입학하였으나, 1996년도부터는 학부제 시행에 따라 자연과학부에 입학한 학생들이 2학년 진급시 전공을 결정하게 되었다. 1996년 9월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입자물리이론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김윤배(金玧培)가 부임하였고, 1998년 3월에는,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입자물리실험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유인태(兪印泰)가 부임하였다.
  1999년에는 교육부 산하기관인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두뇌한국21(BK21) 프로그램에 서울대학교 물리학부와 함께 서울대 - 성균관대 물리연구단을 구성하여 선정되었고, 2005년까지 7년간 매년 많은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2001년 3월에는 과학기술부 지정 국가지정연구실 “탄소나노튜브연구실”의 소장인 이영희(李永熙)가 전북대 물리학과에서 이 학과로 오게 되어 나노물리분야의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2001년 6월에는 과학기술부 산하 기관인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는 우수연구센터(SRC)로 “나노튜브 및 나노복합구조 연구센터”(소장 박종윤)가 발족하여 향후 9년간 지원을 받게 되었다. 2001년 9월에는 인하대에 재직중이던 박제근(朴濟根)이 이 학과로 오게 되어 응집물질 분야가 더욱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하게 되었다.

졸업생 현황 및 현재
  물리학과는 1958년 이래로 2001년 현재 1300명이 넘는 많은 수의 우수한 이학사를 배출하였다. 먼저 학계를 살펴보면, 2002년 현재 국내외 대학에 27명의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졸업생이 전임교수로 재직중이다. 전임교수로 있는 대학들은 강릉대, 경기대, 경성대, 단국대, 삼척공업대, 성균관대, 순천대, 외국어대, 원광대, 인천시립대, 전남대, 전북대, 제주대, 창원대, 청주대, 충남대, 충북대, 충주산업대, 한남대, 볼주립대(Ball State University, 미국 인디애나주), 메릴랜드대(미국 메릴랜드주) 등이다. 또한 많은 졸업생이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과정연구 중에 있거나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므로 앞으로 그들의 활동이 기대된다. 이와 아울러 약 80명의 졸업생들이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국립 또는 산업체 연구소에서 학문탐구 및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졸업생들도 많이 있다.
  물리학과는 설립 초기부터 연구에 필수적인 전문 학술지에 특별히 큰 비중을 두고 구독하여 2002년 현재 100여종에 달하는 학술잡지를 구비하고 있다. 또한 표면분석장비, 무향실, 무반향수조, 음향발생 및 측정장비, 저온측정장비, sputtering system, 광학분석장비, 결정성장장비, STM 등을 비롯하여 이 학과가 보유하고 있는 고가 연구용 실험장비들은 70여점에 이르고 있다. 전임교수들의 활발한 연구활동으로 많은 교외 연구를 수행하고 있고 국제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 결과, 2001년 두뇌한국21 평가 결과에 따르면, 22개 전 참여사업단 중에서 2위라고 하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리학과는 연구중심 학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입자 및 핵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물리 음향학 분야를 특별히 특성화 연구분야로 정하고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각 분야별 세부전공을 살펴보면, 핵 및 입자물리학 분야에는 입자물리 이론, 핵물리 이론, 입자 및 핵물리 실험이 있고, 응집물질물리학 분야에는 고체물리 이론, 표면물성 실험, 저온물리 실험, 자성체물리 실험, 박막 및 반도체 실험이 있다. 학부 학생들도 연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최근에는 학부 졸업생들의 3분의 1 정도가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있다. 2002년 현재 대학원에는 석사과정에 약 50명, 박사과정에 약 50명 도합 100명 정도의 대학원 학생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대학원 졸업생들의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고 있다. 1992년에는 물리학과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였고, 2002년 지속적인 교수 충원과 교외연구비, 실험실습 설비 확충 등을 통하여 충실한 교육과 활발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으며 국내 최고 수준의 물리학과를 만들고자 정진하고 있다.




1953년 부산 피난중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성균관 대학교는 환도 후 1954년 이학부 물리학과를 신설, 1958년 석사과정 1964년 박사과정을 신설. 물리학과 소속이 문리과대학에서 1965년에 이공대학, 1980년에 이과대학으로 변경. 1981년에 수원캠퍼스로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