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초기
  1971년 1월 이상수 초대 원장 임명과 함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당시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어 그 안에 수학 및 물리학과를 개설하면서 이상수(광학), 조병하(이론), 김재관(입자)이 부임했고, 1973년 3월에 10명의 응용물리 전공 석사과정 학생들이 선발되었다. 당시 기숙사 건물만 완공되어 교수들의 연구실과 학생들의 강의실을 서로 겸하게 되었고, 입학 후 6개월이 지난 1973년 가을학기에 들어서 강의실 및 교수 연구실 건물이 완공되었다. 1974년 5월 제3대 원장으로 조순탁이 부임하면서 학생들 실험실의 기본 측정기기 긴급 구매를 위한 추가예산이 원 차원으로 각 학과에 배정되었다. 1973년 가을 미 남부캘리포니아대학교의 김영배(金榮培)가 초빙교수로 유치되어 고체물리 강의가 시작되었고, 1974년 봄 학기에 김종진(金鍾鎭)이 부임하면서 고체물리 분야가 시작되었다. 1975년 가을학기부터는 이주천이 고체물리 분야에 유치되면서 고체물리 분야가 정착되었다. 실험기기 부족 등 실험실 미비로 학생들을 이끌고 원자력연구소(당시 공릉동 소재)에서 고체물리 실험을 수행하였고, 석사논문 실험도 원자력 연구소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결과 1975년 8월에 제1회 졸업생들이 석사학위를 받고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KIST의 정원(丁元)이 1970년 4월에 미국의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서 1968년에 발간한 “A Report Prepared by a Committee of the Solid State Science Panel for the Coordinating Committee for Materials Research and Development of the 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를 『물성 과학의 연구 - 발전 전망과 국가적 요망과의 관련성』이라는 제목으로 부분 번역문과 전체 원문을 같이 묶어 109쪽의 단행본으로 출판했고 이어서 1975년 6월에도 역시 미국의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출판(1974)의 “Materials and Man’s Needs(Summary Report of the Committee on the Survey of Materials Science and Engineering)”를 91쪽으로 요약한 소개책자를 발표하였다.
  이들 책자에 고무되어 김종진이 정원과 원자력 연구소의 김기수(金基秀)를 방문하여 당시의 한국 고체물리분야 연구 현황과 인원 파악을 위한 모임을 제안,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여 이루어진 것이 1975년 한국 과학원에서 모인 제1회 고체물리 심포지엄이다. 1975년 6월 9일(월요일)부터 시작하여 연속적으로 매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초청강연 연사 2명과 동일 또는 관련 분야에서 초청된 지정 토론자(panel discussion members) 8명을 위시하여 매주 30여명이 모일 수 있었고, 7월 7일(월요일)까지 5개 분야의 고체물리 심포지엄이 계속되었다. 이때 제1회 고체물리 심포지엄에서 좌장을 맡았던 분들은 맹선재(KIST, 6월 9일), 옥항남(연세대, 6월 16일), 김영전(金永銓, 육사, 6월 23일), 이병혁(李炳赫, 서강대, 6월 30일), 라병욱(경북대, 7월 5일)이었다. 제2회는 당시 한국물리학회 고체물리 분과위원장을 맡았던 김희규(동국대)가 주관하여 동국대학교에서 계속되었고, 제3회는 특정분야를 선택하여 “상전이와 임계현상”이라는 부제로 다시 한국과학원에서 1977년 12월 16일 - 17일 2일간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때 초청강연은 이재현(李在賢, 부산대)의 PLZT 세라믹의 강유전성 상전이, 권숙일(서울대)의 강유전체의 질서 - 무질서 상전이, 김종진(과학원)의 강유전체의 무른모드 동역학(soft - mode dynamics), 옥항남(연세대)의 뫼스바우어 효과를 이용한 상전이 연구, 김두철(金斗哲, 서울대)의 폿츠모형과 그 물리적 이해(Potts Model and Its Physical Realization)였다. 이 고체물리 심포지엄은 오늘날 한국물리학회의 가장 규모가 큰 분과학술활동 정기모임이 되어 매년 계속되고 있다. 제3회 심포지엄(1977)의 12월 17일 강연 후에는 실험실 장비가 들어와 가동준비가 완료단계에 들어섰던 과학원의 교수 실험실들이 공개되었다(이상수의 광학 연구실, 이주천의 반도체 연구실, 김종진의 고체분광학 연구실). 조순탁 원장의 헌신적 노력과 정부의 이해와 협력으로 AID, IBRD 자금에 의한 실험실 장비들이 1976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여 이루어진 실험실들이었다. 실험실이 가동되면서 국내 연구결과들이 1978년부터 해외 저널에 발표되기 시작하였다.[J. - J. Kim, Phys. Lett. 66A, 19(1978).]
  이미 1974년 9월 4일에 이상수가 주관하여 프랑스의 광학분야 대가들 8명을 초청한 “서울응용광학심포지엄(Seoul Symposium on Applied Optics)”을 KAIS에서 개최하였고, 현재 국제회의로 발전되어 계속하고 있는 반도체 국제심포지엄의 효시가 되었던 제1회 “서울국제반도체물리학심포지엄(Seoul International Symposium on the Physics of Semiconductors and Its Applications)”도 이주천이 조직위원장으로 KAIS에서 1982년 7월 19 - 20일 사이에 개최되었다. 1980년에 김호철(金浩鐵)의 부임으로 재료응용 물리분야가 시작되었고, 이어서 1981년에 최덕인(崔德隣)이 유치되어 플라스마물리학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특히 KAIST는 전통적으로 한국물리학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그 저변에는 조순탁(제5대 회장, 원장역임), 이상수(제8대 회장, 원장역임), 조병하(작고, 제9대 회장, 과기대 학장역임), 이주천(제14대 회장, 원장역임), 최덕인(제17대 회장, 원장역임)이 모두 한국물리학회 회장직을 역임하여 학회 발전을 위한 헌신적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업적으로, 1970년대 말까지 국내에는 거의 황무지였던 광학분야의 인재를 대량 배출하여 국내의 학계, 연구소 및 산업체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1972년 과기원이 창설된 이래 이상수의 지도를 선봉으로, 지금까지 총 200여명의 석사학위, 100여명의 박사학위를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거의 모두 국내의 여러 산업체, 연구소 및 학계에 진출하여 매우 다양하고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물리학과 광학 연구실에서 이룬 연구분야로는 CO2 레이저, 고출력 옥소 레이저, N2 레이저, 색소 레이저, 루비 레이저, Nd:YAG 레이저, 초고출력 Nd:Glass 레이저들의 다양한 레이저 개발을 비롯하여, 광학계 설계, 홀로그래피, 다층박막 광학계, 산란 광학, 고분해 분광학, 비선형 광학, 위상 공액파, 도선폭발(wire explosion), 레이저 간섭계에 의한 충격파 측정, 광섬유광학, 반도체 레이저(표면발광 레이저 다이오드), X선 발생, 양자광학 이론 등 매우 다양한 광학 분야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과기원 물리학과에서 초창기부터 시작한 광학공작실(당시 이상수의 기술지도로 김영기 기술원 등 여러 명의 기능원 배출)은 국내 광학업계에 커다란 기술적인 기여를 하였고, 국내의 광학 벤처 기술개발에도 촉진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2년에는 과기원에서 열린 레이저 여름학교(A. Siegman 초청, 이상수의 주관으로 한국물리학회 응용물리분과 주최)를 통하여 국내의 학계 및 산업계의 인력들에게 레이저에 대한 이론 및 실험실습을 통하여 유익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KAIST 입자물리그룹에서는 표준모형을 넘어서 양자중력을 포함한 좀더 근본적인 물질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가속기 실험과 양자장론, 초끈이론, 우주론 등과 연관시켜 연구하고 있다.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입자물리는 당장의 실용성보다는 물질의 근원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이를 통한 타 물리학 분야 더 나아가 공학분야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KAIST 입자물리그룹의 역사는 고 조병하와 김재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병하는 경북대 재직 당시 한국과학원(KAIS)의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1971년 한국과학원 설립 이후 계속 한국과학원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곳에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며 후일 한국과학기술원의 학부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영재 교육기관인 한국과학기술대학의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학장으로 근무하는 등 평생 교육 및 과학계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국제물리학 기구인 “물리학에 응용되는 군론에 관한 국제회의(ICGTMP)”와 “원자핵소립자국제회의(PANIC)”의 상임이사로 활동하는 등 한국물리학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국가에서도 인정하여 국민훈장 석류장 등의 훈장을 수여하였다. 조병하는 평생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관계기관에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진흥을 건의하고 정책입안을 주장하였다. 물리교육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물리학 등 학생들의 물리학 학습에 관심있는 저서들을 편찬하였으며, 한국물리학회에 학술지 「물리교육」의 창간과 발전에 애를 썼다. 1981년 개최된 한국물리학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어 2년간 학회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조병하는 그 당시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큰 국제학회를 유치하였는데 1985년에는 상임이사로 있던 국제군론학회를 한국에 유치하면서 조직위원장으로서 외국에 한국의 이론물리학의 수준을 소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후 이탈리아 국제이론물리센터(ICTP)같은 국제기구를 우리나라에 유치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성실하고 예의 바른 삶은 후학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김재관은 서울대, 미국 링컨메모리얼대, 시카고대(석사)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텔레타이프사 연구원, 미국 예일대 전임강사, 미국 하버드대 조교수를 거쳐 1972년 과학원 부교수로 부임하였다. 그후 학생처장, 과학원 부원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한국물리학계와 과학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김재관은 particle data book에 업적이 인용될 정도로 세계적인 입자실험물리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국에 온 이후론 실험이 어려운 환경상 이론으로 전환하여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또한 한국의 가속기 실험능력의 증진을 위해서도 애썼다.
  1973년 미국에서 이휘소 등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연구가 폭발적으로 시작할 때 과학원 입자물리그룹은 서울대, 서강대, 고려대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몇 안되는 입자이론 그룹으로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그룹들은 새로운 연구분야를 위한 비가환 게이지 이론에 대한 워크숍을 매주 과학원에서 주최하였다. 각 대학의 교수는 열심히 일주일간 준비하여 매주 교대하며 강의하였고 그 당시 십여명의 대학원 학생들도 열심히 참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비가환 게이지 이론 연구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1981년과 1983년에는 한국물리학회와 공동으로 이휘소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창시자인 C.N. 양과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되틀맞춤을 성공시켜 이론적 계산 및 응용을 가능케 한 토프트를 초청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의 입자물리학 연구는 세계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현재까지 칠팔십명의 박사학위자가 이 분야에서 배출됐다. 김재관과 그 제자로 이뤄진 연구그룹은 한국의 주요 이론물리그룹의 하나로서 입자현상론, 초끈이론, 대칭성파괴, 블랙홀, 우주론 등 다양한 분야의 좋은 연구를 수행하였다. 김재관 등 한국과학기술원의 입자물리그룹은 고등과학원의 설립과 운영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고등과학원은 우리나라의 기초과학을 노벨상 수준의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1996년 설립된 과학기술부 과학기술원 산하 연구소이다. 고등과학원에는 수학부, 물리학부, 화학부, 생물학부, 계산과학부가 있으며 각 학부에는 세계적인 석학과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뛰어난 연구를 하고 있다. 또한 국제 학술행사 및 세미나를 자주 열어 해외의 최신연구를 소개하고 국내 학자들과 상호 교류 증진을 통해 기초과학 분야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공로로 김재관은 삼일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2001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과학기술부) 등을 포상받았다.

도약과 성장기
  1984년 공홍진, 1989년 이해웅, 남창희, 1990년 김병윤, 1991년 이용희가 새로이 부임하면서 1990년대에 이르러 과기원의 광학분야는 가장 활발한 연구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국내 최초로 고출력 레이저를 개발하게 되어 1984년도에는 10GW급 옥소 레이저 개발, 1994년 2 TW 레이저를 개발하여 고출력 레이저 분야에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8년에는 20펨토초 3테라와트 티타늄 사파이어 레이저를 개발하여 강력장 레이저 물리학 분야의 국내 활성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1990년에 한국광학회가 이상수를 초대 회장으로 하여 발족하게 되었으며, 2001년 현재 2000명이 넘는 커다란 학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1994년 국제 초고속 광학기술 학회(21st International High Speed Photography and Photonics - SPIE, 1994년 8월, 김웅 회장, 대전 롯데호텔)를 국내 최초로 유치하여 개최한 것을 계기로 계속하여, 1996년 제17차 국제 광학회 학술회의(제17차 ICO, 당시 ICO 부회장인 이상수 주관, 대전 리베라호텔), 제1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레이저 학술대회(APLS’98, 1998년 4월, 공홍진 주관, 제주 그랜드호텔), 제13차 국제 광섬유센서학회(13rd OFS, 1999년 4월, 김병윤 주관, 경주 현대호텔), CLEO - Pacific Rim(1999년 8월, 이주희 주관, 서울 라마다 르네상스호텔) 등 여러 가지 대형의 국제학회의 개최가 이루어지게 되어 명실공히 국내의 광학분야는 이제 세계적으로 연구 및 교육 분야에 있어서 선진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1989년에 장기주를 유치하여 고체물리 이론분야가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1991년에는 전북대 이금휘, 서울대 임지순과 협동하여 제1회 고체물리 이론 심포지엄이 시작되어 고체물리 이론 분야의 급속한 저변확대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1992년부터는 서울캠퍼스(KAIS)의 석·박사과정과 대덕캠퍼스(KIT)의 학사과정이 통합되어 현재 물리학과 교수가 27명에 달했고, 응집물리 분야에 10명 이상의 교수가 속해있다[창의과제 연구단(nano - spintronics, 신성철; coherent X - ray, 남창희), 국가지정 연구실(고온 초전도체응용, 염도준; semiconductor surface laser, 이용희; NMR quantum computing, 이순칠), soft matters(김만원), 고체이론(장기주), 반도체 및 photonic band gap(신중훈, 박해용, 김재은), 비선형 광물성(윤춘섭), 비선형 동역학 및 생체현상(문희태, 김수용), 강유전체 상전이(김종진)].
  1985년 서강대 교수로 있던 초중력과 초끈 전문가인 고인규를 영입함으로써 입자물리그룹은 국내에서 세계수준의 최신이론을 동시대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됐다. 고인규는 한국물리학계의 기대를 받는 젊은 학자로서 대통일이론, 초중력, 게이지이론, 자기단극자, 초끈이론 등에서 활발하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10여년 전부터 고인규는 이론물리학의 여러 개념을 순수학문에 국한시키지 않고 인공지능과 연결시켜 산업화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인쇄 및 손으로 쓴 글자를 스토카스틱 방법과 새로운 특징을 사용하여 인식하는 연구 결과로 “코테크 시스템”을 공동 창업하였다. 또한 음성의 물리적 분석, 특징추출, 신경망 및 마코프 모델, 확률적 방법을 활발히 연구 개발, 상품화되고 있다. 이런 연구 결과물은 IR52 장영실상, 신소프트웨어 대상 등의 수상으로 이어졌다.
  타계한 조병하의 후임으로 1994년 당시 해외에서 초중력의 현상론연구로 각광을 받고 있던 최기운을 영입하여 이론물리그룹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된다. 최기운의 주요연구분야는 4차원 시공간에서 정의된 상대성 이론을 확장시킨 초대칭 이론들의 입자물리학적 성질 및 우주론적 성질들의 연구이다. 최기운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힘을 통일시켜 주는 궁극적인 자연법칙 이론으로 기대되어지고 있는 10차원 초끈이론 및 11차원 M이론의 4차원 저에너지 유효이론의 성질들을 규명하여 이와 관련된 입자물리 현상들을 연구하며, 또한 이들 이론들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다양한 초대칭 입자들이 우주의 암흑물질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사하고 우주 거대구조 형성에 미치는 영향들을 연구한다. 또한 최기운은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육성하고 있다.
  1997년 홍익대 교수로 있던 고병원을 영입하여 가속기물리를 이용한 현상론을 보강하게 된다. 고병원은 양자색소이론(QCD)및 카이랄 섭동론을 통한 강한 상호작용의 이해, K 및 B 중간자 붕괴에서 나타나는 CP붕괴, 중성미자 물리, B 팩토리(factory) 및 차세대 선형 가속기에서의 초대칭 모형의 현상론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앞으로 (향후 5 - 10년 사이) 전세계의 여러 B 팩토리 실험을 통해 많이 보게될 B 메존의 붕괴에서 예측되는 CP 붕괴를 표준모형 및 초대칭 모형 내에서 이해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입자물리그룹은 최근에는 초대칭 인플레이션 우주론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스튜어트(E. Stewart)를 영입하여 학교의 세계화도 도모하고 있다. 지난 30여년간 KAIST입자물리 그룹은 이상과 같이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한국물리학회 특히 이론물리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음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KAIST 입자물리그룹의 업적이라면 우수한 연구인력을 양성했다는 점일 것이다. 척박한 연구환경에서 많은 입자물리학 박사를 배출하여 그중 상당수는 대학교수로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며 한국 이론물리학계의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0년대 석유파동과 더불어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에 대한 우려가 세계적으로 크게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미래 에너지원과 관련하여 핵융합 에너지 창출에 필수적인 플라스마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제4의 물질 상태로 분류되는 플라스마 연구가 짧은 기간에 활발한 연구분야로 체제와 내용을 갖추고 물리학의 새로운 분야로 정착되게 된 것이다. 에너지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일본과 더불어 같은 사정이면서도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도 이 분야의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논의되게 되었다. 대학원 체제이면서 연구중심 교육기관인 KAIST에서 플라스마를 새로운 분야로 물리학과에 추가하기로 한 것은 당시 6명의 전임교수의 노력과 더불어 KAIST 체제의 유연성 덕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 분야를 위하여 1981년 초빙된 최덕인은 1977년 여름에 과학원 초빙교수, 1979 - 1980년 서울대 AID교수를 역임하여서 국내 유치가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으며 장충석은 과기대에 유치되어 KAIST에 합류하게 되었다. 실험분야 장홍영의 유치는 KAIST뿐 아니라 국내 플라스마 연구계를 위해서도 아주 잘된 일이었다. 1998년 최원호를 실험분야에서 유치함으로써 명실공히 국내외에서도 플라스마연구센터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 광학 - 플라스마 양분야에 걸쳐 실험전공인 남창희와 천체플라스마의 민경욱이 합세하여 총 6명으로 작지 않은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플라스마 연구는 국내에서도 새로운 분야로 그 저변확대가 급선무였고 선진국과의 교류가 필수적으로 미국, 영국, 일본 등과 긴밀하고 활발한 교류를 갖기 시작했으며 중국과도 교류를 하게되었다.
  물리학회의 원로와 타분야 회원들의 호응을 받아 1982년 한국물리학회에 플라스마 분과를 창설하였다. 이 작업은 원자력연구소 정문규, 서울대학교 정기형, 그리고 KAIST의 최덕인이 열심히 노력하고 협력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또 플라스마와 같은 대상의 다른 면을 연구한다고 할 수 있는 방사광가속기가 포항공대에 추진되면서 플라스마분야 연구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1980년대 인력 배출은 실험은 서울대 정기형실험실, 이론은 KAIST 최덕인연구실 출신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1990년대부터는 국내 연구분야도 다양화되고 포항공대, 한양대, 경북대, 경희대, 숭실대, 이화여대 등의 여러 기관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방사광가속기와 거대장치로 맥을 같이하는 차세대초전도 핵융합장치 KSTAR가 추진되고 이용되는 것을 볼 때 1980년대 초에 KAIST가 플라스마를 새로운 분야로 결정하여 이 분야 국내 연구 활성화와 인력배출의 효시가 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1991년 초 최덕인, 장홍영팀은 미 텍사스대학(오스틴)대학으로부터 프리텍스트 토카막(PreText Tokamak)을 기증받아 구 과기대 2호관에 1992년 KAIST 토카막을 설치하였고 가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 프린스턴 플라스마연구소로부터 유치된 최원호의 노력으로, KAIST 토카막의 성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기초과학연구소의 KSTAR 프로그램의 지원하에 최근까지(2001년 12월) 양장규를 포함하여 4명의 박사와 6명의 석사인력을 배출하였고, 3명의 매우 우수한 엔지니어를 배출하였다. 한편 SystemIC 2010, BK21 플라스마연구팀 등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저온플라스마, 우주플라스마 및 플라스마응용분야 연구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 1990년 이래로 25명의 박사인력을 배출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국내 플라스마 관련산업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약진과 전망
  개교후 30년에 걸쳐 학사 386명, 석사 728명, 박사 393명의 졸업생들이 학계, 연구소, 산업계로 진출하고 있으며, 노비라 옵틱스(Novera Optics) 등 여러 벤처회사를 설립하여 기업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설립 초기의 조순탁과 조병하가 이미 타계하였고, 이상수, 김호철, 이주천, 김재관, 최덕인이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봉직하고 있는 KAIST 물리학과에는 다시 30대 초반의 젊은 교수들로 입자물리(String Theory)의 김영재, 고체물리(반도체)의 신중훈, 통계물리(복잡계 이론)의 정하웅이 영입되어, 다시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물리학과를 충전시키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는 1971년에 과학원 석·박사 대학원과정으로 개설. 1989년 대덕의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함에 따라 학부·대학원을 포함한 물리학과로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