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학교 창립자인 김흥배(金興培)는 육이오전쟁 직후 초토화된 조국을 재건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외국어교육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 한국을 국제사회에 이해시키고 전세계로 뻗어나갈 인재양성이 절실함을 인식하고, 1952년 12월 동원육영회를 설립하여 1954년 4월 20일 진리·평화·창조의 건학이념으로 한국외국어대학을 설립하였다. 외국어 교육의 목적이 이해와 교류증진에 있는바 사회과학 교육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1963년에 외사 학부를 신설하여 어학과 사회과학에 중점을 두고 단과대학으로서의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외국어는 인간과의 이해와 교류를 증진시키지만 자연의 이해와 조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어 교육 못지 않게 자연과학 교육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1980년 10월 2일 종합대학교로 승격시켜 인문·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분야를 포함한 균형있는 발전을 할 수 있는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여명기
  이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설치되고 물리학과가 신설되었다. 초대학장(1981. 3 - 1984. 3)으로 안중태(安重泰) 화학과 교수, 초대 교학과장 겸 물리학과장(1981. 3 - 1984. 3) 김직현(金直顯)과 물리학과 최인준(崔仁俊)의 준비로 1981년 3월 1일 서울캠퍼스에서 수업을 시작하였으며 건평 80평의 물리·화학 실험실 가건물을 신축하여 기초과학에 필요한 실험을 시작하였다.

유아기
  안중태 학장과 김직현 교학과장은 학교발전 장기계획에 따라 80여만평의 용인캠퍼스 부지에 4050평에 달하는 5층건물(자연과학대건물)을 신축하고 1984년 1학기부터 수업을 시작하여 1985년 2월에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다. 2명의 교수가 신설학과를 탄생시켜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마찰 또한 컸으니 그들의 어려움이 한국외국어대학교 물리학과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84년 가을학기에 김광열(金光烈)과 1985년 3월에 김민곤(金旻坤)이 학과에 합류하여 4명의 전임교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양적 성장기
  제2대 학장(1984. 3 - 1988. 2월)에 보임된 김직현은 학과와 대학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1984년 11월 대학원 석사과정을 신설하여, 1987년 2월에 2명의 물리학전공 이학석사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1987년 11월 대학원 박사과정이 신설되어 학과발전의 단단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1988년 문리과대학이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됨에 따라 학과 소속이 자연과학대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활성화하고 대학원생들의 연구 참여 기회를 넓히는 방안의 일환으로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에 김민곤(1986 - 1990)이 임명되어 학술세미나 개최와, 학술회의 유치, 산학연 공동연구 과제 창출, 구성원의 외부 수탁과제 수행을 지원 관리하는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연구소 학술지로 「기초과학연구」를 발간하여 구성원의 연구활동을 장려하고 외국어대학교내 자연계열의 존재와 연구활동 관련 홍보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물리학과의 교육목표는 연구인력 교육과 산업인력 양성 및 타학문 분야에 대한 지원 교육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물리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과학 지식의 폭넓은 응용과 기술적 판단력을 교육시켜 현대 정보화산업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세계적 경쟁력 우위를 제고시키는 데 두고 있다. 학과의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물리학의 응용분야에 역점을 두고 교과 과정을 지속적으로 개선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모든 학생이 21 - 33학점에 해당하는 부전공이나 자유선택을 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학기간을 연장하여 복수전공을 택할 수 있게 하여 물리학을 기초로 한 응용학문 분야에 수학기회를 충분히 부여하고 적성에 따라서는 어학이나 사회과학 부전공과 복수전공을 택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핵공학 박사학위를 소지한 영어과 버튼(E. J. Button) 교수의 물리학 특강 강좌를 개설하여 질의와 토론을 통한 학생들의 영어를 사용한 발표력을 향상시키고 일반 교양 실용영어를 수강하도록 하여 생활영어 실력을 갖추도록 하였다. 아울러 이론과 실제가 조화된 충분한 실험실습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이 물리학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학과창설당시 국제부흥 개발은행 차관으로 최인준 학과장(1984 - 1987)은 학부실험실습 기기 (일반물리, 전자물리 및 현대물리)를 교육 목적에 부합하도록 엄선 구입하여 일반물리 실험을 2학기간 20종목, 전자물리 실험 3학기간 30종목을 주 1종목 4인 1조로 동시에 실시하며 현대물리실험을 3학기에 걸쳐 18종목을 2주 1종목으로 순환방식으로 운영하여 1990년 한국일보사의 실험기자재 조사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실험 종목과 기기 선택 및 실습기간 배정은 학생들이 실험실습을 통하여 물리학 법칙의 체험적 이해와 전자기기 회로의 작동 원리 및 설계 개념을 숙지하도록 돕고 기기의 용도와 사용범위 및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도록 고려하였다. 1992년 학과자체 평가를 계기로 이보화(李甫和)와 권남익(權楠益)이 학과에 합류하여 전임교수 6명과 학과간 겸임교수 (E. J. Button) 1명으로 구성된 작은 학과의 교육목표, 교육과정, 학생, 교수, 시설·설비, 경영·재정 등 6개 분야의 자체평가 결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로부터 우수학과로 평가받았다.

질적 도약기
  학교발전과 학과목표인 응용물리학의 발전은 물론 학생들의 물리학 응용분야에 접할 기회를 넓히기 위해서는 물리학을 바탕으로 한 공학계열 학과의 신설이

필요하여 제 4대 학장(1990 - 1993)에 보임된 김민곤은 학내교수와 학생들의 합의를 모아 제어계측공학과(1992), 산업공학과와 전자공학과(1993)를 신설하였다. 한편 정보산업관 3851평(정보산업공대 건물)의 신축을 추진하여 제3대 용인캠퍼스 부총장(1994 - 1996) 재임중인 1994년 10월에 정보통신공학과의 신설과 함께 공학계열 학과들을 자연과학대학으로부터 분리시켜 정보산업 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신축된 정보산업관에 독립시켰다. 이에 따라 물리학 전공 학생들이 물리학 응용에 기초를 둔 공과계열 학과 수강과 부전공 및 복수전공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교수들의 응용분야에 공동연구 참여기회가 확대되었다. 학과가 설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학내 시설과 외곽 시설이 잘 갖추어져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야함을 인식하고 김민곤은 부총장 재임시 1650평의 후생복지관을 신축하였다. 또한 지하수에 의존하는 급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00톤의 상수도 공급선을 확보하였고, 교통문제 해결을 위해 좌석버스 차고를 캠퍼스에 마련하여 노선버스를 확보하였고, 하남 - 용인 4차선도로를 학교 앞을 통과하도록 경기도의 도로계획 변경을 협조받아 개통되었으며, 분당 - 학교간 4차선도로 신설을 경기도에 요청하여 교량과 일부 구간이 개통되고, 현재 공사중이다. 진행중인 도로공사가 완공되고 전철이 개통되면 학생들의 통학과 교직원의 출퇴근이 보다 향상되어 만족스러운 면학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학부제 도입과 물리학과의 위기
  교육부의 학부제 실시 시책에 따라 1995년 10월 물리, 수학, 화학, 미생물, 환경 및 통계 전공을 포함한 자연과학대학 단일 학부제를 실시하고 기존 학과의 입학 정원의 110%를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전공별 학생수용을 제한하였으나, 학생들의 편중 지원 성향 때문에 학사 운영에 큰 난관이 초래되었다. 1996년 10월에 소학부제로 전환하여 물리·화학부로 재편하였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여 물리학과 교과과정을 전자물리학 분야로 개편 1999년 10월 학과 명칭을 전자물리학과로 개정함에 따라 화학·전자물리 학부로 변경하여 재도약을 추진하고 있다. 2002년 현재 학부 졸업생 523명, 석사 51명, 박사 6명, 교외 동문 석사 40명, 동문 박사 10명으로 학과 설립 후 많은 전문인력을 양성하였다. 학부제로 인해서 입학한 학생들이 물리학 이외의 쉽다고 생각하는 학과로 편중 지원하는 경향과 취업의 어려움 때문에 기초과학을 기피하는 현상을 두고 보기만 한다면 우리나라의 학문과 산업의 장래가 심히 어둡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비전
  최인준 학장(2001. 3)과 이보화 학과장(2001. 3) 이 대학과 학과발전에 심혈을 기울여 교수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과과정의 개선과 기기 및 시설 개선에 주력하며 강의실을 첨단강의실로 전환해 가고 있다. 비교적 잘 갖추어진 여건과 주변환경을 토대로 면학분위기를 향상시키고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여 학과 목표인 연구인력 교육과 급변하는 정보화 산업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로 양성시키도록 지속적인 연구과제 창출로 산학협동 체제를 구축해나가도록한다. 2002년 현재 대학원 연구지도 분야로는 음향학 분야에 김민곤, 유체물리 분야에 최인준, 플라스마 분야에 김광열, 초전도체 및 자성체 분야에 이보화, 분광분야에 권남익, 반도체 분야에 이석주(李晳周)의 연구활동이 활발하다. 한편 1994년 10월에 교육대학원 물리교육 석사과정이 신설되어 교수들의 물리교육 연구지도에도 열을 쏟고 있으며 4명의 석사를 배출하였다. 우수교수를 초빙하여 전자물리학과로서의 교육적 역할과 연구기능을 다할 것이다.

학회활동
  비록 규모가 작은 학과이지만 구성원 모두가 학술활동과 학회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학회발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학회를 통한 학과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 1998년에는 제3회 응용물리학 심포지엄을 유치하여 “극한 과학과 기술”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당시 교통이 불편하던 1995년 4월에 제70회 한국물리학회 정기총회와 연구논문 발표회를 유치하여 정보산업관에서 개최하였다. 김직현은 학회이사(1987. 5 - 1989. 4)로 봉사하였다. 김민곤은 부지런한 학술활동으로 1984년에 한국물리학회 논문상을 수상하였고, 응용물리분과 위원장(1992. 11 - 1994. 10), 학술지 편집간사로 6년간(1981. 5 - 1985. 4, 1987. 5 - 1989. 4) 또 편집위원장으로 2년간(1995. 5 - 1997. 4) 봉사하면서 국방과학연구소의 협조를 얻어 좥물리교육좦지 창간호를 1982년 12월에 발간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응용물리」와 「새물리」 및 JKPS에 게재논문 편수의 양적 팽창과 질적 향상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또한 4년간 재무간사(1989. 5 - 1993. 4)로 봉사하면서 절약과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학회사무국 직원들의 처우개선과 관련하여 호봉제 도입과 퇴직금 적립을 학회 당국에 건의하여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는 학회이사(1997. 5-1999. 2)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최인준은 1992년도 물리학과 평가위원으로, 또 3년 동안 학술지 편집위원(1993. 5 - 1996. 4)으로 봉사하였다. E. J. 버튼은 1990년부터 상임 학술 편집위원으로 봉사하면서 JKPS 게재 논문들의 철저한 영문교정으로 손색없는 국제 학술지로 위상을 높였으며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고 있다. 이보화는 「물리학과 첨단기술」의 편집위원(1999. 4 - 2002년 현재)으로 봉사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물리학과는 학교법인 동원 육영회가 1954년에 설립한 한국외국어대학이 1980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문리과대학에 창설 1988년 자연과학대학 소속으로 개편,1995년 자연과학 단일학부를 거쳐 1996년 물리화학부에 소속되었고 1999년 전자물리학과로 개편.1984년 석사과정,1987년 박사과정이 개설.

 

 

 

 

 

 

 

 

 

 

 

 

 

 

 

 

 

 

 

 

 

 

 

 

 

 

 

 

 

 

한국외대 물리학과 교수단체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권남익, 이보화, 이석주, 김민곤, 최인준(사진에서 김광열이 빠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