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20세기말의 세계경제 블록화 추세에 따라 21세기에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이 세계경제의 하나의 중심축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따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내의 이론물리학자들은 지역내 정치, 경제협력 강화에 부응하고 APEC을 중심으로 한 지역내 국가간의 기초과학기술 협력강화를 통해 이 지역의 취약한 기초과학을 서구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선진화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1989년부터 이른바 “태평양이론물리센터” 설립에 대하여 여러차례 논의하였다. 유럽국가연합의 유럽핵공동연구소(CERN)의 성공적인 운영 전례에 따라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이론물리연구소 설립의 당위성이 인정되어 지역내의 9개국에서 12명의 국제설립추진위원(한국측 위원: 조용민, 김재관)들이 선임되고 몇 나라에서는 이 센터의 설립 및 유치를 적극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센터의 설립이 가시화 되자 한국정부는 아시아 태평양지역내에 설립될 최초의 국제이론물리 연구소를 유치하여 이 지역의 과학기술 발전을 주도하고 우리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과학재단으로 하여금 가칭 “태평양이론물리센터” 유치, 건설 및 운영에 관한 조사연구를 1994년에 수행(연구책임자 정복근)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제설립추진위원회가 센터를 한국이 유치하도록 만장일치로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천을 정책적으로 받아들여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Asia Pacific Center for Theoretical Physics:APCTP)”의 설립 및 개소 기념학회가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1996년에 개최되었다. 설립 직후에 밀어닥친 국가적 금융위기와 국제연구소 운영경험 부족으로 몇 차례의 홍역을 치르며 이제 막 유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이하 센터, 또는 APCTP라 칭함)의 짧은 성장과정은 다음과 같다.

APCTP의 유치 및 설립

  1993년 2월에 열린 설악겨울학교에서 센터설립을 위한 국제추진실무위원 일부가 선임되고 일부 회원국의 실무위원 정원을 정한 후 해당 회원국에 그 선임을 의뢰하였다. 이 실무위원회가 발전하여 국제추진위원회가 되고 1994년 5월 서울에서 열린 센터설립 국제추진위원회 제1차회의에서 한국을 센터의 유치국으로 추천하기로 이의 없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 7월 호주에서 열린 아태물리학회연합회(AAPPS) 이사회가 센터를 한국에 유치하도록 하자는 베트남의 권유안을 채택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과학협력협회(ASCA) 제 13차 회의에서 센터의 한국유치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였다. 1995년 9월에는 UNESCO물리실행위원회(PAC)가 센터설립 지지를 천명하였고 1996년 2월에는 일본 고에너지연구소(KEK)에서 센터설립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재단법인으로 설립을 위한 창립준비이사회가 마침내 1996년 4월에 서울에서 열리고 초대 이사장 겸 소장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뉴욕주립대학의 양(C. N. Yang)을 초빙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해인 1996년 11월에 서울에서 열린 APEC 각료회의에서 김영삼대통령이 센터를 한국에 유치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또한 지원을 천명하였다. 나아가 회원국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호소하였다. 1996년 12월에 드디어 센터가 과학기술부와 제1차 사업협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연구소업무를 시작하였다. 다음해인 1997년 1월에 APCTP이사회가 결성되고 초대 이사장으로 양을 선임하였다. 센터가 하나의 공식적인 법인체로 태어난 것은 센터가 과학기술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 등록을 마친 1997년 4월이다. 그러나 센터 개소 및 설립 기념학회가 열렸던 1996년 6월이 통상 센터가 태어난 때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센터유치 설립기는 또한 센터의 기구와 조직이 나름대로 모양을 갖춘 시기이다. 센터의 창립당시 이사회는 이사장 양, 상임이사 김제완, 이사 아리마(A. Arima), 에사키(L. Esaki), 야마구치(Y. Yamaguchi), 리(Y. T. Lee), 조(G. Z. Zhou), 최덕인 한국물리학회장, 박진호 과학재단 사무총장, 선우중호, 윤덕용, 윤세영 SBS 회장, 조용민 센터 사무총장(이상 외국인 이사 6명, 내국인 이사 7명)으로 구성되고, 감사로 다카이시(M. Takaishi) 일본 국립고에너지연구소 사무총장과 정복근이 선임되었다.
  한편 창립당시 평의원회는 휴(N. V. Hieu), 첸(J. Chen), 치아(S. P. Chia), 후지카와(K. Fujikawa), 후쿠야마(H.Fukuyama), 지(M. L. Ge), 하오(B. L. Hao), 고바야시(M. Kobayashi), 리(S. C Lee), 맥켈러(B. H. J. McKellar), 사야카니트(V. Sa - yakanit), 쏭(T. T. Tsong), 양가(D. M. Yanga), 푸아(K. K. Phua), 이금휘, 정복근으로 이루어진 16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다. 후일 이구철이 세번째 한국측 평의원으로 선임되어 현재 평의원은 17명이다. 이들은 10개의 회원국인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호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및 필리핀을 각각 대표한다. 센터가 비정부국제민간기구이므로 각 정부를 대신하여 회비를 내는 회원기관(Member Entity)들이 이들 평의원을 임명한다. 회원기관은 한국의 한국과학재단(KOSEF),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KEN), 중국의 중국과학재단(NSFC), 대만의 대만학술원(Academia Sinica), 베트남의 국립과학기술센터(NCST), 호주의 호주연구원(ARC), 태국의 태국국립연구원(NRCT),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시아물리학회(MIP), 싱가포르의 세계과학출판사(World Scientific Co.) 및 필리핀의 필리핀국립연구원(NRCP) 들이다.
  창립당시 센터의 소장에 양, 사무총장에 조용민, 특별고문으로 고바야시와 김제완이 선임되었다. 특히 양이 이사장과 소장직을 겸하게 되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이사회가 특별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센터의 학술사업을 자문하는 학술위원회는 국내외의 저명한 물리학자 17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산하에는 국내외 우수한 물리학자들로 구성된 학술실무위원회가 있다. 창립당시부터 센터 설립을 지지한 한국물리학회에는 센터학술사업에 대한 한국물리학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조언하는 아태한국위원회가 있다.

APCTP의 여명기

  1996년 6월에 열린 APCTP 개소기념학회가 이 학회에 참석한 300여명의 국내외 일류 물리학자들의 찬사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자 바로 센터의 명성은 전세계로 퍼졌다. 이리하여 세계 여러 곳으로부터 센터방문을 희망하는 우수 연구원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7년 후반기에 밀어닥친 국가적 금융위기를 맞아 센터의 사업도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창립 전후 센터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무총장 조용민이 주근무지인 서울대학교로 복귀하게 되어 1999년 초 이삼개월 동안 당시 센터의 특별고문이며 아태한국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구철 사무총장 대행체제로 운영되자 과학기술부가 센터사업을 재검토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같은 해인 1999년 5월 하순에 열린 제4차 이사회에서 그해 5월 1일자로 임명된 제2대 사무총장 정복근의 제안으로 센터의 해외이전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 당시 북경대학교 총장인 센터의 평의원 첸(Chen)이 김대중대통령에게 센터사업 계속지원을 희망하는 서한을 보내기에 이르자 1999년 7월에 대통령실 조규항 교육수석이 센터사업의 계속지원을 천명하였다. 이로써 APCTP 사업은 국내외에 한국정부의 두 대통령이 지지 및 지원하는 사업으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내 물리학자들이 처음으로 운영해 보는 국제적 성격의 연구소에 대한 경험부족으로 정부로부터 지적받은 몇 가지의 문제점들이 이 시기에 노출되었다. 그 하나는 사업비가 과학기술부의 “국제화기반조성사업”의 “다자간협력기반조성사업” 명목의 연구비로 지원됨으로 연구비의 일반회계관행을 따라야 하는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점이다. 또 하나는 다자간협력사업이므로 회원국이 센터사업비 일부를 갹출하여야 한다. 그러나 센터사업에 대한 한국정부의 지원규모로 보아 진정한 지원의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이나 대만과 같은 회원국의 지원이 아직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국제연구소에 상근하는 소장이나 사무총장이 없다는 것이다. 센터의 유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예산규모로 보나 학술사업 규모로 보나 상근 소장이나 사무총장을 두는 것이 어려워 정부의 양해를 구하고 있으나 앞서 열거한 문제들과 함께 조속한 시일안에 해결해야할 현안이다.
  센터의 연구기반 조성을 이룩해야할 이 중요한 시기에 밀어닥친 국가적 금융위기와 센터운영 미숙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서도1999년 5월에 열린 제4차 이사회는 외국인 이사 한명을 증원하기로 정하고 호주의 맥켈러를 일곱번째 외국인 이사로 선임하였다. 이에 따라 내국인 이사도 한명 증원하고 안세희를 여덟번째 내국인 이사로 선임하였다. 이로써 이사의 수는 15명이 되었다. 당연직인 박진호 이사 후임으로 김정덕, 최덕인 후임으로 민석기, 사의를 표한 윤덕용 후임으로 사공일, 정복근 후임으로 김철구가 선임되었다. 더구나 고등과학원으로부터 임대하고 있던 협소한 센터의 연구공간을 확장하기 위하여 1999년 5월에 양 소장이 기증한 약 3만달러로 역삼동 소재 한국고등교육재단 건물 7층을 임대하고 같은 해 12월에 아태센터 강남분원을 개원하였다. 사임한 이구철특별고문 후임으로 박진호가 같은 해에 선임되고 2001년 말에는 조용민이 추가로 특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센터사업비가 소기의 목적대로 확보되지 아니하는 가운데서 맞이한 제5차 이사회가 우여곡절 끝에 2001년 3월에 열렸다. 중요한 안건의 하나가 이사장과 소장 겸임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사장과 소장을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의 아리마를 제 2대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어서 에사키 이사 후임으로 휴를, 소장임기를 마친 양을 새 이사로 선임하였다. 이사 사공일 후임에 박성용, 윤세영 후임에 홍석현, 선우중호 후임에 신현준이 선임되었다. 이로써 당연직 이사인 한국물리학회 회장 송희성을 포함하여 제 5차 이사회 이후의 새 이사회가 구성되었으나 같은 이사회에서 제 2대 소장을 끝내 선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정관에 따라 2001년 3월 하순부터 사무총장인 정복근이 소장대리직을 맡고 있다. 한편 일본 회원기관이 이즈음에 일본국립 고에너지연구소로부터 이화학연구소로 바뀌고 감사도 다카이시로부터 이화학연구소 국제협력부장인 노다(T. Noda)로 바뀌었다.
  제 5차 이사회에서 내린 또 하나의 중요한 결정은 센터의 본부를 포항공과대학으로 이전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센터는 2001년 8월에 고등과학원에서 철수하고 포항으로 이전하여 포항본부시설과 강남분원의 서울분소시설을 보유하게 되었고 조금이나마 연구공간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APCTP의 국제협력과 사업성과

  APCTP는 창립초기부터 국제 유수 연구소들과 국제협력 연구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협력각서를 교환하였다. 1996년 6월에 이탈리아의 ICTP와, 1998년 10월에 캐나다의 CRM과, 1999년 12월에 대만의 NCST와, 2001년 7월에 캐나다의 PIMS와 협력계약을 체결하였다. 2001년 1월에는 유네스코 자카르타본부와 유네스코지원학술사업을 체결하고 성공리에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ICTP와 PIMS와는 센터 설립후 매년 공동학술사업(Joint Activity)을 수행하고 있으며 회원국과는 회원국 학술대회(External Activity)지원 방식으로 협력하고 있다. 2002년 말 현재까지 13회의 공동학술사업과 27회의 학술대회를 수행하였다.

APCTP의 꿈

  학회창립 50주년을 끝맺음하고 있는데, 센터가 풀어야 할 여러 가지 현안이 있으나, 하나의 반가운 소식은 2002년 5월에 정부가 2003년부터는 APCTP 사업을 정부의 출연금으로 보조하는 “학술활동지원사업”으로 변경하여 한국과학재단을 통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연구비회계관행으로 야기된 문제는 해결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동일한 학술활동 지원사업의 수혜기관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나 한국과학문화재단 등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되어 센터로서는 센터의 탄생 다음으로 맞는 경사이다. 국회에서 확정된 센터의 2003년도 예산은 전년 대비 350% 증액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앞으로의 지원규모에 따라서는 센터가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물리학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국내외 물리학자들의 전폭적인 격려와 센터 연구원 및 임원들의 헌신적인 봉사로 아태이론물리센터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참고문헌]
[1] “태평양이론물리센터” 유치, 건설 및 운영에 관한 조사연구 (연구책임자:정복근).
[2] APCTP BULLETINS: 1st, 2nd, 3rd, 4th, 5th, 6th, 7 - 8th issues.
[3] 아태이론물리센터 이사회 회의록: 1, 2, 3, 4, 5차 회의록.






























1996년 APCTP 설립 및 개소기념학회 개최.





1996년 2월 일본고에너지연구소에서 발기인대회, 1996년 4월 창립준비이사회 서울 개최. 1997년 1월 APCTP 이사회가 결성되고 초대 이사장으로 양(C. N. Yang)이 선임된다. 1997년 4월 과학기술부 허가로 재단법인 설립하다.


























































































2001년 3월 제5차 이사회에서 APCTP본부를 포항공과대학으로 이전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