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부터 자석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자석의 지극성은 기원을 전후해서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의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에서는 자석을 사남(司南)이라고 불렀다. 이 사남은 육조시대에 와서 풍수가들이 택지나 묘자리의 방향을 잡는 데에 이용했다. 당시 풍수가들을 위해서 물에 자침을 띄우는 방법도 개발했는데, 이것이 지남어(指南魚)이다. 이 지남어는 11세기에 이르면 항해에도 사용되었다.
  지남어는 중국에 왔던 아랍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결국 유럽 선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11세기가 끝날 무렵 북송의 관료이며 천문대장격인 사천감(司天監)을 역임했던 심괄(沈括, 1031-1095)은 그의 저서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자침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편각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럽보다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15세기 초 명(明)왕조는 1405년부터 30년 동안 환관인 정화(鄭和, 1371-1435)로 하여금 모두 7차례에 걸쳐 대 항해를 하게 했는데 1차 원정은 62척의 배와 2만78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참파(지금의 베트남), 시암, 말라카, 자바, 캘리컷, 코친, 실론(지금의 스리랑카) 등, 인도와 페르시아만, 아라비아반도, 아프리카 동부해안에 이르는 대 항해였다. 이때 사용했던 항해도에는 자석을 사용하여 배의 항로를 표시해 놓고 있다.
  지남침(指南針)은 조선 초에 이르면 풍수가들의 전용물에서 벗어나서 해시계와 같은 관측기구로 쓰였고, 나침반으로서 항해자와 여행자에게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의보감에 자침의 편각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 이미 학자들은 나침반에 관한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