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물리」 창간 전의 국내 핵물리학 (1945-1961)

  원자핵물리학분과회는 물리교육분과회(1966), 입자물리학분과회(1967), 고체물리학분과회(1968)에 이어 1972년에 네번째로 생긴 분과회로서 비교적 한국물리학회 초창기에 생긴 분과회이다. 또한, 분과회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국내 핵물리학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학술활동이 있었다. 따라서, 분과회 창립 이전의 국내 핵물리학계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방 당시 국내에는 물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2명(최규남, 박철재), 그리고 4년제 대학을 졸업하여 이학사(理學士)를 받은 사람이 8명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생소한 학문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일본이 핵폭탄을 맞고 항복한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핵물리에 관한 일부 그릇된 선입관을 갖게 하기는 하였으나 핵물리학이라는 명칭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유가와(H. Yukawa)가 메존(meson) 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고, 당시 핵물리학이 물리학의 첨단 분야로 떠오르면서 국내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핵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중 많은 사람들은 후에 다른 분야로 전공을 바꾸었고, 나중까지 핵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 당시에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이학사를 받은 첫번째 사람은 윤세원과 이기억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은 모두 1947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 당시에 물리학 이학사를 받고 후에 핵물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948년에 김희규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였고, 1950년에는 김현창, 이동녕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이철주가 연세대학교 물리기상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에는 김정흠이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안세희가 연세대학교 물리기상학과를 졸업하였다. 이들이 1972년에 원자핵물리학분과회를 창립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1955년에 이기억이 물리학 전 분야에서는 네번째로, 핵물리학계에서는 첫번째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것이다. 이기억은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에 유학을 가서 핵물리이론을 연구하여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Physical Review에 핵물리 논문을 발표하였다(Alex E. S. Green and Kiuck Lee, Phys. Rev. Vol. 99, 772 (1955), “Energy Eigenvalues for a Spherical Well with an Exponentially Diffuse Boundary”). 이 논문의 각주를 보면, 이기억이 서울대학교에서 재직 중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그후, 이기억은 아르곤국립연구소를 거쳐 위스콘신주 밀워키시에 위치한 마켓트대학(Marquette University)에 교수로 자리잡으며 두편의 논문을 Phys. Rev.에 실었다(Phys. Rev. Vol. 104, 1625 (1956); Vol. 108, 774 (1957)). 그러다 보니,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국내 학자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다. 여기에서 잠시 일찍이 해외 유학을 떠나 외국에 정착한 학자들을 살펴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이들은 대개 한국물리학회 회원은 아니지만 분과 학술활동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기억 외에도 유학을 한 후 외국에 정착하여 주로 외국에서 활동을 한 학자로는 김영일(퍼듀대학), 김호길(Berkeley National Lab, 포항공대 초대 총장), 노만규(CEA Saclay, KIAS), 신용무(University of Saskatchewan, TRIUMF), 오세웅(University of Manitoba, 포항가속기연구소 초대 소장), 이동녕(Naval Research Lab, 포항가속기연구소 2대 소장), 이상무(University of Tsukuba) 등을 들 수 있다. 김영일은 1959년에 링컨 메모리알대학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1963년에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벨연구소와 오크리지국립연구소를 거쳐 퍼듀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을 자주 방문하기도 하였다. 노만규는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중 도미하여 1960년에 클라크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1964년에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년부터 CEA 사클레(Saclay)에 재직하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을 자주 방문하여 한국의 대학원 학생 및 젊은 연구원들과의 교류를 많이 갖고 공동연구 및 논문지도를 하였다. 신용무는 1957년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1963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캠퍼스를 거쳐 캐나다의 서스캐처원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서스캐처원 가속기연구소, TRIUMF, 일본 KEK 등에서 실험을 하였고, 한국도 자주 방문하였다. 특히, 1992 - 1993년에는 포항가속기 건설에도 참여하였다. 그외 포항가속기 건설을 위해 외국에서 귀국한 사람으로 오세웅, 김호길, 그리고 이동녕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시 1950년대로 돌아가서, 1952년 12월 7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한국물리학회 창립총회(회장: 최규남, 부회장: 박철재)가 개최되었을 때, 상임임원 9인(김영록, 김종철, 김창영, 윤세원, 윤일병, 이기억, 정연태, 조순탁, 지창열) 중 2인이 핵물리학 전공이었다. 「새물리」가 창간된 1961년부터 원자핵물리학분과회가 창립된 1972년 4월까지 약 10년간 정식 분과회가 없이 이루어진 핵물리학계의 활동을
「새물리」에 남아 있는 기록의 일부를 통해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 「새물리」는 일종의 소식지 역할도 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는 자세한 사항은 「새물리」를 통해 볼 수 있음을 밝혀 둔다.

「새물리」 창간 후부터 분과회 창립 전까지의 핵물리학계 (1961-1972)

  1960년대에는 국내에서 핵물리학 연구라고 일컬을 수 있는 활동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연구를 위한 시도는 있었다. 당시는 해방 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모든 면에서 어려운 시기였고, 교육 및 연구를 위한 제반 여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었다. 또한, 연구인력의 연구경험 부족으로 의욕에 비하여 성과가 미약하였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연구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핵물리학을 전공하겠다고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작으나마 가속기를 직접 만들어보고자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 국내에서 가속기를 제작해보고자 노력하였던 이들이 후에 가속기 물리학자로서 포항가속기를 건설하는 데 주역으로 참여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새물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으로부터 다소 엿볼 수 있다. 그 일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기관별 당시 상황
  경희대학교에 이영재가 1960. 9 - 1962. 2월 기간 중 그리고 1971. 8 - 1990. 8월에 근무하면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High energy proton-proton interaction에 의한 π-메존 production (photographic emulsion 방법 이용) 등의 핵 계측 분야 연구를 하였다.
  고려대학교의 핵물리연구실은 1950년에 김정흠이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정흠은 당시 대부분의 대학교수가 그러했듯이 1957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61년에 로체스터대학에서 jj - 결합 핵껍질 모형을 이용한 핵구조의 이론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부임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노봉환(魯鳳煥)이 원자로 물리학과 플라스마물리학을 공부하고 부임하였다. 얼마 후인 1968년에는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1963년에 핵건판을 이용한 실험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오가 부임하여 핵실험 연구실을 만들어 이후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동국대학교의 핵물리연구실은 1955년에 김현창이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현창도 1958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핵물리 실험으로 1963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다시 동국대에 부임하였다가 1966년에 성균관대로 옮기면서 성균관대에 핵물리 실험 연구실을 만들었다.
  서울대학교의 이동녕과 이주천 등은 사이클로트론실을 만들어 사이클로트론의 성능 증진을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고, 1962년에는 일본 도호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성백능이 부임하였다. 1963년 9월에는 권녕대, 지창열, 조순탁, 이동녕 등이 문교부로부터 “사이클로트론 가속장치의 개량연구”를 위하여 학술연구조성비를 지급받았다. (이와 같은 연구비 제도는 초대 물리학회 회장이었던 최규남이 문교부장관이 되고, 초대 부회장이던 박철재 역시 문교부 고위 관료가 되면서 당시 학자들이 받을 수 있었던 혜택이라고 볼 수 있다.) 1965년 4월에는 미국 네브래스카대학에서 핵력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윤석이 부임하였다.
  성균관대학교에는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김현창이 1966년에 부임하면서 핵물리 실험 연구실을 만들었다. 김현창은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감마선 계측 및 계측기 개발 실험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연세대학교의 안세희는 1959년에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연세대학교에서 핵 에멀션을 이용하여 14 MeV 중성자의 니켈 핵에 대한 핵반응을 측정함으로써 국내에서 최초로 Physical Review에 한국(연세대) 주소로 논문을 발표하였다. (L. D. Singletary, E. N. Strait, and S. H. Ahn, Physical Review, Vol. 132, 378 (1963), “Study of the Ni(n,p)Co Reaction”) 그후, 베타선원이나 검출기 중 하나를 자기장 밖에 놓고 편향시키면서 상하와 수평의 두 방향으로 집속시킬 수 있는 특징을 갖는 이중 집속 베타선 스펙트로메타를 설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53년에 연세대에 부임한 이철주는 국내 최초로 1961년에 콕크로프트-월턴(Cockroft-Walton) 가속기를 직접 제작하였고, 1963년 9월에 문교부로부터 “콕크로프트-월턴 가속기의 제작”에 대한 학술연구조성비를 지급받았다. 한편, 안세희 주도하에 1965년에 한국물리학회와 연세대학교 공동주최로 “원자핵물리학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전국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참석하였고, 그 당시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교수들이 최근의 이론과 실험에 대하여 특강을 하였다.
  1966년에는 신제에 의해 홍성렬이 “콕크로프트-월턴 가속기의 종합특성”에 관한 연구로 국내에서 첫번째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연세대를 1955년에 졸업하고 1958년에 부임한 정원모는 안세희의 지도로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핵물리실험 분야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96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신승애가 부임하면서 핵물리교실을 만들었다. 신승애는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써 국내 최초로 핵물리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학자가 되었다. 부임 초기에 M4005 Series의 핵건판주사(Nuclear Emulsion scanning)용 현미경을 구입하여 28GeV 양성자(BNL의 AGS beam)가 핵건판 핵에 부딪혀서 일으키는 핵반응을 연구하였다.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오희필은 1963년 9월 문교부로부터 “대전지구의 자연낙하물과 대기중 방사능 측정 및 방사선 방어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학술연구조성비를 지급 받았다. 충남대에서의 방사선 연구는 후에 전재식이 원자력연구소나 표준연구원과 협력 연구를 수행하며 지각 방사선과 자연환경 방사선 연구를 수행하며 지속된다.
  이 시기의 국내 연구활동에 있어서 원자력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 전세계가 핵폭탄의 위력에 놀랐던 때로서 일찍이 원자력연구소의 필요성이 논의되어 연구소 활동이 있던 중, 이승만 대통령 시기인 1959년 3월에 원자력연구소가 정식으로 개소식을 갖는다. 한국물리학회 초대 부회장을 지내고 최규남 초대 회장의 뒤를 이어 물리학회 회장을 역임한 박철재가 초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원자력 연구소 초기에는 가속기 그룹(이동녕, 김호길, 김헌준, 권숙일: 핵반응과 가속기 제작 연구), 핵기계류 그룹(Nuclear Instrumentation Group) (정문규, 박종춘: 중성자와 감마선 검출방법 연구), 중성자분광계 그룹(Neutron spectrometer Group) (윤세원, 최창선, 오세웅: neutron spectrometer를 이용한 물성 연구), 에멀션 그룹(Emulsion group) (이영재, 박원구: 원자로내의 빠른 중성자 스펙트럼 측정) 등이 있었고, 각 그룹마다 고유의 연구 과제를 설정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원자력 연구소에서 가속기 제작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김호길, 오세웅, 이동녕)이 후에 포항 가속기 건설을 주도함을 볼 수 있다.
  한편, 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박정덕, 김웅, 한효흠 등이 섬광검출기(Scintillation detector), 1000-Scaler, 4 π계수기, 단일채널 감마선분광계, 중성자검출기, 유동계수기(flow counter), 서베이미터(survey meter), 비례계수기 등을 보유하고 방사선동위원소연구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1950년대에 국내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었다가 외국 유학을 통해 당시 최근 이론과 실험을 익히고 1960년대에 귀국한 교수들을 통하여 국내 젊은 물리학도들이 새로운 학문 분야에 눈을 뜨게 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귀국한 신진 연구 인력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세미나, 학회 발표 등의 연구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제반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외국에서 익힌 연구가 국내에서 지속되지 못하였다. 대신, 이들은 교육을 통하여 다음 세대를 키우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한편, 많지는 않았지만, 이들에 의하여 국내에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 지도가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연구의 소강기적인 상황은 1960년대 초에 이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유학을 나갔다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귀국하는 새로운 연구 인력들이 국내 핵물리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2) 핵물리학계 초기에 발표된 논문 및 학술발표

  해외 학술지에 발표된 초기 핵물리 논문 :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한국인 핵물리 학자들에 의하여 해외 학술지에 발표된 핵물리학 논문을 일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논문의 양이 증가하기 시작하므로,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지 않음.)
·Alex E. S. Green and Kiuck Lee(이기억), Phys. Rev. 99, 772 (1955), “Energy Eigenvalues for a Spherical Well with an Exponentially Diffuse Boundary”.
·Se Hee Ahn(안세희) and J. H. Roberts, Phys. Rev. 108, 110 (1957), “Energy and Angular Distributions of Neutrons from the Interaction of 14.1-MeV Neutrons with Zirconium”.
·Baik Nung Sung(성백능), J. Phys. Soc. Japan 17, 1811 (1962), “The energy spectrum of photoprotons from Ne20”.
·D. J. Horen, J. M. Hollander, and Y. E. Kim(김영일), Nuclear Physics 31, 447 (1962), “Isomeric State in Y86”.
·Y. E. Kim(김영일), Phys. Rev. 131, 1712 (1963), “Low-Energy States in Y90”.
·N. T. Porile, A. M. Poskanzer, and M. Rho(노만규), Phys. Rev. 128, 242 (1962), “Recoil Studies of Reactions of Indium with Medium Energy Protons and Alpha Particles”.
·Yoon Suk Koh(고윤석) and Paul Goldhammer, Nucl. Phys. 53, 287 (1964), “Variational treatment of hard-core interactions”.
·H. C. Kim(김현창), R. F. Seiler, D. F. Herring and K. W. Jones, Nucl. Phys. 57, 526 (1964), “Cross sections for the O16(d,p0)O17, O16(d,p1)O17, and O16(d,α)N14 reactions from 0.8 to 1.7 MeV ”.
·Il-Tong Cheon(전일동), N. Kawamura and T. Takemiya, Prog. Theor. Phys. 30, 136 (1964), “Quasi-free proton-proton scattering from Ca40 at 180 MeV ”.
·C. H. Kim(김정흠), S. P. Pandya, and S. S. M. Wong, Nucl. Phys A99, 161 (1967), “Neutron-proton interactions in odd nuclei.”
「새물리」에 발표된 최초 핵물리 논문 : 「새물리」제1권 1호에 안세희가 해설 논문으로서 “원자핵반응”을 게재하였다.
국내 학회에서 발표된 초기 연구논문 : 1960년대에 국내 학회에서 어떤 논문 발표가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도록 당시에 발표된 논문 중 일부만 여기에 나열한다.
·1959. 6. 27-28일에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물리학회 제4차 정기총회 및 연구발표회에서 김근희(金根熙) “83 keV의 Deutron에 의한 Be9(d,p)Be10 작용의 각분포와 cross section에 관하여”, 강익주(康翼周) “전자장에 있어서 중간자의 상호작용에 관하여”, 박정덕 “서울 지구에 강하한 자연 낙하물의 방사능에 대하여”, 정성채(鄭成采) “7.5 BeV의 proton-nucleon interaction에 있어서 중간자 다중발생에 관하여” 등의 발표가 있었다.
·제1회 소립자핵 토론회가 1961년에 개최되었고, 여기서 이종원(李鍾遠, 원자력연구소) “핵자의 전자기구조에 대하여”, 안세희(연세대학교) “원자핵반응모형에 대하여”, 박동수(朴東秀, 경북대학교) “Nuclear spectroscopy에 대하여”, 오국주(吳國柱, 전남대학교) “핵력에 대하여” 등의 발표가 있었다. 이 학회에서 “이 모임을 ‘소립자원자핵분과회’라고 부른다(학회의 승인을 얻도록 할 것)”이라는 결의를 했던 것을 보면, 분과회를 만들자는 논의가 이미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5년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명실상부 심포지엄이라고 부를 만한 핵물리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1965년 7월 12-17일에 연세대의 안세희가 주도하고 아시아재단과 연세대학교의 후원을 받아 한국물리학회와 연세대학교의 공동주최로 “원자핵물리학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전국의 교수 및 학생 74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핵구조, 핵반응, 소립자, 원자핵실험의 네가지 주제에 대하여 강의가 있었다. 강사로는, 핵구조에 대하여는 고윤석, 김정흠, 핵반응에 대하여는 성백능, 김현창, 소립자에 대하여는 김영덕, 박봉열, 원자핵실험에 대하여는 안세희였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초청강연

  핵물리학에 대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호프스태터와 베테를 일찌기 1967년과 1969년에 초청하여 전문 세미나와 일반인을 위한 대중 강연을 개최하였던 것은 당시 핵물리학을 전공하던 교수 및 젊은 물리학도들에게 많은 자극과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기회가 되어 핵물리학계의 큰 소득이었다. 한편, 초우라늄원소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시보그(Seaborg)가 1970년에 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하였다.
·1967. 9. 17 - 22일에 로버트 호프스태터(Standford University, 1961 Nobel Prize)가 핵 및 핵자구조에 관하여, 세미나와 일반강연을 하였다.
·1969. 10. 19 - 25일에 한스 베테(Cornell University, 1967 Nobel Prize)가 항성의 에너지 생성과정, 원자핵·핵물질론에 관하여 세미나와 일반강연을 하였다.
·1970. 3. 26일에 글렌 시보그(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51 Nobel Prize)가 미국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방문하였다.






원자핵물리학분과회는 1972년 학회 네번째 분과회로 결성.



















이기억은 한국인 핵물리학계 첫번째 박사학위를 1955년 플로리다 주립대 학교에서 취득.

 

 

 

 

 

 

 

 

 

 

 

 

 

 

 

 

 

 

 

 

 

 

 

 

 

 

 

 

 

 

 

 

 

 

 

 

 

 

 

 


안세희는 1963년 국내최초 한국주소로 Physical Review에 논문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