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물리학회가 창설된 이래로 학회 내에 각종 분과회를 두자는 의견은 이미 초기부터 거론이 되어왔다. 원자핵물리학분과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구체적으로 분과 결성을 1963년 한국물리학회 추계총회(대구에서 개최)시 박봉열, 조병하 등이 제안한 바 있으나 시기상조라는 판단하에 보류되었다.
  1967년 4월 총회에서 입자물리학분과회가 창립될 당시, 원자핵물리학분과회 또는 핵 및입자물리학분과회를 창설하자는 안이 거론되었었다. 그러나 당시 원자핵물리학을 전공하는 회원 중 박사학위 소지자는 6명에 불과하여 아직 원자핵물리학분과회의 결성은 시기상조라고 판단되어 가까운 장래로 미루기로 하고 각자 개인자격으로 입자물리학분과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원자핵물리학분과회 결성을 위한 움직임은 그후에도 산발적으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논의되었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1971년 여름경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김정흠, 김현창, 박봉열, 성백능, 안세희, 이종완, 이철주 간에 논의하였다. 원자핵물리학 및 입자물리학을 전공하는 여러 회원들의 의견을 들어 1971년 10월 1일경 김정흠이 원자핵물리학분과회 내규 초안을 작성하고, 여러 회원의 의견을 물어 수차의 수정을 가하였고, 1971년 10월 11일경 김정흠과 안세희가 모여 초안을 검토 수정하였다.
  1972년 4월 3일 김정흠, 김현창이 상의하여 4월 7일 학회사무실에서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정하고, 회원들에게 전화 연락하였다. 전화 연락된 회원들은 고윤석, 김정흠, 김현창, 남천우, 문국진, 박봉열, 박혜일, 성백능, 안세희, 이종완, 이철주, 정문규 등이다. 내규 초안을 김정흠이 다시 가필 수정하여 1972년 4월 7일의 준비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날의 모임에는 고윤석, 김정흠, 김현창, 남천우, 문국진, 박봉열, 안세희, 이종완, 이철주가 참가하였고, 토의된 사항은 (1) 원자핵물리학분과회 내규초안의 작성 (2) 분과회비를 받는 대신 분과회의 운영을 활발히 하여 분과회원으로부터 받은 분과회비 이상의 혜택이 돌아가도록 분과회를 운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3) 분과회 비는 대략 한국물리학회 회비의 25-50%



정도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4) 이사회 또는 평의회에 각 분과회가 회비를 받도록 통일적인 움직임을 하도록 입법할 것을 결의하기로 하였다.
  1972년 4월 23일 김정흠, 라병욱, 노판우, 오희필이 대전에 모여 원자핵물리학분과회 결성에 대한 지방의 의견을 말하고 “한국물리학회 원자핵물리학분과회 규정”의 최종안을 마련하였다. 위의 네 사람은 각기 토의된 규정 내용을 소속 지역 회원(핵물리학분과회 회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회원)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1972년 가입원서 제출자는 16명, 가입 약속자는 7명이었다. (분과회 결성에 필요한 인원수는 20명 이상이었다.)
  분과회창립 준비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영호, 고윤석, 김정흠, 김현창, 라병욱, 남천우, 노판우, 문국진, 박동수, 박혜일, 성백능, 안세희, 오희필, 이종완, 이철주, 정문규, 박봉열(observer), (추가) 김기용, 구상회, 정규능, 최철규.


   

 

 

 

 

 

 

 

 

 

 

 

 

 

 

 

 









1972년 4월23일 원자핵 물리학분과회가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