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리과대학 시절의 초창기(1953 - 1963)
  고려대학교는 1905년 보성전문학교로 설립된 후 해방후인 1946년에 비로소 종합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으나 초창기에는 인문 사회계만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보성전문 시절부터 인촌 김성수선생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농업의 근대화에 역점을 두는 정책과 더불어 자연과학계 학과 설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52년 12월 드디어 문교부로부터 자연계열의 인가 승인을 받게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육이오전쟁의 피난지인 대구시 원대동 임시 교사에서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이 문리과대학으로 확장 개편되면서 물리학과는 화학과, 생물학과와 더불어 1953년 3월말 40명의 정원으로 신입생을 모집한 수물학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때 최종락(崔宗洛,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겸임, 물리교육)과 김정흠(金貞欽, 이론 원자핵물리학)이 부임하여 피난시절의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물리학 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대구에 있을 당시에는 김정흠만이 전임이었다.
  전쟁중이라 이 당시의 교육상황은 매우 열악하였다. 전체적으로 이때는 여러가지로 물자구입이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일반물리 실험기기 등도 스스로 제작해 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 당시 실험기구로는 보르다진자, 비틀림저울, 영률측정기구 등이 있었다. 한편 화학천칭 저울도 구입하여 이를 경북대에서도 같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후 휴전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2년 동안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1953년 8월에 서울캠퍼스로 돌아왔다. 전란통에 수많은 학교 건물들이 불타거나 파괴되었지만 당시 석조건물이었던 고려대학교 건물들은 원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당시 미 제 5공군 통신대가 주둔하며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중앙고등학교 강당과 본관의 일부를 강의실로 임시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북대학교 교수로서 겸임교수였던 최종락이 사임했고, 서울대 교수 권녕대(광학실험 전공)가 한 학기 동안 겸임교수로 부임해와 환도 직후의 어려운 교육환경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1954년 2월에는 문리과대학을 문학부와 이학부로 확장개편하여 고려대학교 서관 동쪽 건물로 이전하면서 수물학과가 수학과와 물리학과로 분리되어 각각 40명의 신입생을 별도로 모집하면서 2002년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동년 3월 권녕대의 사임에 따른 후임으로 김상돈(金相敦)과 방사 핵물리학 실험전공의 한준택이 4월 초에 부임하였다. 1956년에는 도쿄이과대학 물리학부에서 도모나가의 지도를 받던 응용물리 실험 전공의 노봉환(魯鳳煥)이 부임하여 교수진이 4명으로 늘어나 본격적인 학과 활동이 시작되었다. 김상돈은 1955년에 미국 뉴욕시 소재 브루클린 폴리테크연구소(Polytechnic Institute of Brooklyn)에서 13개월 동안 X선결정학을 연구하고 귀국한 후에 물리학과에 X선장치를 도입 “X선회절에 의한 Hydrazinium Phosphate의 결정에 관한 연구”로 1963년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제1호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한국물리학회 제3회 총회를 개최하였으나 국내의 대부분 물리학자들이 출국하여 제대로 총회를 열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였다.
  대운동장에서는 체육대회, 입학식, 졸업식 등 큰 행사를 시행하였으나, 필수장비인 마이크, 앰프 등이 고장이 나면 고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앰프 관리자인 수위겸 용원은 물리학과로 수리를 의뢰하곤 하였다. 그때마다 1회 물리학과 재학생인 김용국(음향기기연구소장)이 기꺼이 고쳐주었고 실험실에서 콘덴서, 저항을 이용하여 송수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실험무선국의 시초였다. 이어서 1955학번 정재선(새한전자 회장)이 주축이 되어 노봉환의 지원하에 1960년 전파관리국으로부터 실험무선국 허가를 받아낸 것이 콜사인 HL2AI인 것이다. 송수신 장비(transceiver)를 제작한 주역은 1957학번 이극순(한국 ITS 회장), 김기헌(동암산업 대표), 심승우(동암기전 사장), 1958학번 조희민(성신여중 교장)으로서 학과수업 후 틈틈이 청계천 전자부품상점을 뒤져서 14 MHz 크리스탈 발진기, 고출력 진공관 등을 구입하여 송신기를 만들었다.
  1957년 김정흠은 미국 로체스터대학으로 유학하여 원자핵물리학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후 1961년 귀국하여 물리학과 학부 및 대학원생들에게 PSSC물리실험 등 다양한 미국식 교육을 도입하여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김정흠은 원자핵 j - j 결합 껍질모형을 써서 질량수 A가 20≤A≤120인 원자핵에 작용하는 유효 n - p 상호작용의 성질을 연구한 것이다. 특히 1960년초 원자핵의 기저배위에 속하는 low - lying level에 대한 실험이 어려워 바닥상태의 스핀과 홀짝성(parity)만이 알려져 있을 당시 이를 바탕으로 하여 기기핵(odd - odd nucleus)의 바닥상태부근에 있는 들뜸상태에 대한 준위구조를 밝히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노봉환은 1959년 1월 IAEA의 지원으로 프랑스 사클레(Saclay)에 있는 원자력연구소(CEA)의 방문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이봉(J. Yvon)과 함께 원자로 설계이론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후 1959 - 1961년도에는 오르세에 있는 파리제11대학 플라스마연구소에서 파리사범 이공과대학(Ecole Normal Polytechnique) 그룹과 함께 태양흑점 폭발원인 규명과 플라스마 상태유지를 위한 토카막 준비단계의 연구를 수행한 후 귀국하였다.
  드디어 1957년에는 제1회 졸업생 5명(이학사)을 배출하면서 본궤도에 오른 물리학과는 이 해에 대학원에 물리학과를 신설하여 9명의 대학원 신입생을 모집하였고, 1959년에는 이학석사 3명, 1963년에는 이학박사 1명 등을 배출하면서 대학원 교육에 의한 고급 인력양성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국내 대학의 시설이나 전임교수의 인원수 등이 선진국에 비해 매우 빈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졸업생들에게 가능하면 해외유학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던 시기였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1회 졸업생으로 뉴욕 시립대학 고체물리학 교수로 재직 중 작고한 이숙과 2회 졸업생으로 브라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30여 년간 줄곧 벨연구소(Bell Lab)에서 연구생활을 보낸 김용무 및 미국해군연구소(Naval Research Lab)에서 연구한 김철호, 박만장 등이 있다. 당시 물리학과는 새로 건축될 교양관 건물로의 이전을 전제로 2002년 학생회관 앞의 광장에 임시로 지은 3채의 가건물로 교사를 옮겼다가 1960년 교양관 건물의 준공과 더불어 비로소 실험실을 갖춘 새 교사로 옮겨갈 수 있었다.
  한국물리학회발족 당시부터 주도적인 참여를 한 김정흠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학회의 비약적 발전에 적극적으로 힘을 기울여 총무간사로서 기구 및 제도를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을 국내로 초빙하여 초청강연을 준비, 개최하는 등 한국물리학회 회원들의 학술활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아울러 일반대중을 위한 기초과학 및 물리학의 중요성에 대한 계몽 강연 등도 꾸준히 개최하였다. 더욱이 편집간사 재임 중에는 「새물리」의 교정, 편집, 제작 등의 힘들고 궂은 일들을 거의 혼자서 도맡아 헌신적으로 수행해 왔다.

이공대학 이학부 시절(1963 - 1977)
  1963년 12월에는 새로이 공학부가 신설되어 문리과대학이 문과대학과 이공대학으로 확대 개편될 때, 물리학과는 이공대학 내의 이학부에 소속되었고, 초대 이학부장에는 김상돈이 취임하였다. 김정흠은 1967년에 한국물리학회 편집위원장으로서 일찍이 학술지의 국제화를 강조하며 영문 학술지인 JKPS를 창간함으로써 지금은 국제학술지로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JKPS가 인용문색인(Science Citation Index)에 포함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점 등은 시대를 앞서가는 세계화 시대의 선도자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다. 그후 1968년부터 2년 동안 미국 페어리 디킨스(Fairleigh Dickinson) 대학 물리학과 초빙교수로 연구년을 보내고 있을 당시에는 한국물리학회 미주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마침내 1970년 4월 워싱턴 D.C.에서 한국물리학회 미주지부가 탄생되었다.
  1967년 3월 교육대학원 신설에 따라 물리교육전공 석사과정을 신설하여 현직 중·고교 교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교육대학원생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 3월 시카고대학에서 핵건판을 이용하여 우주선물리학 실험을 통해 이학박사학위 취득 후 루이지애나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하던 김종오(金鍾五)가 부임하면서 4명의 교수진(한준택은 원자력연구소로 부임하면서 1957년에 사임)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창설 초기부터 학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김상돈(당시 이학부장)이 현 애기능 캠퍼스로 이전을 준비하던 1968년 6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작고하여 크나큰 손실을 겪기도 하였다. 그해 7월에 현재의 안암동 로터리에 위치한 애기능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다.
  김종오는 횡위운동량 Pt가 중심계각 5° 이내와 175°이상에서는 작아진다는 소위 오늘날 말하는 갈매기 효과(Seagull effect)를 최초로 주장하였다. 이 논문에 이어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조교수 시절인 1967년 Physical Review 158, 1261(1967)에 발표한 신속도(rapidity)와 유사신속도(pseudorapidity)에 관한 논문은, “신속도”라는 학술용어를 창출해내고 이의 중요성은 1969년 Physical Review지에 낸 파인먼(R. Feynman)의 논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1971년 제12회 3·1 문화상 (학술상 부문)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편 1969년도에는 대일청구권자금 지원에 의한 고가 정밀실험장비가 도입되었다. 이때 도입된 대표적 장비로는 결정구조 연구를 위한 X선회절분광분석장치, 진공증착장치 및 박막두께측정을 위한 타원계 등이었다. 1969년에 보스턴대학에서 통계물리학 중 난류현상의 특성에 관한 통계물리 이론연구를 전공한 강우형(姜雨熒)이 새로 부임하였다.
  1970년에는 김정흠이 이학부장으로 취임하여 미국식 선진기법에 의한 학교행정개혁안 및 평가방법을 통한 종합적인 대학 발전방안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71년 11월 이공대학 동관이 신축되면서 실험실 등 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1971년 브라운대학에서 핵자기공명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캐나다 맥매스터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던 고체물리 실험전공의 조성호(趙成浩), 1972년 역시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브레이(Bray)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렌슬러공과대학에서 연구원생활을 하던 고체물리 실험전공의 박만장(朴萬藏) 등이 부임하면서 물리학과는 당시 국내대학 중 전원 박사학위를 소지한 우수한 교수진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일)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현대적인 물리학 교육의 기틀을 마련할 기회를 갖게 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대학원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초 무렵을 물리학과의 제1의 도약시기로 볼 수 있다. 1973년 3월에는 실험대학으로 지정되어 이학계열별 모집을 하게 되었다.
  조성호는 핵자기공명(NMR) 연구를 위하여 겨우떨개(marginal oscillator)를 진공관식으로 꾸며서 상자성 단결정 내에 결정수로 들어있는 수소원자핵에 대한 공명을 측정하였다. 이때에 필요하였던 전자석은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정원 연구실의 Varian제품을 빌려서 사용하였다. 1974년 이공대학 최한석 학장이 신임교수에게 씨앗연구비를 지원해 주어 1972년에 부임한 박만장과 함께 소형 전자석(자극지름 4인치 Cenco 제품)과 고정잠금 증폭기(Lock - in amplifier, PAR 제품)를 공동으로 구입하여 핵자기공명 실험을 학교 실험실에서 가능하게 하였다. 한편 실험실에 균일도가 좋고 고자기장을 만들 수 있는 대형 전자석이 없었으므로 강자기장을 요하지 않는 핵사중극자공명(Nuclear Quadrupole Resonance, NQR)장치를 만들기로 하여 1974년 과학기술처에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여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75년 IBRD차관 자금으로 Varian W - 112 wide line NMR 분광계를 발주할 수 있게 되어 1978년에 이 실험장비가 학교에 도입되었다.
  김종오는 1975 - 1977년에 프랑스정부 초청으로 파리제6대학에서 유럽공동연구팀(FNAL E428)에 참여하여 연구한 바 있다. 1978년에는 미국 페르미연구소에서 수행했던 맵시입자(charmed particle)의 수명을 직접 측정하는 FNAL E531 국제공동연구 실험에 한국그룹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한국 연구그룹의 커다란 기여로 1978년 이래 페르미연구소의 국기게양대에 우리나라 태극기도 당당히 게양되어 휘날리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과학위상을 크게 떨쳐온 바 있다.

이과대학 물리학과 시절(1977 - 2002)

  이공대학 이학부와 공학부로 구성되어 있던 기구가 1977년 12월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 개편되어 물리학과는 다시 이과대학 소속으로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노봉환은 1978년 초대 이과대학장으로 취임하여 1980년까지 2년 동안 그 기초를 닦아놓았다.
  김정흠은 1972년부터 1982년까지 10년 동안 물리학용어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여러 가지로 혼용되어 오던 물리학 용어들을 심의 정리하여 1981년 통일된 『물리학용어집』을 간행함으로써 한국물리학회 회원들의 저술활동에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창립 당시부터 30여년 동안 한국물리학회 사업, 총무, 편집 등 주요 업무를 기획, 관장하며 두루 경험을 쌓은 바탕으로 하여 1985년에는 제 11대 한국물리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여 한국물리학회 발전을 위해 심혈을 다하였다. 또한, 1983 - 1986년에는 교육대학원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중고교 교사들에게 재교육 기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받아 교육개혁 심의 내용 중 특히 기초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정부 중요시책에 반영, 집행토록 했으며 컴퓨터 교육의 조기 초·중·고교 교과과정 도입을 제창하여 문교부로 하여금 이를 반영 및 집행토록 한 공로 또한 높이 평가해야할 사항이다.
  무엇보다도 김정흠의 대외활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각종 월간지나 신문지상 또는 TV 등의 언론매체를 통하거나 또는 직접 강연을 통해 어린이로부터 초·중·고등학생 및 대학생들은 물론 일반대중에 이르기까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초과학에 대한 계몽활동이다. 이러한 공로로 김정흠은 대한민국 과학기술부문 국무총리상, 국민훈장 동백장, 대통령상, 서울시문화상(기초과학분야) 등을 수상하였다.
  강우형은 고려대학교 교무처장(1981 - 1983), 이과대학장(1988 - 1989), 한국물리학회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1983 - 1985), 부회장 겸 간사장(1987 - 1989), 감사(1989 - 1991) 및 이사(1991 - 1993) 등을 역임하였으며, 서창캠퍼스 부총장(1989 - 1990)을 역임하며 학회발전은 물론 대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연구활동은 주로 통계물리 이론 중 제멋대로 걷기 모형에서의 확산계수 등이 있다.
  한편, 조성호는 한국물리학회의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을 연임(1989 - 1993)하면서 학회의 영문학술지인 JKPS를 1992년부터 SCI에 등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92년 9월부터 2년간 고려대학교 이과대학 학장으로 아산이학관(94년 4월 기공, 96년 9월 준공)을 건축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1994년 9월부터 2년간 기초과학지원연구소 서울분소장을 역임하였고, 1995년 5월에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대통령의 과학기술정책 입안과 자문에도 일조하였다. 위에 열거한 연구업적과 한국물리학회를 위한 봉사의 공로로 2000년 4월 한국물리학회 제 8회 성봉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2000 - 2002년까지는 임기 2년의 한국자기공명학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만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핵자기공명 기술을 이용한 유리계 구조와 전기적성질에 관한 연구, NQR방법에 의한 질소화합물 구조 연구, 비정질물질 제작장치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부터 2000년초까지는 주로 반자성 반도체인 HgMnTe의 단결정성장 및 전기적 특성, CdMnTe 화합물의 적외선 탐지소자 개발연구 등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은 많은 연구를 통해 1989년 한국물리학회 논문상을 수상하였으며 아울러 한국물리학회 편집위원, 사업, 총무, 재무간사, 감사, 재정위원장, 부회장 겸 간사장 및 학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한국물리학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고려대학에서는 학생처장, 기획처장 및 이과대학장을 역임하며 학교발전에 기여하였다.
  이후 1978년 뉴욕주립대학(버팔로)에서 통계물리학 이론 중 초유체물질의 특성을 연구한 엄정인(嚴正仁)이 부임하였다. 1981년에는 존스홉킨스대학 및 미네소타대학에서 광학 실험전공의 임동건(任東健)과 뉴욕주립대학(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교수의 지도를 받고 입자물리 이론의 현상론을 전공한 강주상(姜周相), 1982년에는 미국의 조지아대학에서 통계물리 이론 전공의 김인묵(金仁默)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에서 핵물리 실험을 전공한 심광숙(沈光淑)이 잇달아 부임하면서 물리학과에 입자물리, 핵물리, 고체물리, 응용물리, 통계물리 등 5개 분야의 전공분야에 각각 2명 이상의 전공 교수들이 학부와 대학원 석, 박사과정을 지도하게 되어 명실공히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2년간 대학원장으로 봉직하던 노봉환은 1987년 퇴임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89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마친 고체물리 실험전공의 이철의(李哲義)가 부임하였다. 1991년 3월에는 한국과학재단 지정 열 및 통계물리연구소가 개소되었다(소장: 엄정인). 1992년 김종오는 퇴임과 동시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으며, 아이오와주립대와 버클리연구소 및 오하이오주립대학과 독일 DESY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 및 시니어 사이언티스트로서 많은 경험을 쌓은 입자물리 전공의 박성근(朴聖根)과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워싱턴주립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마친 입자물리 이론전공의 최준곤(崔埈툛)이 각각 부임하였고, 1992년 8월에는 김정흠이 퇴임하여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93년 9월 입학정원이 40명에서 50명으로 증원되었다. 1994년도 교육부가 실시한 전국 50개 자연대 및 이과대학 연구인력, 지원시설, 연구실적 등 자연과학대학 총체적 연구역량은 고려대가 톱 5중 4위에 머물렀으나 당시 외국발표논문(SCI)에 가중치를 주어 평가한 교수 1인당 논문발표실적은 물리학과 교수들의 커다란 기여에 힘입어 예상을 뒤엎고 고려대가 전국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1994년 5월 7일자 조선일보 참조).
  1994년 3월에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콜로라도대학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마친 광학실험 전공의 조동현(曺東鉉), 1995년 3월에는 캘리포니아대(샌디에이고)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캐나다국립연구소에서 고체물리이론을 전공한 양승열(梁承悅),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전도성 폴리머연구를 하던 고체물리실험 전공의 주진수(朱眞秀)가 부임하였다. 1996년 3월에는 텍사스주립대(오스틴)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프린스턴고등과학연구원에서 새로운 분야인 비선형동역학을 연구하던 이경진(李庚鎭)이 부임하였다. 1996년 2월에는 강우형의 퇴임과 명예교수 추대 후,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에서 박사학위 취득하고 독일 GSI에서 원자핵물리 실험 연구를 수행하던 홍병식(洪炳軾)이 교수로 부임하였다.
  한편,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아산이학관을 신축하여 기증함에 따라 물리학과는 1968년이래 사용해 오던 이공대학 공동건물에서 1996년 8월 이사하여 독립적인 건물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아산이학관은 현대적 건물로 설계에서부터 각 학과의 교수들이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연구실에 적합한 시설과, 멀티미디어 강의실 등 첨단 교육에 적합한 시설을 갖추어 명실공히 물리학 교육환경을 대폭 개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학부교육은 물론 대학원 교육도 더욱 충실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2001년 2월 조성호가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2001년 6월에는 박만장이 기초과학기술 이사회 이사로서 국립천문대에서 개최된 이사회에 출장 중 갑자기 작고하였다. 2001년 9월부터 브랜다이스대와 케임브리지대에서 입자물리 장이론을 연구한 후 로체스터대에서 광학이론을 연구하던 박규환(朴圭煥)과 노터데임대에서 고체물리실험 전공 중 스핀트로닉스연구를 활발히 하고있는 이상훈(李相勳)이 부임하여 2002년 6월 현재 15명의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2002년 3월 엄정인은 초유체물질인 액체헬륨에 관한 연구로 제33회 3.1문화상 중 학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물리학과 설립 후 49년째가 되는 2002년 2월말 현재, 이 학과는 이학사 1700여명, 이학석사 600여명, 이학박사 150여명 등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기초과학 발전을 위한 고급전문인력의 양성에 크게 기여해왔다. 예컨대 고려대 물리학과 출신으로 국내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는 100여명에 이르고 있고,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학자는 30여명에 이르고 있다. 특히 입자물리 실험분야의 김영기(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와 유재훈(텍사스 주립대)은 미국의 페르미 국립연구소에서 톱쿼크 발견과 힉스입자 탐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CDF와 DO 그룹의 검출기 통합설치 및 운영의 최고책임자로서 그 명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또한 메릴랜드대학의 서은숙은 NASA의 연구프로젝트 중 우주공간에서 날아오는 초고에너지 양성자에 관한 연구성과를 인정받아 1997년도 최우수 신진 과학자로 선정되어 백악관에 초대되어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메달을 받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물리학과는 현재 외국의 저명대학 및 연구소들과 국제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약 40명의 대학원 박사후연구원 수준의 졸업생들이 파견되어 활약중에 있다.
  이렇게 교수진용이 강화되고 또 우수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회의 각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과 발맞추어, 재학생들의 학력도 크게 향상되었으며 또한 최근에 이르러 튼튼한 장학기금도 설립되는 등 물리학과는 이제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편 1990년 4월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문학부의 35회 졸업생인 서정국(徐廷國)이 한국은행을 거쳐 국민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저축한 거금 8억원을 물리학과 발전기금으로 쾌히 기탁하였다.
  이 기금을 바탕으로 하여 김정흠을 운영위원장으로 하는 백운장학회(白雲奬學會)를 설립하여 1991년부터 2002년 1월 현재까지 학부 및 대학원생 450여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해 오고 있다. 또한 동 기금을 재원으로 하여 학부 실험기자재의 현대화를 위한 1차계획을 완료하여 학부 전공실험 장비를 최신 장비(독일제 Leybold)로 교체하였다. 2차계획도 수립하여 1996년 이과대학을 신축 이전한 후 학생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현대적 실험장비를 충분히 갖추게 되었다. 2002년 백운기금은 원금 9억 7000만원 정도의 대형 장학기금으로 대학원생 17명, 학부생 2명에게 매학기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물리학과에 관련된 부설연구소는 다음과 같다. 한국검출기연구소는 1997년에 입자검출기의 개발 및 응용을 위해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2005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인 대형 강입자 충돌형가속기에 설치될 전방 저항판 검출기의 연구 및 건설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기초과학을 위한 입자검출기의 산업적, 의학적 응용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신경망동력학연구소는 생물체의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망의 기능을 비선형동역학 및 비평형문양형성의 관점에서 연구하기 위하여 1998년에 설립되었으며, 과학기술부의 창의적 연구사업에 의해 지원되고 있다. 한편, 나노과학연구소는 2000년에 탄소나노튜브 및 관련 연구를 위하여 과학기술부의 국가지정연구소 사업에 의해 설립되었다. 나노과학연구소는 그 외에도 생명유기물질에 대한 연구를 효소의 물리적 성질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공학원 생화학 연구실과 협동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리하여 1950년대 초에 설립되어 20년이 지난 1970년대 초에 제 1의 도약을 기한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는 다시 20년이 지난 1990년대 초부터는 입학 정원의 증가(50명), 우수 교수의 충원, 많은 졸업생들의 사회 각 분야에서의 활약 그리고 백운장학회의 설립 등에 힘입어 제 2의 도약을 위한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1년 12월 SK로부터 물리학과에 교수연구기금 5억원을 기탁받아 신임교수에 대한 지원체제를 갖춤으로써 우수한 연구진을 초빙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는 고체물리 실험, 고체물리 이론, 통계물리 이론, 입자물리 실험, 입자물리 이론, 핵물리 실험, 광학 실험, 광학 이론, 비선형동역학 및 생물물리학 분야에서 여러 교수들이 활발한 연구와 학생지도를 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새로운 비약을 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서창캠퍼스) (1980 - 2002)
  고려대학교 서창캠퍼스 물리학과는 1980년 1월 20일 고려대학교 조치원분교가 설치인가되어 자연과학대학 정보소자학과로 새로이 자리잡게 되었다. 1981년 5월 29일 교사가 완공되었으며, 1982년 10월 20일 조치원분교를 문리, 경상대학으로 편제가 개편되어 문리대학에 속하게 되었다. 1987년 문리대학을 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90년 자연과학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93년 자연과학관이 준공되어, 물리학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교수연구실험실 8개, 학부실험실 4개, 공동실험실 2개를 확보하여 학부실험실습 및 연구실험을 갖추게 되었다. 1996년 수학, 물리, 화학 3개학과를 자연과학부로 개편하여 1997학년부터 자연과학부로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2002학년도 정보소자학과로 모든 교과목을 개정하여 소자의 다양한 적용 능력과 새로운 소자의 개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기초를 확고히 다지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 나노구조소자, 반도체소자, 광전자소자, 액정표시소자, 의용소자, 자기소자, 초전도소자 등의 소자재료 물성 및 작동원리, 제작방법, 응용분야 등에 관하여 배우고, 이들 첨단 정보소자의 기초가 되는 양자과학, 양자정보이론, 전자기학, 전공 실험 등의 과목과 새로운 개념의 소자 개발을 위한 창의성을 배양하는 공부를 하여, 졸업 후 첨단 산업분야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한다.
  1996년 응용물리학과로 대학원 석사과정이 신설되었고, 2000학년에 박사과정이 신설되었다. 자성박막연구실(임우영), 반도체 광센서 연구실(김선웅), 통계물리연구실(남석우), 포토닉스연구실(유종훈), 양자계산 및 양자정보이론연구실(양형진), 초전도연구실(이순걸), 나노스핀장치연구실(이긍원), 액정물리연구실(신성태)과 안암캠퍼스 생명과학연구실에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1984년 이래 2001년 현재까지 배출한 이학사는 632명이고 이학석사는 17명으로 총 649명이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는 1905년에 설립된 보성전문학교가 1946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고려대학교의 대구 피난시절인 1953년에 수물학과로 시작 1954년 이학부 물리학과로 독립 1957년 대학원 물리학과 신설, 1967년 교육대학원 물리교육전공 석사과정 개설, 1977년 이과대학 물리학과로 개편. 1980년 서창 캠퍼스에 물리학과 신설, 1987년 자연과학대학에 편성, 2002년 정보소자학과로 개편.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 :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정흠 (고)김상돈 노봉환 (고)박만장 조성호 강우형 김종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현직 교수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강세종 이철의 박규환 양승렬 이경진 최만수 이윤희 최준곤 홍병식 주진수 김인묵 심광숙 강주상 엄정인 임동건 박성근 조동현 이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