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
  국민대학교는 해공 신익희가 건국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설립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1946년 9월 1일 보인상업고등학교 교실 두 칸을 빌려 출발한 국민대학은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이 “재단법인 국민학원”을 인수함으로써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였고, 1971년 북한산 국립공원 기슭의 현 정릉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명실공히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75년 3월에 부임한 김창식(물리교육)과 1979년 3월에 부임한 김선웅(반도체물리학) 및 1980년 9월에 부임한 김철성(자성물리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국민대학의 물리 교육은 1980년 12월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동시에 설치된 사범대학 내 과학교육과(물리교육, 화학교육)로 출범하여 제1기 입학생을 받아들였다. 1982년 과학교육과가 물리교육과와 화학교육과로 분리되면서 전문 물리인 양성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교육대학원에 물리교육전공이 신설되었다. 이듬해엔 현재의 과학관 건물이 신축됨으로써 물리교육과가 3층 전체를 이용할 수 있게 공간이 확보되었다.

유아기
  1983년 2월 김선웅이 사임하면서 윤성로(광학)가 부임하였다. 1984년 4월 교수 3인과 처음으로 학부 전학년이 갖추어진 학생들은 제48회 한국물리학회를 성공리에 개최할 수 있었으며, 1985년 2월에는 드디어 15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이어 같은 해 3월에는 조영석(플라스마 물리학)을 영입함과 동시에 대학원 물리학과 석사과정이 신설되어, 학부는 사범대학 물리교육과지만 대학원 과정에서는 물리학과로서 순수 기초과학 교육 및 연구의 발판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물리교육, 자성물리, 광학 및 플라스마 물리학 분야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1987년 첫번째 이학석사가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이 물리학과는 순수 물리학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물리학교육 영역까지 모두 전담하게 되었다.

양적 성장기
  1993년 3월 박기택(고체이론)의 부임으로 물리학의 실험과 이론 분야의 균형 있는 교육 및 연구 체제가 갖추어졌으며, 인터넷이라는 단어가 아직은 낯설던 이때 이미 교내에서는 최초로 과내 전용 전산서버를 구축하고 각 교수 연구실 및 실험실을 네트워크로 온라인화하여 행정, 교육 및 연구자료를 공유하며 처리할 수 있는 전산화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선구자적 역할은 학생들의 순수 기초과학에 대한 학구열을 부추기는 한편 사범대학 정원 감축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힘입어 1994년에 사범대학 물리교육과에서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로 변경되었고, 이에 걸맞은 물리학과의 교육 목표와 대외적 경쟁력에 맞도록 교육과정이 전면 개편되었다. 또한 물리학 학부과정의 각 분야를 두루 고려하여 편중되지 않도록 엄선한 학부 실험실습 기자재(일반물리, 전자물리, 현대물리)의 구입과, 이창우(반도체물리학, 1995년 3월 부임)가 합류된 총 6 명의 교수진에 의해 다양한 매체를 통한 교수 방법 개발 등으로 비로소 기초학문 분야의 일부를 담당하는 학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공학 계열의 물리 기반 교육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1995년 김철성은 대학내 고가의 실험장비에 대한 중복 구입을 방지하고 고가 실험장비의 공유 사용을 목적으로 연구를 지원하는 대학 부속기관인 공동실험기기센터를 발족시켰으며, 그가 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 X선회절기(XRD), 주사형 및 투과형 전자현미경(SEM, TEM), 핵자기공명(NMR)분광기, 시차 열 중량 분석기(DSC, DTA/TG) 그리고 원자력 현미경(AFM) 등의 고가 장비를 확보 운영시킴으로써, 이들을 통한 고차원적 실험 실습으로 이학 및 공학 계열의 교육 부분에서 차별화를 이루었으며, 연구 부분에서도 교내연구 열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대학 분위기는 1996년 대학교육협의회에서 주관하는 교육 및 연구 영역을 포함한 총 6 개 영역의 대학평가로부터 우수대학으로 평가를 받는 데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해에 위와 같은 교내 면학 열풍에 힘입어 대학원 물리학과 박사과정이 신설됨으로써 또 한번 물리학의 교육 및 연구가 크게 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무렵 교수들의 학회활동 상황으로 김창식은 한국물리학회 사업간사를 거쳐 물리교육분과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교육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국내 과학교육 발전을 위해 민간기금을 130억원 정도를 확보하였고 매년 과학올림피아드를 개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철성은 한국물리학회 재무간사 및 평의원 심의위원 등을 비롯하여, 한국자기학회 편집이사, 총무이사를 거쳐 2002년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영석은 한국물리학회 물리학 용어심의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질적 도약기
  김창식이 제2대학장(1996.3 - 1998.2)에 보임된 기간중에 교육부의 방침에 의해 학부제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1997년 3월 물리학과는 수학과, 화학과, 전산과학과와 더불어 자연과학대학내 자연과학부로 편제되었다. 특히 기존 학과의 입학 정원을 고려한 범위에서 다각도로 전공별 학생 수용 인원을 제한하기도 하였으나, 학생들의 편중 지원 성향으로 인해 한때 학사운영에 난관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다른 한편에서 교수들의 연구 부분에서는 김철성이 연구 책임자로 하여 “초거대자기저항(CMR) 박막 연구팀”이 처음으로 한국과학재단 5년 협약 과제인 목적 기초 연구에 선정되어 연구비 수혜를 받았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1998년 10월에는 한국자기학회 개최를 통하여 국민대학교 물리학과가 연구하는 대학임을 증명하는 저력을 보였다.
  또한 이듬해 9월부터 교육부에서 시행한 두뇌한국(BK)21 프로젝트에서 “페라이트 자성 박막팀(책임교수: 김철성, 참여교수: 조영석, 박기택)”이 핵심연구 분야로 선정되어, BK21 계약교수로 김삼진, 신진연구인력으로 심인보, 김우철, 김성백 등이 우수연구인력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2000년 8월 최초로 두 명의 박사학위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으며, 2001년 3월에 김창식의 정년퇴임으로 그 후임에 BK21 과제의 신진 연구인력으로 연구 수행중이던 모교 출신 심인보(자성재료학)가 임용되어, BK21 계획의 취지에 부합하는 성공사례를 남겼을 뿐 아니라 후배 연구원 및 학생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국민대학교 물리학과는 이제 국제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일 예로 김철성은 2001년 한 해 동안 SCI 논문 28편을 비롯하여 과거 10년간 96편의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하여 국내의 관련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업적을 쌓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왕성한 연구활동이 인정되어 미국의 뫼스바우어 분야 관련논문 전문 학술지인 “Mossbauer Effect Reference and Data Jounal (Vol. 25, No. 3, 2002)”의 표지에 연구실 학생들과 함께 소개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학과의 연구수행 능력 및 기술수준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윤성로가 제 4 대 자연과학대학장(2000. 3 - 2002. 2)에 보임된 기간중 2001년부터 기초과학을 기피하려는 학생들의 편중 성향 및 물리학 전공 학생들의 취업에 대한 어려움을 고려하여 자연과학부를 기초과학부와 컴퓨터과학부로 분리하고, 물리학전공을 전자물리전공으로 변경하였다. 2002년 3월에는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여 기초과학부를 다시 테크노과학부로 변경하였고, 초대 테크노과학부 학부장으로 조영석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전자물리전공 과정은 나노전자물리전공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나노물리학 및 전자물리학의 두 전공 과정을 설치하여 NT와 IT 분야에서 각각 미래지향적이고 보다 비전있는 교육의 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미래 비전
  기초과학 분야로서의 물리학은 현대 첨단기술 분야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 학문으로 그동안 발전되어 왔으나 최근에 와서 개인주의 중심의 사고와 결과를 내려는 성급한 성과 중심의 사회 추세에 따라 학생들로부터 점점 소외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대학이 소수의 엘리트적인 학문 중심에서 대중화된 지식체계로의 변화, 그리고 입시 중심의 우리나라 교육이 이러한 경향을 가속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변화는 기초학문의 붕괴를 가져오고 10년, 100년 후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앞날에 대한 우려가 인식되고 있고, 당장 21세기 한국의 산업발전을 이끌고 갈 초정밀산업, 정보산업, 생명공학산업을 위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와 관심이 점점 대두되고 있다.
  그동안 물리, 화학, 생물이라는 과목은 이공계의 기초과목이라는 정도로 여겨져 왔으나 이 분야는 넓은 응용분야가 펼쳐져 있어 실사회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이 분야는 편리상 각각 나누어 가르치고 있으나 21세기에 와서 수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화학, 생물을 포함한 광범위한 물리분야의 응용을 목적으로 하고, 21세기 산업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예전의 실험과 분석방법이 아니라 초미세입자의 세계에서 얻어지는 정보를 컴퓨터를 이용하여 새로운 정보분석 방법으로 자연 현상을 연구하고 응용하려 한다.
  2002년 현재 자연과학대학의 각 학부 또는 각 학과는 교수 수나 재정적으로 다른 대학에 비해 떨어지는 현실이다. 이것이 단시일에 양적, 질적 팽창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리, 화학, 생물 분야의 각 부문의 인력을 합쳐 공동의 대응이 바람직하다. 또한 학문 분야에서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가 하지 않고 있는 틈새시장을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래서 각 부문의 연합분야, 예를 들어 물리와 화학을 기초로 한 신소재 분야, 의료, 지구 환경 분야 등 기초과학을 토대로 연구하는 분야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 공학분야에서 다루는 산업 생산적인 기술은 앞으로 21세기에서는 미크론의 세계에서는 한계가 있어, 이러한 새로운 기술 발전을 위한 인력을 필요로 하여 공학과 기초과학을 연결하는 학과로의 특성을 살리려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테크노과학부 나노전자물리전공” 과정은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기초학문 특히, 자성물리 분야를 특성화 전략으로 단일화하여 21세기 나노기술 분야, 정보기술 분야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인력 양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국민대학교 물리학과는 1946년에 설립된 국민대학이 1980년에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과학교육과 물리교육으로 출범 1982년 물리교육과로 변경, 1994년 물리학과로 변경, 1997년 자연과학부로 통합, 2002년 나노전자 물리전공으로 변경 1982년 교육대학원 물리교육전공과 1985년에 물리학과 석사과정이, 1996년 박사과정이 개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