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기(1947 - 1974)
  동아대학교 물리학과는 1946년 동아대학 개교와 함께 1947년에 신설되었으며, 1958년 9월에 대학원 석사과정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1962년 대학정비기준령에 의해 물리학과가 폐지되고 수학과와 함께 수물학과로 통합 개편되었다가, 1968년에는 수물학과가 수학과로 개편되면서 물리학과는 폐지되고 대신에 공과대학에 응용물리학과가 신설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969년, 다시 응용물리학과마저 폐지되는 비운을 겪으면서, 이후 1975년, 다시 문리과대학에 물리학과가 신설되기까지 6년이라는 공백기간이 있었다.
  1952년 한국물리학회가 창립한 데에 비추어 이보다 5년 전, 1947년에 문을 연 동아대학교 물리학과는 지방 사학을 통틀어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초창기에 빈번한 학과의 통폐합이라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고, 특히 1962년의 물리학과 폐지는 현재와는 다른 위상으로서의 물리학과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맥이 끊긴 아픈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이후 13년 만인 1975년에 다시 문리과대학에 독립된 물리학과가 신설되고, 1976년도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물리학과의 여명기를 어느 시점으로 잡아야할지 애매하기도 하지만 1975년 이전까지를 여명기로 분류하기로 하였다.
  초창기에 동아대학교 물리학과에 재직했던 이들로는 임태순(任太淳), 이범삼, 김철수(金哲洙), 김영함(金榮咸), 김현남(金顯男), 윤재봉(尹在鳳), 조민식(曹民植), 전구제(全龜濟), 이종헌(李鐘憲), 홍진태(洪鎭泰) 등이다. 임태순은 처음에 시간강사로 강의를 맡다가 1954년 5월 전임강사로 발령받았고, 3년여 동안 재직하다가 1957년 서강대학으로 옮겼다. 이범삼은 1956년 부교수로 부임하여 3년간 재직하다가 부산대학으로, 김현남은 1957년 전임강사로 발령받고 3년여 동안 재직하다가 서울 지역의 타대학으로 옮겼다. 동국대학에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김영함과 서울대학에서 재직하다 작고한 김철수도 당시 어떤 신분으로 있었는지는 현재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현재 동아대학 명예교수로 있는 이종헌과 홍진태의 기억에 의하면, 초창기에 동아대학교 물리학과에서 강의를 하였는데, 김영함은 당시에 물리학회 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김철수는 유체역학을 강의하면서 학교측에 강력히 요구하여 1950년대의 어려운 시절에 지방 사립대학에서는 아마도 국내 최초로 마하 - 젠다 간섭계(Mach - Zehnder interferometer)와 충격파관(shock tube)을 미국으로부터 구입하도록 승낙을 받았으나, 이 장비가 도입되기 전, 아쉽게도 서울대학으로 갔다. 따라서 이 장비는 구입 후 그대로 방치한 채로 두었다가, 1960년대초에 전구제와 당시 조교로 있었던 홍진태가 이를 조립 완성하였다. 그러나 1962년 물리학과가 수물학과로 통합에 이어 1968년 물리학과가 폐지되는 등의 와중에 교수들이 공과대학의 타학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이 장비가 크게 활용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지금은 고 김철수의 산소가 경영대학 인근에 위치해 있으나,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산소가 동아대학교 자연과학대학 건물 바로 뒤에 있어서, 이러한 회고담을 들으면서 진원배는 묘한 감회와 함께 당시에 김철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당당하였을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당시 조민식은 동아대학교에서 1960년부터 약 3년 간 시간강사로 강의를 맡다가 한국해양대학으로 전임 발령을 받고 옮겼다. 윤재봉은 1954년 부교수로 발령받고 1975년 작고할 때까지 학과에 재직하였으며 1965년 10월에 부산에서 한국물리학회 임시총회가 개최될 당시, 한국물리학회 부산·경남지부 총무로서 활동하였다. 전구제와 이종헌은 물리학과가 폐지되면서 공과대학 전자공학과로 옮기고 이후 정년퇴임 때까지 전자공학과에 재직하였다. 그러나 전구제는 정년퇴임 때까지 물리학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후에 한국물리학회 부산·경남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홍진태는 1962년부터 조교로, 1967년 전임강사로, 다음해인 1968년 물리학과가 폐지되면서 금속공학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홍진태는 1975년 물리학과를 다시 복원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한국물리학회 부산·경남지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57년 6월 29일 한국물리학회 주최의 제1차 일반원자력 교양강좌가 동아대학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강좌에서는 문병열의 “원자력구조 및 동위원소”, 임재봉의 “원자파괴 및 원자 에너지 이용”, 엄장현의 “방사능과 보건”이라는 주제의 강연이 있었다. 그리고 1962년 1월에는 물리학과에서 「물리학보」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1965년 10월 한국물리학회 임시총회를 부산대학과 공동으로 주관하는 등 당시 어려운 시기에, 더구나 초창기의 지방 사립대학으로서 빈번한 학과의 통합과 폐지라는 우여곡절을 겪어왔음에 비추어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할 것이다.

유아기(1975 - 1980)
  1962년 물리학과가 폐지된 이후 13년 만인 1975년에 다시 문리과대학에 물리학과가 신설되고, 1976년도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7년 폐지되었던 대학원 석사과정이 1980년에 재설립되었다. 당시의 재직교수로는 홍진태뿐이었으나,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매년 한두 사람씩 교수를 충원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충원된 교수로는 김 엽(金 燁, 1977, 2002년 경희대학 재직), 배세환(裵世換, 1978), 성상기(成商基), 진원배(秦源培, 1979), 정성채(鄭成采), 정세민(丁世敏, 1980) 등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학과의 체제를 갖추느라 동분서주하였던 시기였다.

양적 성장기(1981 - 1991)

  1980년에 첫 졸업생이 배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실험대학으로 지정되면서 학과 신입생 정원이 50명에서 80명으로 대폭 증원되었을 뿐 아니라 대학원 석사과정에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추가로 교수 충원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교수는 김창배(金昌培, 1982, 현재 숭실대학 재직), 박홍준(朴洪準, 1984년), 노태익(盧泰翊, 1985), 정태훈(鄭泰勳, 1986) 등 증원으로 1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비록 1947년에 학과가 신설되어 역사는 길다 하겠으나, 오랫동안 폐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설학과나 다름없었는데도 당시 학교 당국의 별도 예산 지원이 없어서 학생 실험실습비로만 꾸려나가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학생 실험기구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초에 학교에서 일본으로부터 OECF교육차관을 도입하여 이 학과에 일부 지원된 것은 그런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자금으로는 학생 실험기구들을 갖추는데도 역부족이어서 교수 연구시설은 엄두도 내지 못해, 사실상 말 그대로 양적으로 덩치만 커졌지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처지는 아마도 이 시기에 지방 사립대학들 대다수가 비슷한 처지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1980년대초에는 대학원에 지원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실험장비가 없어 학생 지도에 교수들이 고민스러워했던 시기였다.
  1982년에는 정성채의 노력으로 미약하지만 교비지원을 받아 방사선물리연구소가 동아대학교의 독립된 연구소로 설립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1]. 이러한 상황하에서도 1987년 7월 10 - 11일 양일간 동아대학은 한국물리학회 주최 제 10회 고체물리학심포지엄을 주관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또한 물리학과 정태훈이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1989년 한국물리학회 장려상, 1990년에 논문상을 연이어 수상한 것은 이 학과의 자랑이라 하겠다.

질적 도약기(1992 - 2000)
  이 시기에 전국 대학의 자연계열에 국고 보조금이 지원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주관하에 전국 대학 자연계열 학과에 대한 평가가 실시되면서 이를 기회로 물리학과에서는 학교당국을 설득하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특별예산을 지원받게 된 것을 계기로 비록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는 했지만 연구실험을 할 수 있는 장비와 시설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93년 물리학과에 대학원 박사과정을 신설하여 비로소 석·박사과정을 갖춘 대학원의 체제를 이루게 되었으며, 비로소 정상적인 대학원생 지도를 할 수 있는 운영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젊고 유능한 교수진을 다시 보강하기 위하여, 한국표준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각각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던 반도체분야의 이재열(李在烈, 1997)과 김 용(金 湧, 1999) 연구원을 교수로 충원함으로써 질적 내실을 기하였다.

근황과 미래비전
  그러나 1995년서부터 시작된 교육부의 대학 교육개혁 정책의 회오리바람 속에 동아대학교에서도 학과를 없애고 획일적으로 학부제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의 네 개의 학과가 하나의 학부로 통합되고 말았다. 당시 교수들은 획일적인 학부제 실시가 유사학과 통폐합이라는 교육부의 기본 취지와도 맞지 않으며, 학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획일적인 학부제 실시로 향후 예상되는 기초과학의 심각한 위축 등 불합리성을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행함으로써 우려했던 대로 기초과학으로서의 물리학은 이 시기부터 학생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어서 불어닥친 IMF 한파를 겪으면서 학문의 성격상 물리학과는 졸업 후 상대적으로 취업이 어렵다고 지원하는 학생이 급격히 줄어들어 2002년 현재까지 학과의 존폐를 걱정할 정도로 심각한 국면에 처해 있다.
  더군다나 연구중심대학이다 BK21 사업이다 하여 출발점에서부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서울지역 대학에 모든 지원이 집중됨으로 인하여, 지방 사립대학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리라 생각되지만, 동아대학교 물리학과에서도 학부를 졸업한 우수한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서울지역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바람에 대학원 유지마저 위태로운 형편이었다. 이로 인하여 교수들의 연구를 위한 인적 자원 확보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교육개혁 이전보다 대학과 전공별로 더욱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고심 끝에 중지를 모은 결과, 교수들의 전공과 향후 21세기 미래 전망을 고려하여 학과를 신소재 분야로 특성화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98년에 학과의 명칭을 신소재물리학전공으로 변경하였고, 따라서 교과과정도 변경된 전공 명칭에 걸맞도록 개편하였다.
  상기 전술한 바와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대학교 물리학과에서는 학과가 처해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공을 특성화하고 전공 명칭도 변경하는 등 물리학과의 생존과 활성화를 위하여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으나, 2002년 현재까지는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짧은 기간에 평가를 하기는 시기상조일지 모르나 기초 학문에 대한 특별한 정책적인 배려가 없는 한, 물리학과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 향후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1] 동아대학교 50년사, 1998년 발간.




동아대학교 물리학과는 1947년 동아대학교 개교와 함께 신설. 1962년 대학정비에 따라 폐과, 1975년 다시 신설. 1980년 석사과정 재설립과 1993년 박사과정 개설. 1998년 학부제의 어려움 속에 신소재물리학과로 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