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리과대학 수물학과 시대(1951 - 1961)
  부산대학교는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의 인가를 얻어서 설립되었으나 일제시대 중학교 4·5학년 졸업자에 대학진학의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예과 제도로 시작되었다.
  1948년 9월에는 최초의 학부로서 문리학부와 상학부에 각각 100명의 학생을 배당하여 개강하게 되었다. 물리학과는 중학교 6년제 졸업자가 입학한 해인 1951년 4월 문리학부 수물학과로 발족되었다.
  1951학년도 당시의 이학부 수물학과 교수진영은 김규태(金圭泰), 1952년 4월에 수물학과에 한화석(韓華錫)이 발령이 났고, 1953학년도에 한화석이 미국유학을 떠났으며, 그는 1959년까지 부산대학에 적이 있었으나 귀국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제외하면 1954년 신학기까지 전임교수의 변동은 없었으며, 교과목의 운용은 피난 온 서울지역 대학 및 수산대학 교수들의 출강에 의한 지원을 받았다. 이 기간 즉 1952년에서 1954년 사이에 수물학과에 출강한 교수는 김정수(金正洙) 외 수학에 엄장일(嚴章鎰), 최윤식(崔允植, 해석개론)이 있었고, 물리학에 현정준(玄正晙), 김상돈, 지창열(전자기학), 윤세원(해석역학), 김철수(유체역학) 등이 있었다. 1954학년도는 전후학기를 통해 수물학과에 여러명의 전임이 영입되었다. 수학에 김정수, 이일해(李日海) 그리고 물리에는 현정준, 양인기(楊寅祺)가 있었다. 1955년 4월에는 1952학년도부터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사관학교에 출강하였던 엄장일이 전임으로 부임하였으며, 1956년 5월에는 이재현(李在鉉)이 수물학과의 첫 조교로 임명되었다.
  학과 증설과 정원증가로 인해 그 업무량이 방대해지면서 학사업무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인사사령부에 학과의 주임교수가 발령된 것은 1956년 이후이며, 이때의 수물학과 주임교수는 김규태가 맡게 되었다. 김규태는 수물학과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컸을 뿐 아니라 부산대학이 종합대학으로 확장되고 정비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여러 분야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57년에는 양인기가 서울로 진출하였고, 1958년 5월 교양과정부 지도주임으로 수물학과와 화학과에 엄장일, 의예과(B)에 이일해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현정준이 서울로 옮겨갔으며, 그 후임으로 1958년 9월에 이범삼이 부임하였으며, 1년 후인 1959년 9월에는 약학과의 물리강의를 맡는다는 명목으로 의과대학 소속으로 김호철(金湖鐵)이 전임으로 영입되었다.
  1961년 9월 문교부는 “국립대학 정비절차”를 발표했다. 이 조치로 부산대학교에서는 법과대학이 폐쇄되었고 문리과대학에서 수물학과는 철학과, 정치과, 경제과, 사학과, 지리지질학과와 함께 폐과되었다. 이로써 1951년 창설된 수물학과는 11년 만에 학과가 없어졌다. “대학정비기준령”으로 폐과 내지 폐쇄된 대학의 운영에 대한 정부의 시행세칙은 다음해인 1962년 4월에 발표되었다. 이에 따르면 부산대학교 수물학과의 재학생은 경북대학교에 흡수·편입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에 교내 전과는 2학년 학생에 대해서는 동일계열 학과에 한해 허용되었고 3·4학년은 동일계 학과에 한하되 전과 학생은 학점취득상 3학년의 경우는 1년, 4학년의 경우는 2년간 졸업이 지연되고, 개인 사정으로 폐과된 학과에 잔류를 희망하는 학생에게는 대학정비령 부칙 2항 “본령에 의하여 폐지되는 대학 또는 학과 및 대학에 준하는 각종학교는 그 폐지 당시의 재적학생의 졸업 연도까지 그 학교 또는 학과를 존치한다. 단, 재적학생이 극소수인 경우에는 동계의 다른 학교 해당학과에 편입하게 할 수 있다.”라는 경과규정에 따라 폐과된 학과에서 졸업시까지 잔류가 허용되었다. 이러한 문교부 조치에 수물학과 학생들의 의사를 조사한 결과 교내 전과, 전학 희망자는 45명이었고 잔류희망자는 24명으로 나타났다. 이어 1963학년도 제1학년에서 3학년까지는 학생이 없고 4학년에서만 단 1명이 잔류했다.
  한편 수물학과 폐과와 더불어 교수진에도 변동이 생겼다. 폐과가 되었을 때 수물학과의 교수 중 수학에서는 김정수, 엄장일, 이일해 등이 건재하였는데 물리에서는 이범삼만 남게 되었다. 김규태는 개인사정으로 사표를 냈고 전임강사 김호철은 1961년 유학차 영국으로 떠났으며, 조교 이재현은 병역미필로 사표를 냈다.
  1963년 2월 수물학과 졸업생인 교육대학 이형기(李衡基)가 문리과대학 조교수로 발령이 났다. 또 3월 부산대학교 학생의 외국유학을 위한 10명의 지도위원을 구성하였고, 문리대 위원으로 김정수가 선임되었다. 김정수는 복과, 대학승격 분리를 둘러싼 교수 좌담회에서 “수물학과는 가능한 한 분리하여 복과시켜야만이 각기 제대로의 발전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64년경에는 1962년 준공된 교수연구동(2002년 현 인문관 옆) 북측 1층 일부를 이재현의 연구실과 부속실험실로 사용하였고, 3월에는 이일해가 문리대 자연계 인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5년 10월에는 수물학과 졸업생 박재호(朴載昊)가 공대 전임강사로 발령이 났다. 1965년 3월에는 이범삼이 대학원 물리학과 주임으로 발령났고, 11월에는 한국물리학회 및 학술대회를 부산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최하였으며, 이 대회가 끝난 후 한국물리학회 부산·경남지부가 결성되고 이범삼이 지부장에 피선되었다. 이 시기 교수들의 연구활동은 한국물리학회, 대한수학회 등을 통해 교수들의 연구발표가 활발했으며, 김정수와 이일해는 각각 1958년과 1961년에 유학차 1년간 미국으로 떠났다.
  1958년 문리대 학보 1권 1호에는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 학장 서리인 수물학과의 김규태가 “커가는 과학에의 관심”이란 글을 싣기도 했으며, 또 김규태는 1959년 4월, 5월 대학신문에 Albert Einstein의 서거 4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일생과 업적에 관한 글을 발표하였다. 1961년 5월과 1964년 10월 대학신문에는 각각 “Nazism과 Communism은 인류의 적”, “올림픽에서 활약하는 전자계산기”라는 제목의 글을 이일해가 실었다. 1962년 12월 김정수가 대학신문의 효원춘추에 “음성(音聲)”이란 글을 실었고, 63년 효원 6집에 폴리아(G. Polya)의 “How to solve it”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1963년 5월 김정수는 “Coerciveness problems on space와 편미분방정식의 경계치 문제에 대한 연구”로 부산대학교 연구업적상을 받았다. 그리고 1964년 6월 부산시 자연과학부문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엄장일은 1963년 7월, 1964년 2월 그리고 1965년 5월에 각각 “교양수학의 일면”, “교양수학Ⅱ”, “기업에 필요한 수학” 의 글을 대학신문에 실었으며 교과서 대학수학연습(Ⅰ)도 집필하였다. 한편 1963년 9월에 문교부는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전국 대학교수 학술연구 조성비를 126건에 1723만 8000여 원을 지급키로 결정하였으며, 이일해 외 2명이 “경계치 문제의 해의 regularity에 관한 연구”로 15만원의 연구비를 받았다.
  그 당시의 실험실습기구를 살펴보면, 과학관에 자연계 각 학과의 실험실이 하나씩 배정되었다. 당시는 실험장치가 많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 실험실 한쪽 구석에 커다란 격납상자가 하나 있었고 이 안에 모든 실험기구가 들어 있었다. 물리실험은 2학년부터 부과되었다. 실험기구는 마이크로미터, 캘리퍼, 계산척, 계산기(기계식), 암슬러형면적계, 화학천칭, 소형현미경, 유동현미경, 그리고 프리즘 분광계, 유리세공장치 등이 꼭 한 세트씩만 있었다. 이것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다 보면 겨우 한 학기는 이럭저럭 넘길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따라서 김규태는 가끔씩 학생들을 데리고 국제시장 고물상을 순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고물상 순례에서 최대 수확의 하나는 기계식 계산기를 하나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전부터 있었던 계산기가 매우 낡고 녹이 슬어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신품인 동시에 실험실에 있는 계산기보다 훨씬 자리수가 많은 것이었다. 전자식 계산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는 요즘 세상에서는 계산자와 더불어 기계식 계산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가 되었다.
  실험실 운영에 있어 이와 같이 고충을 겪고 있던 중 1953년 2학기에 실험기구가 UNKRA원조에 의해 들어왔다. 이 원조는 그 당시 시가로 8만달러 정도의 원조였다. 실험기구는 주로 일본제로 시마즈(島津) 또는 이화학연구소 제품이었다. 중요품목은 회전식 진공펌프, 기름확산 진공펌프, 수은확산 진공펌프, 대용량 수은정류기, 출력 50W의 진공관식 증폭기 장치 2대(출력 50 W짜리 증폭기 시설 2대중 1대는 물리실험실에 비치되었고 나머지 1대는 교내방송용으로 제공되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교내방송을 하게 된 것이 부산대학 교내방송의 효시가 되었다.), 4인치 천체망원경, 저주파용 오실로스코프 등을 위시하여 케이터흔들이, 보르다흔들이, 비틀림흔들이 등 여기서 일일이 장치의 명칭을 열거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고 전체적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요시다(吉田) 등의 물리학실험책에 수록된 내용의 실험종목은 거의 실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치의 모양도 그 책에 나와 있는 삽화와 똑같은 것이 한 세트씩 들어왔다. 이 원조는 부산대학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원조받은 전품목은 대신동교사에 집하하여 부산대학교의 주관하에 각 대학에 분배되어 그 당시의 국립대학 모두가 원조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말로 실험 지침서를 만든다 해도 보유기구와 일치하는 지침서로는 앞에 기술한 일서를 번역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의 영향력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일반물리실험 종목의 수는 충분히 갖추어져서 학생수가 적은 수물학과 학생의 실험은 해결되었으나 학생수가 많은 의예과 학생의 실험지도는 같은 시간에 적어도 8 - 10종목을 동시에 지도하여야 하므로 이 점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었다.
  1955학년도 신입생은 동래 효원캠퍼스에서 개학하여 수업을 받고 물리전공 4학년은 동래로 이동하였다. 이때 초대 학감은 김규태가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대한미군원조처(AFAK)의 지원 자재로 공과대학 부속공장이 현 재료관 뒤편과 조선관 자리에 두줄로 아래쪽에 3개동, 윗줄에 2개동 도합 5개동이 건립되었다. 이 실습공장은 전 이공계 학생들의 실험실로 우선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공계학과는 1955년 9월에 서대신동 교사에서 이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수물학과가 사용한 건물은 아랫줄의 제일 남쪽동 즉 문창대 아래 바로 옆에 있는 동을 반으로 나누어 남쪽 반을 사용하였으며, 여기서 비로소 교수들에게 교수실이 배정되고 실험 준비실, 암실을 겸한 천칭실이 마련되었고, 학생 실험실은 2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교수실은 아직 홀로쓰기가 못되고 두사람이 한방을 사용하였고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의 방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이 실험실은 오전에는 전공과목의 강의실로 사용되었다.
  동래캠퍼스에 와서는 실험기구의 수를 증가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이공계 실험비를 물리실험기구 확충에 많이 배정한 일이 있었다. 여하튼 동래캠퍼스에 와서는 학생 실험에 대한 애로는 많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연구용 기자재는 아직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정이었다.
  부산대학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됨으로써 1953년 8월 대학원 개원이 허가되어 1954년 4월에 개설되었다. 석사과정은 물리학과를 비롯한 18개 학과가 개설되었다. 이때 대학원 학생정원은 3명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장은 총장이 겸임하였고, 5월부터 대학원 강의가 시작되었다. 수업은 강의실 또는 교수연구실 등 어디에서든지 수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원 물리학과는 1961년 학부 폐과 후에도 존속되었다.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시대 (1965 - 1981)
  1964년에서 1975년까지 물리학과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함께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양적·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특히 1961년 9월 대학정비령으로 폐과되었던 수물학과가 1964년 3월 다시 복과되어 제2의 출발이 시작되었으며, 종합대학체제로의 변환기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교수활동을 보면, 1965년 이범삼은 플레임 퓨전(Flame Fusion)법에 의한 루비 단결정의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1968년 3월 이범삼을 책임연구원으로 하는 물리학과 연구진이 한국 최초로 공업용으로 많이 쓰이는 인공수정(水晶)의 양산화 실험에 성공했다.
  이범삼은 1967년 11월부터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1968년 5월 과학기술처로부터 100만원의 연구보조비를 지급받아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여 약 6개월간의 노력 끝에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1971년 이범삼 연구진이 한국 최초로 공업용으로 많이 쓰이는 인공수정의 양산화 실험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수정 원료 확보에 밝은 전망을 안겨주게 되었다. 이범삼은 동아일보사가 주관하는 동아과학장려상을 수상하였다. 그후 NaCl, BaTiO3, TiO2, LiNbO3 단결정 육성 등에 있어서 다른 대학을 능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금도 이 분야에는 탁월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1979년에 문교부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해 기초과학 관계의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하여 각 대학에서 연구과제를 한 건씩 제출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학과 교수회의에서 여러 가지 과제에 대한 토의를 한 결과 리튬 니오브산염 단결정의 성장과 그 물성에 관한 연구를 과제로 선정하고 학과의 전 교수가 연구원이 되어 당해 연도를 포함한 3년간의 연차 연구계획서를 작성하여 학교당국에 제출하였다. 이때 타학과에서도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였으나 한 과에서 2 - 3건의 계획서가 공동연구과제로 제출되었으므로 학교당국으로서는 문교당국의 요구에 가장 가까운 것은 물리학과에서 제출한 연구과제로 보고 이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연구비를 받게 되었고(일차년도는 1400만원), 이어서 연구소 설립이 인가되었다. 당시 문교부 계획으로는 서울대학교에 기초과학연구소를 두고 서울의 기타 대학과 지방 대학에 각기 세분화된 분야의 연구소를 두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기초과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연구소의 명칭을 문교부가 요구하기에 물리학과에서는 명칭상으로 보아서는 문교부가 요구한 것과 같이 좁은 영역으로 보이지만 내용은 보다 넓은 범위의 연구를 하기위해 유전물성연구소(誘電物性硏究所)로 하였다. 유전(誘電)을 앞에 붙인 것은 눈가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후 문교부에서 연구책임자 회의가 있을 때 문교부가 배포한 유인물에 타자를 잘못 쳐서 유전(誘電)이 정전(淨電)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 잘못됨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것보다 접두어를 빼고 물성연구소로 할 것을 요구하여 승인을 받아(연구 책임자 이재현) 결국 물성연구소로 명칭이 낙착되었다.
  전후 사정은 어떻게 되었든 연구소의 운영규정은 승인되었고 초대 소장에 이재현이 임명 되었다(1979. 9. 17). 문리과대학이 문과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되고 이재현이 자연과학대학 학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 후임으로 1981년 3월에 윤수인(尹洙仁)이 소장을 맡게 되고 연구소에 한 명의 조교를 배정받게 되었다. 그후 역대 소장과 연구원의 꾸준한 노력으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연구비의 규모가 커지고 자연과학대학 교수들은 누구나 희망에 따라 연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는 기초과학연구소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으며 소장도 자연대 전학과에서 고루 맡게 되었다.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시대(1981 - 현재)
  1981년 3월 대학설치령 개정으로 문리과대학이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분리되었다. 분리 당시 문리과대학은 20개 학과에 5천여 명이 밀집된 곳으로 운영상 어려운 점이 많았다. 따라서 인문대학 10개 학과와 자연과학대학 10개 학과로 분리되었으며, 그 결과 물리학과는 문리과대학에서 분리된 자연과학대학으로 귀속되었다.
  정부의 기초과학 육성정책에 따라 설립된 문리과대학 부설연구소인 물성연구소가 그뒤 문리과대학에서 분리되어 부산대학교 물성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설립목적은 물성연구와 새로운 물질 개발을 통해 기초과학을 발전시키고 국가산업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연과학교육, 특히 대학원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에 있었다. 주요 기능은 응축물질에 관한 기본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다른 연구기관이나 대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과의 상호교류였다.
  1986년 물리학과 화학 외에 지구과학 분야를 특성화 분야로 추가하여 종합기초과학연구소로 발전하였다.
  1987년 2월 6 - 7일 양일간 전국기초과학연구소 고체물리학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는데, 이 심포지엄에서는 “전이원소와 희토류 화합물의 자성(길원평(吉源平), 부산대학교 물리학과)” 등이 발표되었다.
  선진국 수준의 새로운 과학지식의 창출과 우수한 고급인력 양성을 위한 한국 과학재단의 우수연구센터 계획의 일환으로 한국과학재단으로부터 1991년 1월 4일에 물리학과에 설치된 과학연구센터인 유전체물성연구소는 9년간 매년 9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연구초기에는 전국 12개 대학으로부터 30여명의 교수와 100여명의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참여하여 전국을 단일 연구권으로 하는 국내 유전체 분야 연구의 구심역할을 담당하고, 국제적으로는 능동적인 학문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며 유전체 연구분야의 우수인력을 양성하여 왔다. 2002년 현재는 5명의 전임교수를 포함한 11명의 교수와 전임연구원 및 20명의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과제인 “산화물의 물리적 특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부산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는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고 이와 병행하여 자연과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응용분야와 기초과학 연구 발전에 관련된 사업을 수행할 목적으로 1987년 5월 “물성연구소”에서 명칭이 변경된 것이다. 이 연구소는 1991년 2월 제 7차 IBRD 교육차관금 40만달러를 배정받았으며(물리학분야:열분석기, 적외선가열장치), 1991년 병역특례연구기관으로 선정되었다.
  이 시기의 교수활동을 살펴보면, 1995년도에 물리학과 윤수인이 부산대학교 제 15대 총장에 당선되었다. 윤수인은 1984 - 1985년까지는 교무처 부처장을, 1987 - 1989년에는 교무처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재현은 1981 - 1983년까지 자연대학장을, 1990 - 1992년까지 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노동택(盧東澤)은 1983 - 1985년까지 교육대학원장을 지냈다. 노지현(盧祉鉉)은 1991 - 1993년까지 교무처장을 역임하였고, 진광수(陳光守)는 1990년 3 - 1990년 12월까지 사범대 부속 교직부 부장을 지냈으며, 이대원(李大遠)은 1995 - 1998년까지 학생기숙사 사감장을 하였다. 장민수(張敏守)는 1991 - 1999년까지 유전체물성연구소 소장과 2001년부터 현재까지 교무처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양용석(梁龍錫)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유전체물성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물리학과는 교육과 연구의 강화를 위해 우수한 교수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며 2002년 1월 현재 전임교수는 26명(물리교육과, 유전체물성연구소 포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임교수 전원이 국내외의 저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교수 활동이 충실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물리학과의 모든 교수는 학부강의와 대학원 강의를 동시에 맡고 있다.
  2002년의 중점연구분야는 응집물질물리학 실험·이론분야와 핵물리학 실험·이론분야, 입자 및 장물리학분야, 광학분야 그리고 물리교육분야로 나뉘어 연구를 수행중이다.
  교내외의 행사를 보면, 1970년대에 이루어지던 오픈 랩(open lab)이 1970년대 중반에 사라졌다.
  1990년대 들어서 1997년 5월 14 - 15일에 제 1회로 오픈 랩이 다시 부활되었다. 취지는 학부과정의 학생들이 대학원진학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취지를 조금 더 넓혀 학부과정으로 진학을 앞둔 고교생까지 진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학부과정 오픈 랩이 동시에 실시되었다. 오픈 랩은 부산·경남지방의 중고교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고, 2002년 현재는 명실상부한 물리학과의 연중 주요행사가 되었다.
  또 다른 행사로 결정성장 콘테스트가 있는데, 결정성장 콘테스트의 취지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21C 과학의 유망 분야인 유전체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고, 중고등학생때부터 과학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과학에의 체험을 쌓고, 21세기 유망 신물질에 대한 이해를 넓혀 학문분야가 핵심기술과 어떻게 접목되는가를 이해시키고자 장학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다. 매년 실시되는 콘테스트에 해가 갈수록 참가 학교와 참가팀도 늘고 있다. 1997년 제 1회 콘테스트의 경우 23개의 학교에서 54개 팀이 참가하였으나, 제4회에는 49개의 학교에서 203개 팀이 참가하였다. 이에 맞추어 콘테스트의 규모도 커졌다.
  제2회 때부터 총장상으로 승격되었으며, 유전체물성연구소장상(장려상)도 신설되었다. 콘테스트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결정의 성장 및 결정의 중요성 등을 인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또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우수인재 유치에도 큰 기여를 하여 2000년도에는 2 - 3회 대상을 차지한 박영조학생이 2000학번 특기생으로 입학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물리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결정 성장의 대부 이범삼
  이범삼(1915 - 1976)은 1915년 3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운학리에서 태어나 1934년 안주공립농업학교 5년을 졸업한 후 1942년 동경 물리학교 이화학부 고등사범과 3년을 졸업하고 1942년부터 1947년까지 관립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주요 경력으로는 1947년 관립 전주사범학교 강사가 되었으며 1947년부터 1950까지 국립해양대학 부교수로 근무하였다.
  1950년부터 1955년 해군사관학교 교관(중령)으로 지내다 다시 1955년부터 1958년 국립해양대학 부교수로 근무하였다. 이후 1958년부터 1976까지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범삼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물리학회 부산·경남지부 지부장을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한국물리학회 부회장직을 지냈다.
  이범삼은 소금, 그리고 수정, 루비, 사파이어 등의 산화물 단결정을 국내 처음으로 성장시킨 학자이다. 처음 시도한 결정 성장은 김정남(金正男), 윤수인 등 젊은 교수들이 주관하고 이범삼이 이들을 후원한 NaCl, KCl이었다. NaCl의 융점은 800℃. 이 온도를 유지하는 전기로를 제작해야 했다. 그래서 연탄난로를 개조하여 전기로 제작이 시작되었다.
  처음의 성공에서 용기를 얻은 연구는 1964년에 KCl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 물질은 용융점이 760℃로 NaCl보다 낮아서 온도 유지에는 어려움이 적었지만, 용융되면서 염소기체가 발생하였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닥트를 설치할 정도로 실험에 사치를 부릴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1차대전의 독가스를 조금씩 맛보면서 실험은 강행되었다.
  결정 성장에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이범삼은 김정남, 윤수인과 더불어 1965년에 알루미나계의 단결정 성장을 시도하였고 다음에는 인공수정 성장에 도전했다. 이를 위해 1968년에 “인공 수정의 양산화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과학기술처에 연구비를 신청하여 100만원 정도의 연구비를 받았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액수였다.
  1970년도에 들어와서 이범삼은 동아일보의 자금 지원으로 녹색 수정의 성장에 다시 성공한다. 이 연구는, 그 이후 국내 어디서도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는 소재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범삼은 강의실에서 쓰러졌다. 그리고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고 부산의 백운묘지에 영원히 잠들었다.




부산대학교 물리학과는 1946년 개교한 부산대학에 1951년. 수물과로 발족, 1953년 부산대학교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대학원 개설, 1961년 대학정비령에 따라 폐과, 1964년 물리학과로 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