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전문학교 수물과(1915 - 1945)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는 일제가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했던 그해 4월에 개교되었다. 처음 연희의 설립은 정규대학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에 대학령(大學令)이 없다는 이유로 그 설립을 저지하고 다만 1917년 4월에 이르러 “사립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비록 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나, 그 조직 구성은 대학의 체제로 이루어졌다. 즉 다른 전문학교와 같이 어떤 특정한 분야에 한한 것이 아니라 문과, 신과(神科), 수학 및 물리학과, 농과, 응용화학과로서 한 종합대학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리고 졸업생에 학사 칭호를 수여하였다. 수학 및 물리학과는 간단히 수물과(數物科)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초창기부터 수물과가 포함 된 것은 미국인 선교사인 물리학 전공의 베커(Arthur Lynn Becker, 白雅悳)의 강력한 주장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설립시에 크게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설립 후 학교 전체 학사관리를 하면서 초대 수물과 과장의 일을 보았다.
  연희전문학교는 서울시 종로에 있는 중앙 YMCA회관에서 개교하였다. 2년 후인 1917년에 현재 연세대학교가 있는 신촌에 학교 대지를 매입하고 치원관(致遠館)이라고 명명된 목조건물을 건립하여 여기서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 후 1922년에 스팀슨관(Stimson館), 1924년에 언더우드관(Underwood館)과 아펜젤라관(Appenzeller館)이 준공되었다. 이들 중 수물과가 사용한 아펜젤라관은 이학관(理學館)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연건평 523평인 석조3층 건물이고 스팀슨관과 아펜젤라관과 같이 1981년에 문화재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펜젤라관에는 물리학과 화학의 실험실이 있었고, 그 당시 베커가 직접 1만달러를 갖고 일본 쿄토에 있는 시마즈과학기기제작소에 가서 실험기기를 구입하여 미국 대학 수준의 실험시설을 갖추었다고 한다.
  1923년 3월에 총독부에서 “개정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문과, 신과, 상과만 두고 수물과를 비롯한 나머지 학과는 폐쇄하기에 이른 일이 있었다. 다음해인 1924년 4월에 베커의 노력으로 수물과가 부활되었다. 1922년에 수물과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한 최규남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정원 30명에 17명이 입학했으며 최종 졸업인원은 그 3분의 1인 6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당시 상당히 엄격한 교육이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3월에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교육방침에 따라 학칙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종래 “문학, 신학, 상업, 수학 및 물리학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한다”고 했던 것이 이때는 “문학, 신학, 상업, 수학 및 이학에 관한 전문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으로 되었고, 종래의 수물과는 이과로 개칭되었다. 이때 이과의 학년별 정원은 40명이었다. 1942년 4년제이던 문과와 이과의 수학연한이 3년으로 단축되었다. 그리고 이과의 학년별 정원은 100명이고, 수학 및 물리학전공 30명, 응용화학전공 35명, 건축공학전공 35명이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과장은 베커 다음에 이춘호, 이원철로 이어졌고, 1940년 수물과가 이과로 된 후의 이과 과장은 최규남이었다. 수물과 교수는 이들 외에 루퍼스(W. C. Rufus), 김봉집(金鳳集), 장기원, 일본인 해곡수웅(海谷秀雄), 한인석과 같은 교수가 있었다. 이들 교수의 담당과목과 재직기간은 교수명단표와 같다. 우리나라 근대화 초창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더욱 일제의 계속적인 압박 속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이루어 놓은 이들의 선구적인 업적은 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의 기반을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본다. 1919년부터 1944년까지 수물과와 이과의 졸업생 수는 314명이었다.



  1919년의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은 전부 22명이었고, 이중에 4명이 수물과 졸업생이었다. 이 4명 중의 한 사람인 이원철은 졸업 후 모교에서 강의하다가 1922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시간주 앨비언대학에서 한 학기 수학 후에 실력이 인정되어 BA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미시간대학교에서 수학하고 “Motion in the Atmosphere of Eta Aquilae”라는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귀국하여 1937년까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교수로 있었다. 1926년 수물과 졸업생 중 최규남은 미국으로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수물과의 교수 등을 지냈다.(다음페이지 참조) 1930년 수물과 졸업생 중에는 박철재가 있었고, 졸업 후 2년간 모교 물리학교실에서 연구하고 1932년 일본에 유학, 교토제대 물리학교실에서 8년간 연구생활을 하여 “생고무의 경화(硬化)”라는 학위논문이 통과되면서 1940년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해방 후에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취임하고 그후 한국물리학회 초대 부회장, 초대 원자력연구소 소장, 인하공과대학(仁荷工科大學) 학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물리학과 이공교육에 기여한 바 크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될 당시 이공분야의 인재는 아주 드물었다. 그 많지 않은 인물 중에 연희전문 출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특히 우리나라에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는 이원철, 조응천(曺應天), 최규남, 박철재 등 4명밖에 없었는데 그중의 3명이 연희전문 수물과 출신이었다는것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육의 성과가 얼마나 컸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설립과 발전에 기여한 이들은 베커와 1926년에 수물과를 졸업한 최규남이었다. 베커(1879 - 1966)는 미시간주 앨비언대학에서 1908년에 학사학위를, 191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1921년 미시간대학교에서 스파크 스펙트럼(Spark Spectrum)에 관한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평양 숭실전문학교 물리학 교수로 있었고, 1915년 연희전문학교 설립시에 수학 및 물리학과인 수물과를 설치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에 개정조선교육령으로 수물학과가 폐쇄의 위기에 처했으나 그의 노력에 의해 존속하게 되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초창기부터 1940년까지 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초대 수물과 과장, 초대 학감,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부교장으로 있었다. 그는 학사관리의 책임을 수행하면서 원자물리학, 열역학, 천문학, 전자기학 등 광범위한 학과목을 강의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는 수물과 초창기에 당시 미국 대학수준의 실험시설을 갖추어 실험을 통한 물리학 교육에도 크게 진력하였다. 베커는 우리나라 근대화 초창기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여러 난관을 극복하면서 현대과학을 이 땅에 도입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 오늘의 연세대학교 물리학과의 기반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과학발전의 씨를 뿌렸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별세한 다음해인 1967년에 물리학과가 한동안 사용해온 연희관 현관에 흉상이 건립되었고, 이것은 현재 물리학과가 있는 과학관 로비에 옮겨져 있다.
  최규남(1898 - 1992)은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웨슬리안대학교에서 1927년에 학사학위를, 1930년에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2년에 미시간대학교에서 “Announcement of the new value of ‘Moment of Inertia’ of the HCN Molecule”의 학위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일반물리, 해석역학, 대수학을 강의하였고, 새로운 물리학을 이 땅에 도입하면서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수물과와 변경된 이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학과 발전에 기여해 오늘의 연세대학교 이과대학의 기틀을 잡았다.
  또한 그는 1945년부터 1년간 서울대학교 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교무처장을 맡았고, 1948년에 문교부 과학교육국장을 거쳐 1950년에는 문교부 차관, 1951년에는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고, 총장 재임중인 1952년 한국물리학회의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어 1960년까지 8년간 한국물리학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54년에 대한민국 학술원이 창설될 때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56년에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여 한국전쟁 후의 어려운 우리나라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모교인 오하이오웨슬리안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1957년에 명예법학박사를, 1967년에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8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였다.

이공대학 물리학과(1945 - 1977)
  연희전문학교는 일제 말기에 그들의 체제로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京城工業經營專門學校)로 변경되기도 하였지만, 해방이 되면서 장기원 등에 의해 1945년 9월에 접수되고 우선 연희전문학교로 시작하기로 하고 11월에 개교하였다. 이때 학과는 문과, 상과, 이과, 신과였다.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 재학생들은 문과, 상과, 신과에는 원하는 대로 입학되었지만 이과만은 시험을 보아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교에 걸쳐 외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아 입학시험을 갖기도 하였다.
  1946년 7월에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은 연희대학교 전문부의 학생이 되었다. 연희대학교는 처음에 단과대학을 중국식으로 학원(學院)이라고 불렀고 문학원(文學院), 상학원(商學院), 이학원(理學院), 신학원(神學院)으로 된 4개학원을 개설하였다. 이학원 속에는 수학과, 물리기상학과, 화학과의 3학과가 있었다. 물리기상학과는 1951년에 물리학과로 되었다. 대학교로 승격된 연희대학교의 첫 입학생은 연희전문학교 1년 수료생 중에서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그리고 일부는 외부에서의 지원자 중에서 시험을 통해 편입시켰다. 이학원이 사용한 건물은 연희전문학교 시대 수물과가 사용하던 아펜젤라관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해방 전 기숙사 식당으로 사용하던 1층 건물을 2층으로 증축하여 한경관(漢慶館)으로 명명하고 이 건물의 일부와 기숙사였던 핀슨(Pinson)관의 2층을 물리실험실로 사용하였다.
  1946년 9월 10일에 첫 강의가 시작되었다. 당시 이학원 원장은 장기원이었고, 물리학 교수로는 한인석, 문제근(文悌根), 그리고 김창수(金昌壽)였고, 1948년부터 윤세원과 김희규가 전임강사로 합세하여 1950년 6월 육이오전쟁이 나기까지 물리교육에 종사하였다. 1948년 10월에 2년제의 중등교원양성소가 수학과, 물상과, 화학과의 3과를 두면서 설치되었다. 1950년 6월에 첫 졸업생으로 수학과 24명, 물상과 21명, 화학과 27명이 배출되었다. 1950년에 화학공학과와 전기공학과가 증설되면서 이공대학이 발족되어 물리기상학과는 이공대학 소속이 되었다가 1951년에 물리학과로 되었다. 1950년 6월에 연희대학교 제1회 졸업생이 125명이 배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이공대학 졸업생은 물리기상학과 8명을 포함한 20명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나면서 학교는 휴교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고 11월 3일에 개강식이 있었다. 당시 물리기상학과는 전임교수가 없었고, 1회 졸업생인 김성삼(金聖三), 윤용원(尹龍遠), 그리고 재학생인 안세희, 김창영(金昌榮), 이종완(李鐘完)이 물리학 강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후퇴하게 되어 12월 6일에 재차 휴교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1년 10월 3일에 개강하였다. 천막으로 된 강의실과 추후 건립된 목조건물의 강의실에서 교육이 실시되었다. 실험은 전혀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강의 위주의 교육이 실시되었다. 1950년 6월초에 대학원이 서울에서 발족되었는데 개강도 하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 중단되었다가 부산 임시교사에서 1952년도 1학기부터 개강하였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중등교원양성소가 수학과와 물상과의 2과를 두면서 다시 시작하게 되고 1958년까지 지속하면서 38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 우수한 졸업생은 3학년 해당학과에 편입되었다.
  3년간의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어느 대학보다도 앞서 서울로 복귀하여 1953년 9월에 개강하였다. 1954년 3월에 연희대학교 대학원은 첫 석사학위 수여자 12명을 배출하였다. 이들 중 자연과학분야에서는 물리학 전공의 이학석사를 받은 1명뿐이었다. 1955년 정부파견 해외유학생으로 이철주가 미국 미시간대학교에 1년 동안 유학했으며, 같은 해 안세희가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 유학하여 물리학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고 1959년에 귀국하였다. 그후 졸업생들의 해외유학이 이어졌다. 1956년 10월에 이공대학이 사용할 연희관(延禧館)이 미 5공군의 지원을 얻어 준공되었다. 이 건물의 규모는 연건평 2014평이고 지하1층과 지상 6층으로 되어 있다. 물리학과의 실험실은 3층에 있었다. 실험실에는 일반물리학 실험실이외에 X광선실(당시 X선을 X광선이라 하였음)과 분광기실(分光器室)이 있었다.
  1957년에 연희대학교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연세대학교로 되었다. 연희대학교 이공대학 물리학과는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물리학과로 되었다. 1961년 졸업생에게 문교부 주관으로 학사고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때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생 전원이 합격하였고 더욱이 조동원(趙東源)은 전국 물리학과에서 최고 득점의 영예를 얻었다. 이공대학에 속하는 학과가 많아지면서 교내 다른 단과대학에 비하여 규모가 너무 커져서 1962년 2월에 이학부와 공학부로 나누어졌고, 이때 이학부의 학과는 수학과,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의예과였다.
  1965년 3월 이학부에 자연과학의 순수 및 응용분야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자연과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자연과학연구소는 대학의 사명이 교육뿐만 아니라 연구에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의 뒤떨어진 과학연구의 활성화를 촉구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다. 이 연구소의 초대 소장에는 안세희였고, 1967년에 한치선(韓治善), 1969년에 조경철(趙慶哲), 1971년에 정중현, 1973년에 이길상(李吉相), 1975년 이철주가 소장이 되었다. 창립 당시 물리학에 관한 연구실과 실장은 원자핵물리학연구실장 안세희, 고체물리학연구실장 정중현, 응용물리학연구실장 이철주, 광학연구실장 사우어(R. G. Sauer)였다. 1945년 해방이 된 후의 교수의 이름을 앞서 기술하였지만, 이들을 포함한 전직교수의 명단은 다음 물리학과 전직교수 명단표와 같다.



  1960년과 1961년에 이철주는 원자력원에서 콕크로프 - 월턴(Cockroft - Walton)가속기제작의 과제에 대한 연구보조금을 받아 김도경(金道經), 주광희(朱光熙)와 함께 연구하여 1963년도와 1964년도 「원자력연구원 논문집」에 “고전압 300 kV 콕크로프트 - 월턴가속기의 설계와 시작(試作)” “300kV 고전압 증배장치의 시작(試作)과 그 특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문교부, 원자력원, 연세대학교 대학원의 연구비를 받은 이철주는 고년규(高年奎), 정운경(鄭雲慶)과 같이 연구한 “분류형 유확산(分溜型 油擴散) 펌프의 시작(試作)과 그 특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1964년에 「새물리」에 발표하였다. 그는 고년규, 김도경과 함께 연구한 “Study of the Li7He4 Reac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1966년에 「새물리」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1961년에 연세대학교에서는 처음으로 5명의 교수에게 대학원 연구비를 지급하였는데 안세희는 “원자핵건판을 이용한 핵반응연구”의 과제에 대한 지원으로 연구를 수행하여 1963년에 “Study of the Ni(n,p)Co Reac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우리나라에서 연구한 논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물리학회지인 Physical Review에 발표하였다. 1962년에 안세희는 원자력원으로부터 “베타스펙트로미터”의 과제에 대한 연구보조금을 받아 정중현, 조성호(趙成浩)와 함께 연구하여 1963년에 한국물리학회지인 「새물리」에 “삼상한 이중집속(三象限 二重集束)베터선스펙트로미터와 그것에 의한 Au198의 베타선에너지 분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세희는 원자력원과 미국 United Board for Christian Higher Education in Asia로부터 연구비를 받아 베타선분광계를 설계, 제작하여 정원모(鄭元謨), 송희일(宋熙一)과 함께 연구한 “Yonsei Ⅱ Beta - ray Spectrometer and the Measured Beta - Ray Energy Spectrum of Cs137”라는 논문을 1967년 「새물리」에 발표하였다.
  정중현은 1964년에 유필원(柳弼源)과 같이 연구한 아연단결정의 Cellular Structrue의 논문과 유필원, 이강묵과 같이 연구한 “Pulling Technique에 의한 고순도 Bi 단결정의 생장”의 논문을 「새물리」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 유필원 및 문동찬(文東讚)과 같이 연구한 “정제된 Te의 전자기적 성질”의 논문, 1965년에 유필원 및 이동희(李東熙)와 같이 연구한 “윤제법에 의한 BaTiO3의 단결정 생장”의 논문과 1967년에 “CdTe 단결정의 생장과 몇가지 성질”의 논문이 「새물리」에 발표되었다.
  1961년에 미국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 파송된 사우어(史路德, R. G. Sauer)은 물리학교수로서의 임무를 다하면서 「새물리」와 JKPS(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 등의 한국물리학회 학술지의 창간 때부터 199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영문교정을 철저히 함으로써 한국물리학회 학회지의 질적 향상을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1965년 여름방학 중 아시아재단과 연세대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한국물리학회와 연세대학교 공동주최로 연세대학교 성암관에서 “원자핵물리학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과목과 강사는 원자핵구조 고윤석과 김정흠, 원자핵반응 성백능과 김현창, 소립자 김영덕과 박봉열, 원자핵실험 안세희였다. 정규참석자의 등록수는 74명, 청강생은 22명이었다. 정규참석자 중 19개 대학의 교직자 41명, 2개 연구소 연구원 3명, 7개 대학 대학원생 24명, 합계 68명에게 집행위원장 명의 수료증을 수여하였다.
  연세대학교는 하기 세미나를 전국 대학교수들을 대상으로 담당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서로 나눔으로써 대학교육과 연구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진흥위원회의 후원으로 1971년 7월 12일부터 4주간 개최하였다. 이때 3개 분야 중의 하나로 물리학 분야의 하기 세미나를 가졌다. 물리학분야의 과목과 강사진은 핵물리학Ⅰ 안세희, 핵물리학Ⅱ 김정흠, 입자물리학 박봉열, 통계역학 조순탁, 고체물리학 옥항남(玉恒南), 유체역학 김철수, 물리실험Ⅰ 이철주, 물리실험Ⅱ 옥항남이었다.
  해방 후 연희전문학교 인수와 이공대학 발전을 주도한 분은 장기원(1903 - 1966)이다. 수학자인 장기원은 1921년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25년 졸업과 함께 모교의 교수로 근무하다가 곧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도후쿠대학 이학부 수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전임교수가 되었다. 1939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긴 후 모교에 계속 남아 그는 1946년 7월에 연희대학교 승격과 함께 초대 이학원장(理學院長), 1963년 연세대학교 이공대학장 겸 부총장 등을 맡아보면서 모교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952년 대한수학회 부회장을 거쳐 1962년 대한수학회 회장, 1966년 과학기술 국제총연합회 이사가 되어 한국의 과학과 수학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초창기의 연세대학교 물리학과 발전을 주도했던 분은 이철주, 정중현, 안세희 등이다.
  이철주(1922 - 1988)는 1950년 연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55년 미국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70년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3년부터 1988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그 사이 연세대학교 학생처장, 교양학부장, 자연과학연구소장, 이과대학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물리학회의 사업간사, 상임이사장, 이사 및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초창기 학회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는 사회복지법인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으로 장애인들의 복지향상에도 기여하였다. 이철주는 국내에서 퍼짐펌프(diffusion pump)를 처음 제작하여 우리나라 진공기술개발에 앞장섰고, 이를 이용하여 국내최초로 200keV 콕크로프트 - 월턴형 가속기를 제작하여 Li7(p,α )He4 반응 등 낮은 에너지 핵반응 실험을 수행하였고, 이온 주입법을 이용하여 Si 검출기 및 태양전지 등 반도체 소자 개발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온선에 의한 표면개질, 표면분석, 기능성박막제작 등 이온선의 응용분야 개발에도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물리학회 공로상, 국민훈장 목련장 및 국민훈장 목단장을 수여받았다.
  정중현(1925 - )은 1946년에 연희대학교 전문부를 수료한 후 연희대학교 이공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하여 1952년 이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후 1959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70년 2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중현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인하대학교에서 재직하였으며, 1962년부터는 1990년 정년퇴임시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연세대학교 교수 재직시 1970년 2월부터 1년 6개월간 미국 데이턴대학교와 미 우주항공연구소에서 방문연구를 수행하였으며, 1983년에는 한국물리학회 회장, 1986년에는 연세대학교 이과대학장, 1988년에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정중현은 반도체란 말 자체가 낯설던 1960년대에 이미 반도체 연구를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반도체 연구의 초석을 놓은 선구자이다. 1982년에 처음 서울 국제반도체 심포지엄을 개최한 후, 이 심포지엄이 2년마다 열리도록 주도하였으며 이러한 학술활동과 교육을 통하여 반도체 연구를 주도함은 물론 수많은 반도체 연구인력을 양성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과 물리학회 발전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1994년에는 한국물리학회로부터 성봉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국제적으로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International Photovoltaic Science and Engineering Conference와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olid State Device and Materials의 자문위원으로 활약하였다. 2001년에는 반도체 연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2th International photovoltaic Science and Engineering Conference로부터 PVSEC Award를 수여받았다.
  안세희(1928 - )는 연희대학교에서 물리학전공으로 1951년에 이학사와 1954년에 이학석사의 학위를 받았다. 1959년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Protons from the 14MeV neutron Reaction with Zirconium”의 학위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1년부터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였고, 연세대학교에서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간 조교, 전임강사, 부교수, 교수로 재직하여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 종사하였다. 그는 원자핵반응에 대한 연구논문을 1957년, 1960년, 1963년에 Physical Review에 게재하였고, 1963년의 것은 한국학자에 의하여 국내에서 이루어진 연구논문으로서는 처음으로 게재된 것이다.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1961년부터 물리학과장, 이학부장, 자연과학연구소장, 기획실장, 대학원장, 교학부총장, 그리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년간 총장으로 대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더욱 그는 1952년 한국물리학회 창립회원이 되고, 1961년에 총무간사, 1962년에 편집간사, 1966년에 감사, 1971년에 부회장, 1972년에 원자핵물리학분과 초대위원장, 1989년 회장, 1981년에 한국원자력학회 회장, 1990년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고문, 1999년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이사에 선출되어 한국물리학회의 발전과 우리나라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1983년에 고려대학교와 대만 중앙대학교에서, 1986년에 미국 보스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1990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받았고, 은성화랑무공훈장을 1953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2년에, 성곡학술문화상을 1992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93년에 받았다. 1997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이과대학 물리학과(1977 - 2002)
  1977년 3월에 이공대학이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발전적으로 분리되어 이과대학 물리학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후 물리학과를 포함한 이과대학의 도약적 발전에 따라 공간의 부족이 심화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82년 2월에 과학관 건설이 시작되어 1984년 2월에 지하 1층 지상 6층 연건평 6450평의 과학관이 준공되었다. 물리학과는 과학관의 3층 전체를 사용하게 되어 연구 및 교육공간의 확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한 교수진은 1982년에 12명에 도달하였으며 미국으로부터 민공기(閔公基, 1982), 강익주(康翼周, 1984) 등이 방문교수로 강의 및 연구를 수행하였다. 1987년에 시행된 한국과학상 시상에는 물리학과 졸업생이며 현직 교수인 옥항남이 물리 부문에서, 그리고 역시 물리학과 졸업생이며 수학과 현직 교수인 박용문(朴用文)이 수학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물리학과는 본격적인 도약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90년에는 아시아태평양 물리학 학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95년에는 물리학과가 속해 있는 이과대학이 정부가 지원하는 대학원 중심대학(전국적으로 5개, 이과로는 전국적으로 2개)으로 지정되어 5년간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의 지원과 함께 물리학과는 연구 및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95년 4월에는 과학기술부지정 우수과학연구센터(SRC)인 초미세표면과학연구센터(소장 황정남)를 설치하였다. 1996년에는 학부제로의 개편에 따라 물리학과가 자연과학부에 속하게 되었다. 1999년 9월에는 전국적으로 실시된 두뇌한국21(Brain Korea 21) 사업 물리학 분야에서 연세대학교 물리학과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와 함께 두개의 BK21 선도사업 학과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물리학과는 BK21 사업단 명칭을 물리 및 응용물리 사업단으로 바꾸었으며 기초물리, 응용물리, 산학물리 과정 등을 설치하여 급변하는 첨단과학 기술을 선도하는 인재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BK21 지원 등을 통하여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는 실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2001년도에는 연세대학교 특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나노 과학기술 연구단의 주도학과로 지정된 바 있다.
  이미 물리학과는 SCI 학술지 논문 발표 수와 인용지수 등의 지표상으로는 미국 최상위 5개 대학의 수준에 근접해 있으며, BK21 사업이 종료되는 2006년에는 30여명의 전임교수를 보유하고 연구면에서는 논문당 인용지수와 인용횟수 등 질적인 지표가 미국의 10대 대학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2년 현재 물리학과는 24명의 전임교수와 9명의 연구교수, 20여명의 박사후연구원, 160여명의 석박사 대학원생을 가지고 있는 국제적 경쟁력있는 학과로 성장하고 있다.
  교수들의 연구분야도 물리학의 대부분 중요분야를 다 포함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고체물리실험분야에는 옥항남, 박홍이(朴洪二), 장수경(張壽卿), 이삼현(李三鉉), 김재훈(金在勳), 주홍렬(朱洪烈), 김창영(金昌永) 등이 고체물리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있으며 고체이론으로는 김철구(金哲久), 문경순(文敬淳)이 있다. 특히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는 초미세표면과학연구센터의 설치에 따라 표면물리분야에 우수교수를 확보하고 있으며, 황정남, 정광호(鄭光鎬), 여인환(呂寅煥), 이재용(李在鏞), 염한웅(廉罕雄), 유경화(劉京和)가 이 분야의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또한 BK사업단 발족과 함께 응용물리학분야를 특성화하여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응용물리 교육을 위하여 전자소재전공인 임성일(任星一)을 연세대 공과대학 재료공학부로부터 영입하였다. 광학분야에는 박승한(朴勝漢)이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핵 및 입자물리분야에는 입자이론으로 이재형(李載瀅), 김충선(金忠善), 박계태(朴癸泰), 현승준(玄昇峻)이 있으며, 핵이론으로는 이수형(李秀衡)이 활발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핵, 입자실험으로는 강주환(姜珠煥), 권영준(權寧俊)이 국제적인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BK21 선정이후 물리학과에서는 연세방문연구센터(Yonsei Visiting Research Center; YVRC)를 설치하여 전국의 교수, 연구원들에게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방문하여 공동연구를 수행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미 국내외 25개 대학 연구기관으로부터 47명의 연구자가 방문하여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연세대학교 이공대학과 이과대학 물리학과에서 이학석사와 이학박사 수여자수를 다음페이지(558쪽)에 표로 나타내었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리학과 학부 졸업생은 처음 배출한 1950년에서 2001년에 이르기까지 1661명이 배출되었고, 대학원 물리학 분야의 이학석사 및 공학석사 학위 수여자는 처음 배출한 1954년에서 2001년에 이르기까지 657명이었으며, 물리학 분야의 이학박사 수여자는 처음 배출한 1974년에서 2001년까지 136명이 배출되었다. 이들 총합계는 2459명이다.



문리대학 물리학과(1980 - 2002)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물리학과는 1980년 10월 원주분교에 신설되어 현재의 문리대학 물리학과가 새로이 자리잡게 되었다. 1981년 1월 원주분교가 원주대학으로 변경되면서 물리학과는 자연과학부 소속으로 바뀌었고, 1982년 10월 원주대학이 원주대학(인문사회학부, 자연과학부)과 원주의과대학(의학부)으로 분리되면서 1984년 3월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캠퍼스의 이전으로 본격적인 연구 및 실험이 진행되어 물리학과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84년 3월 원주대학에 자연관이 준공되었고, 1984년 10월 문리대학과 경법대학으로 분리되어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1993년 3월 자연관이 창조관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물리학과는 창조관 2층을 사용하며 교수 연구실 4개, 실험실 7개, 대학원 연구실 4개를 확충하게 되었다. 1995년 12월 원주캠퍼스 신입생을 계열별로 모집하게 되어 물리학과는 자연과학계열로 신입생을 선발하였고,
  1996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신입생을 학부별로 모집하여 자연과학부로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물리학과에서 첫 졸업생이 배출된 1985년에서 2001년에 이르기까지 졸업생 수는 690명이다. 1996년에 대학원 과정이 승인되어 1998년부터 석사과정을 배출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실험과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연구실은 고체물리이론 연구실, 표면물리 연구실, 광학반도체 연구실, 뫼스바우어 분광학 연구실로 구성되어 있다. 2002년 현재 교수진은 교수 4명, 강의 전담교수 2명이며 3월부터 교수 1명이 부임할 예정이다. 고체물리실험분야에는 남 균(南 均)과 백경선(白敬善)이, 표면물리실험분야에는 강석태(姜錫泰), 응용물리실험분야에는 최진철(崔鎭哲)이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는 1915년 개교한 연희전문학교의 수물과로 1917년에 시작, 1923년 폐과와 1924년 부활, 일제말기 경성 공업경영전문학교 시기와 광복직후 연희전문학교 이과를 거쳐, 1946년 연희대학교 이학원 물리기상학과로, 1951년 물리학과로 변경되고 1957년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로 되었다. 1950년 대학원이 발족. 1980년에 원주캠퍼스 문리대학에 물리학과가 신설된 후 1996년부터 대학원 설립.

 

 

 

 

 

 

 

 

 

 

 

 

 

 

 

 

 

 

 

 

 

 

 

 

 

 

 

 

 

 

 

 

 

 

 

 

 

 

 

전압계, 전류계, 검류계, 가변저항기 등 기본적인 계기와 함께, 이것으로 훌륭한 많은 과학자를 배출하였음. 왼쪽부터 고년규, 이철주, 안세희, 사로덕, 정중현.